재벌 2세 아니냐고요? 실력 하나로 우뚝 서기까지

두 분과 대화를 나눌수록 내면 에너지가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자라온 환경이 같은 영향도 클 텐데, 어떤 환경이었나요.
조준호 “아버지가 안 계신 결손가정이었습니다. 제가 네 살 때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생활력은 강하셨지만, 세세히 챙겨주는 편이 아니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까지 공부를 전혀 안 하고 놀았습니다. 만화 그리면서.”
조미진 “우리는 오빠가 나중에 만화가가 될 줄 알았다니까요. 엄마 몰래 무협지를 숨겨두고 보고 그랬어요. 엄마가 걱정을 많이 하셨죠.”
조준호 “그러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을 만나면서 삶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너는 집안의 가장이니 기둥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늘 들어오던 얘기인데 그날따라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교과서를 통째로 외우고, 공부 잘하는 짝꿍이 하는 대로 똑같이 따라 했어요. 2년쯤 하다 보니 문리가 통하면서 이해가 되더군요. 그때 공부란, 일이란 누구한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는 거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뭐든 자기주도적으로 하는 습성이 천성으로 굳어졌고요.”

문득 이어령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학교에도 잘 다니지 않아서 책을 통해 하고 싶은 공부를 맘껏 하면서 지의 세계를 넓혔다고 하셨어요. 아버지라는 틀, 학교라는 틀은 어떤 면에서 억압이기도 할 테지요.
조준호 “아버지의 부재는 지금의 모습을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겠죠. 성장 과정에서 억압이 없었던 건 맞습니다. 그래서 권위주의를 싫어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조미진 “권위의 표상인 아버지의 존재가 없으니까.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내 삶의 주인으로 일찌감치 우뚝 선 것도 있어요. 어머니는 세 아이 뒷바라지하느라 워낙 바쁘셨어요. 셋 다 독립적으로 자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누가 깨우지 않아도 새벽에 일어나 머리 감고 라면 끓여 먹고 학교에 갔어요. 하하. 어떤 때는 너무 일찍 가서 학교 수위 아저씨가 교문을 열어주셨죠.” 

전형성을 탈피한 리더가 발탁되는 배경에는 눈 밝은 선지자가 있기 마련이죠. 두 분에게는 누구였나요.
조미진 “우선 초등학교 때 피아노 선생님이 떠올라요. 제게 ‘미진아, 너는 어쩜 그리 멋있니’라며 처음으로 저라는 존재를 귀하게 대해주셨어요. 그전까지는 아무도 그렇게 말해준 분이 없었거든요. 중1 때 담임 선생님, 저를 발탁해준 모토로라, LG, 현대차그룹, LG인화원 선배님들 한 분 한 분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인간은 나를 알아봐주고 잠재력까지 볼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그제야 빛날 수 있는 존재예요.”
조준호 “동의합니다. 저의 경우 앞서 얘기한 초등학교 5학년 담임 선생님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군요. LG에서는 남용 부회장님, 강유식 부회장님이 알아봐주셨습니다. 남용 부회장님은 경영혁신추진본부장을 맡으면서 서구의 과학적인 문제 해결 기법을 그룹 내에 도입하고 싶어 하셨어요.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저를 믿고 중책을 맡겨주셨죠. 강유식 부회장님은 임원이 된 후에 만났습니다. 이분 역시 큰 프로젝트를 믿고 맡겨주셨어요. 너무 좋아서 미친 듯 일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대로 하고 있는지 먼발치에서 관찰하다가 헤매는 것 같으면 슬쩍 불러서 한마디 코치해주시곤 했어요.”

 

낀 세대인 X세대는 보고 배운 대로의 리더십이 통하지 않는 첫 세대예요.

상사는 옛 방식대로 모시면서,

아래 구성원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10년 후인 지금은 밀레니얼 세대가 낀 세대가 됐는데,

낀 세대의 애환은 여전합니다.

앞으로 리더십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포용’이에요.

차이를 인정하고 강점을 살리려면 위아래 세대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고 다양성을 포용해야 합니다.

(조미진)

함께 일할 사람으로 어떤 자질을 우선시하는지 궁금합니다.
조준호 “일과 사람에 대한 책임감을 봅니다. 리더로서 자질을 볼 때는 사람에 대한 책임감, 일만 시킬 때는 일 자체에 대한 책임감을 보죠. 이때는 ‘컴플리트 워크(Complete Work)’가 되는지 여부를 중시합니다. 컴플리트 워크란 ‘완전하게 일하기’라는 뜻으로, ‘완벽하게 일하기’와는 다른 개념이에요. 주어진 일을 완수하면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이 어디에 쓰이는지, 그다음엔 어떻게 진행돼야 하는지까지 생각해서 필요한 조치를 하고, 제대로 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 않고 학교에서 과제를 제출하고 잊어버리는 ‘학생 마인드’로 일하면 일터에서 인정받기 힘들어요.”
조미진 “오빠와 비슷해요. 제가 TCI(기질 및 성격검사) 심리검사에서 눈여겨보는 특성은 ‘자율성’이에요. 자율적인 인격체로서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것을 중시합니다. 대기업 조직 문화에서는 일반적으로 주어진 일을 하면 된다고 여기기 쉬운데, 그렇지 않아요. 일을 확장적으로 볼 줄 아는 사람은 이 일이 자기 주변의 일과 어떻게 연계돼 있는지가 보여요.”

컴플리트 워크와 확장적 사고. 용어는 다르지만 두 분의 메시지는 같군요. 조미진 전무님에게 여쭙니다. 여성 리더인 동시에 오래전부터 여성 리더십을 연구해온 전문가이기도 하죠. 일터에서 여성으로서 정체성을 의식하나요? 혹은 의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는지요.
조미진 “태어날 때부터 가진 여성성과 남성성은 분명 존재해요. 여성은 남성에 비해 근육도 없고 힘도 약해요. 차이는 인정해야죠. 다만 사회화 과정에서 굳어진 전형성에 대한 시각은 문제가 있어요. 예를 들어 여성이 일터에서 집에 전화하면 ‘집안일에 신경을 빼앗긴다’는 부정적인 시각이 많지만, 남성이 집에 전화하면 ‘자상하다’라는 긍정적인 반응이 많아요. 저는 내가 가진 여성성을 좋아합니다. 출근 전에 화장하고 머리를 정돈하는 건 프로로서 긴장감을 주기 때문에 중요하게 생각해요. 여성이든 남성이든 자신이 가진 매력을 어필하는 건 자연스럽다고 봅니다.” 

현대차그룹 이후 조 전무님의 행보는 굉장히 확장적입니다. 2022년 세종문화회관 이사장 선임에 이어 지난해에는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사무총장을 맡았어요. 조 전무님에게 일이란, 성공이란 뭔가요.
조미진 “인간은 누구나 인정받고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일이란 그런 인정과 기여가 작동하는 체계예요.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 하는 일이 내 삶의 가치에 부합하는 순간이 많을 때 그 생은 성공한 삶이라고 볼 수 있겠죠. 제가 지향하는 삶의 가치가 있습니다. 첫째, 옳게 살고 싶다. 둘째,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지속적으로 배우고 싶다. 셋째, 다른 사람의 삶에 도움이 되고 싶다. 제가 해온 일이 HR이고, 타인의 성장을 돕는다는 점에서 고결한 가치를 가진다고 볼 수 있겠어요. 일의 마지막 단계에는 ‘성공 나눔’이 있습니다. 최근 들어 나눔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이 해요. 오빠도 그렇지 않을까?” 
조준호 “비슷해요. 나에게 일은 좋아하고 재미있는 것이에요. ‘회사에 청춘을 바쳤다’는 말이 불편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속으로 ‘에잇, 자원봉사 했나?’ 해요. 일이란 회사와 계약해서 성과를 만들기 위해 하는 일련의 활동입니다. 내 이름을 걸고 내가 맡은 일을 잘해내고 싶었어요. 소위 LG맨으로서 정체성보다 일하는 인간 조준호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했죠. 최선을 다하고, 성과가 잘 안 나면 언제든 다른 곳으로 쫓겨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정말 프로가 되고 싶었고, 일 자체에서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성공이요? 자신이 타고난 대로, 생긴 대로의 소질 중에서 잘할 수 있는 것을 잘해서 그 분야에서 인정받는 것, 그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조 대표님은 책에서 “좋아하는 것을 하기보다 하고 있는 것을 좋아해라”라고 했지요. 하고 있는 것이 싫을 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조준호 “일단 버텨야 합니다. 잘 안될 때는 재미없죠. 그런데 자꾸 하다 보면 길이 보이고, 다음 레벨이 되면 재미가 생깁니다. 누구나, 어떤 분야든 마찬가지예요. 참고 견디는 시간이 필요해요. 일의 주인이 되면 재밌어집니다. 회사의 주인이 될 수는 없지만, 누구나 내 일의 주인은 될 수 있어요.”   

기존 리더의 틀을 깨고 나란히 조직의 고위직에 오른 두 분을 보고 혹자는 ‘재벌 2세, 3세가 아닐까?’ 추측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오로지 실력 하나로 이 자리에 우뚝 선 성공 서사에 감동받게 되는군요. 이야기를 나눌수록 두 분의 공통점이 보여요.
조미진 “맞아요. 오빠와 나는 유사성이 아주 많아요. 사람들은 바깥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고 ‘둘이 어쩌면 저렇게 다를까?’ 말하지만 내적으로 비슷합니다. 일에 대한 열정과 추진력, 결단력이 강하죠. 자기 관리 면에서도 철저한 편이에요. LG 임원으로 나란히 근무하던 시절 오빠와 같은 헬스장을 다녔는데, 새벽에 가장 열심히 운동하는 남매로 유명했어요.”
조준호 “향상심도 비슷해요. 어제의 나보다 발전하고자 하는 진화에 대한 욕구가 강합니다. 향상심은 변화가 빠른 세상에 꼭 필요한 리더십의 중요한 덕목이에요.”

조준호 전 대표가 밤의 고요를 닮았다면, 조미진 전 전무는 아침의 종달새를 닮았다. 조 전 대표가 잔잔한 호수처럼 말한다면, 조 전 전무는 몰아치는 파도처럼 말한다. 하지만 둘은 거짓 없는 새벽의 에너지를 닮았고, 본질이 녹아 있는 심해의 언어를 공유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에너지나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품고 있는 핵심이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걸 알겠다. 사전 질문지에 파란 펜으로 빼곡히 답변을 적어 온 준비성도, 일에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프로가 되고자 하는 욕망도, 지식과 정보의 최전선을 공부하고 미래를 반 발 앞서 내다보는 혜안도 꼭 닮아 있었다. 이제 남매는 ‘성공 나눔’이라는 같은 곳을 바라본다. 각각 전략가와 인재 전문가로 쌓아온 경험과 노하우를 후배와 사회에 아낌없이 내놓으려 한다. 우리 사회가 조준호·조미진 남매의 목소리에 귀를 활짝 열어놓길, 그리하여 그들이 쌓아온 성실하고 정직한 성공 방정식이 멀리 퍼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