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한 몰입의 순간을 기억하나요? 저는 중학생 때 어느 겨울방학이 떠오릅니다. 엄지손가락만 한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밤, 샬롯 브론테의 소설 《제인 에어》의 첫 장을 넘겼습니다. 두 장 세 장…. 외모는 볼품없지만 당당하고 주체적인 제인 에어, 거대하고 음침한 저택 게이츠헤드에 숨겨진 비밀에 점점 몰입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잊었습니다. 현실로 돌아온 건 마지막 장을 덮고서였답니다. 창밖으로 동이 트더군요. 책과 나, 둘만 있었습니다. 그 어떤 방해 요소도 없었지요. 그때의 희열감이란!이랬던 제가 달라졌습니다. 책 한 권을 한자리에서
커피, 좋아하세요? 저도 모닝커피를 생명수처럼 마시는데요. 커피 카페인이 온몸에 스르륵 퍼져야 비로소 하루가 열리는 느낌이 듭니다. 무슨 커피를 마실지는 그날에 따라 다릅니다. 속이 좀 허할 때는 에스프레소 네 샷이 들어간 플랫화이트에 시럽은 한 번만, 배가 부를 땐 에스프레소 솔로에 설탕 한 스푼, 대부분은 에스프레소 두 샷이 들어간 아메리카노를 마십니다. 원두는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아, ‘안물안궁’이라고요? 커피 취향 한번 까다롭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만의 커피 취향’이 분명한 애호가들이 늘고 있습니
한국 축구대표팀 이슈로 뜨겁습니다. 손흥민, 이강인, 황희찬 등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는 쟁쟁한 선수들로 역대 최강의 전력을 구성했는데도 요르단전에서의 경기력은 실망스러웠지요.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을 모아놓는다고 다가 아니라는 건 한 대기업 임원에게서도 들었습니다. “똑똑한 개인들을 모아놓기만 하면 자기 일만 한다. 내 일은 내가 맞고, 저 사람 일은 저 사람이 맞는다는 마인드여서 정반합이 이뤄지지 않는다.”두 경우에서 같은 문제점을 읽습니다. 바로 ‘리더십 부재’입니다. 어느 조직이든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고, 각자 해야할
결혼 회피 시대입니다. “언제 결혼해?”라는 질문이 “왜 그 사람이랑 결혼해?”로 바뀌더니 “결혼을 왜 해?”라는 물음이 더 흔한 세상이 됐습니다. 지난해 말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30대 여성의 세 명 중 한 명, 남성의 두 명 중 한 명 정도만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 답했더군요. 소위 결혼 적령기 한국인의 절반 정도가 결혼을 회의적으로 바라본 겁니다. 20년 전만 해도 ‘사랑의 종착역=결혼’이 당연한 도식이었는데요. 이젠 구시대 유물이 되어갑니다. ‘시대정신’과 ‘삶에 도움이 되는 공부’라는 두 축을 지향하는 《topc
생성형 인공지능 챗GPT가 출현한 지 1년, 미래 세상이 찾아왔습니다. 마치 알라딘 램프의 요정 ‘지니’가 요술이라도 부리듯, 순식간에 일상 곳곳의 풍경이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지요. 일의 방식도 달라졌습니다. 책을 집필하는 김 작가는 자료조사의 90%를 오픈 AI의 챗GPT에게 맡기고, 제안서를 작성하는 이 대리는 데이터를 모으고 분류하는 작업의 80%를 구글의 바드(Bard)에게 일임하며, 스페인 여행을 계획하는 박 아빠는 9박 10일의 상세 일정을 마이크로소프트 빙(Bing)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AI가 동료이자 비서, 분석가이
《topclass》 애독자님은 아시겠지만, 우리 팀은 매달 기획회의 때 새로운 공간을 찾아나섭니다. 서울 성북동, 삼청동, 연남동, 진관동, 익선동의 특색 있는 장소도 가고, 상암동 사무실에서 가까운 노을공원이나 파주로도 자주 나간답니다. 회의를 위한 공간의 조건은 분명합니다. 영감을 주는 공간.소설가 알랭 드 보통은 “장소가 달라지면 나쁜 쪽이든 좋은 쪽이든 사람도 달라진다”고 했던가요. 바깥에서 만난 팀원들은 사무실에서 만날 때와는 또 다른 사람처럼 보인답니다. 딱딱한 갑옷을 한 겹 벗어젖힌 홀가분함이 느껴진다고 할까요. 그만큼
‘기자는 나 아니어도 잘할 사람 많은데, 엄마 자리는 나 아니면 안 되니….’1년간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출근한 첫날, 아이들 얼굴이 아른거리면서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오래 자리를 비워본 사람은 알 텐데요. 난 자리는 알아도 든 자리는 모른다고 하던가요. 빈 시간에 대한 체감도는 확연히 다릅니다. 돌아온 사람에게는 빈 공백이 까마득하지만, 있던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벌써 왔어?" 그리고 다시 일상은 반복됩니다.‘차가운 휴머니스트’라는 별명의 그 선배 반응도 그랬습니다. 어제 보고 또 본 듯한 쿨한 인사와 함께 “밥 먹
한 시절의 경험이 인생 전반을 좌우합니다. 저는 한 번도 ‘기자’라는 명사형 꿈을 꾼 적이 없는데요. 대신 ‘읽고 쓰는 일을 하고 싶다’는 동사형 꿈을 일찌감치 가졌습니다.‘읽기’의 세계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열렸답니다. 학교에서 독서왕을 선발한다는 얘기를 듣고 도전, 이후 학교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거의 매일 한 권씩 독파했습니다. 그렇게 목적을 달성해 독서왕이 됐는데요. 돌아보니 ‘상’보다 더 큰 부상을 받았더군요. 바로 독서의 재미입니다.‘쓰기’의 세계에 진입한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입니다. 소년OO일보 비둘기기자에 뽑혀,
‘저 사람은 어떻게 손대는 일마다 탁월한 성취를 이뤄낼까?’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같은 일을 해도 ‘되게’ 하는 미다스의 손을 가진 사람들. 도대체 그 사람들의 뇌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길래 독보적인 결과물을 낼 수 있는 걸까요. 그런 사람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어떤 일을 ‘되게’ 하려면 비단 아이디어의 창발에 그치지 않습니다. 처음 떠오른 생각을 구체화하고, 실행 가능성을 진단하고, 실행이 확정되면 실행 방법을 단계화한 후 마무리 짓고, 더 나아가 사후 서비스까지 예측해 움직여야 합니다. 고도의 사고력과 치밀한
2029년 대한민국 우리호가 달 탐사를 위한 여정에 나섭니다. 공중 폭발로 인해 실패로 돌아간 나래호 이후 5년 만의 도전. 하지만 태양의 흑점이 폭발하면서 태양풍이 우리호를 덮치고 맙니다. 과연 위대한 도전에 나선 대원들은 생존할 수 있을까요? 8월에 개봉하는 영화 〈더 문〉의 시놉시스입니다. 〈신과함께〉로 쌍천만 감독이 된 김용화 감독의 작품으로, 올해 최고의 기대작으로 꼽히지요. 〈더 문〉의 개봉을 바라보면서 두 가지 현상이 읽힙니다. 첫째, 한국 SF의 성취입니다. 우리나라는 ‘SF의 불모지’였습니다. 소수가 즐기는 비주류
당연하지 않은데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은 있는데 청소년날은 없고, 학생을 위한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은 있는데 어른을 위한 방학은 없지요. 아, 예외가 있군요.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과 교수님들은 덩달아 방학을 가집니다. 교사직이 인기 있는 가장 큰 이유일 테지요. 인생에는 방학이 필요합니다. 방학은 천편일률적인 시간표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호흡과 시선을 되찾는 시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속도가 있게 마련이지요. 달팽이는 달팽이만의 꼬물거리는 속도가, 치타는 치타만의 날쌘 속도가 있듯, 개별자인
〈topclass〉가 열여덟 살을 맞았습니다. 감개무량합니다. 그사이 내로라하는 잡지들이 명멸해갔지만, 〈topclass〉는 여러 번 혁신을 거치며 성장해왔습니다. 행간을 함께 읽어주신 독자님들 힘이라는 것, 너무나 잘 압니다.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성년이 된 〈topclass〉창간기념호에 어떤 내용을 담을까 고민이 깊었습니다. 공간이 생각을 움직인다고 하던가요. 꽃과 풀이 흐드러진 계절, 열린 생각으로 경계 없는 회의를 하기 위해 팀원들과 함께 사무실을 벗어났습니다. 연두색 잔디에 눈이 시린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우리는
5월호를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은 4월 중하순이고요. 벚꽃잎이 하르르하르르 떨어져 내리더니 보드라운 연둣빛 잎새가 돋아나기 시작하는군요. 계절의 변화는 어김없지만 꽃잎과 잎사귀는 한 해도 같은 적이 없었습니다. 한때 제 몸의 일부였던 꽃잎과 작별인사를 나눈 나무는, 차가운 겨울을 견디고 이듬해 새 꽃을 피워내고야 맙니다.코로나 이후 당연한 것들이 실은 당연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아서일까요. 이 당연한 자연의 순환이 새삼 기특하고 감격스럽게 느껴집니다. 싱그러운 생명의 기운이 콧속을 간지럽히는 찬란한 5월, 《topclass》는 이
《topclass》 애독자에게서 정성 어린 편지를 받았습니다. 출판편집자인 독자가 자신이 만든 책 사이에 빼곡하게 쓴 두 장의 편지를 끼워서 보내왔는데요. 홍보성 편지는 종종 받지만, 이번 편지는 진정성의 농도가 달랐습니다. 1년간 올인한 책이라면서 이 책의 가치를 설파했습니다. 바로 우리나라 멘탈 코치 1호인 박철수 씨가 쓴 《위너스킬》입니다. 편집자는 자신의 인생을 바꾼 비결이 책에 담겨 있다고 고백합니다. 명상과 마음공부를 오래 했지만 일상과 통합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다가 박철수 씨의 멘탈 코칭을 접했고, 1년간 ‘스포츠 멘탈
얼마 전 한 회사를 찾아가 MZ세대 임직원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습니다. ‘나 자신을 인터뷰하는 법’을 주제로 이야기했는데요, 그 과정에서 예상 못 한 상황을 맞닥뜨렸습니다. 강연에서 ‘듣기’와 ‘쓰기’에 대해 풀어냈음에도 질의응답 시간에는 ‘말하기’에 대한 질문이 쏟아지는 게 아니겠어요? 어떻게 해야 대중 앞에서 떨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잘 전달할 수 있는지 묻는 청중의 간절한 눈빛이 아직도 선연합니다. 그만큼 공적인 말하기 상황이 많아지고 있다는 방증이겠지요. 바야흐로 ‘말의 시대’입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세
《톱클래스》는 사람으로 세상을 읽어내는 잡지입니다. 매달 시대정신이나 트렌드를 반영한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의 최전선에 있는 인물을 심층 인터뷰하는데요. 잡지를 만들다 보면 우리 팀원들은 그 한 달간 해당 이슈의 페르소나로 살게 된답니다. ‘짠코노미’를 다루면 당장 온라인 가계부를 쓰며 허리띠를 졸라매다가도 다음 달이 되면 슬그머니 멈추고, ‘직장인의 갭이어’를 다루면 “우리도 갭모먼트를 가져야겠어!”라며 주먹을 불끈 쥐다가도 곧 언제 그랬느냐는 듯 새 주제로 옮겨 타곤 합니다. 독자님에게 드리는 이 편지는 늘 마감 마지막 날 쓰는
《topclass》 독자의 65%는 35세 이하입니다. 인터뷰이 역시 40대 이하가 대다수였는데요. 그간 수백 명의 인터뷰이를 만나면서 깨달은 것들이 있습니다. 일명 80 대 20 청년창업론입니다.(객관적으로 검증된 데이터는 아니고 어디까지나 저의 자체적인 분석이랍니다.) 일자리를 찾는 청년은 두 가지 선택지 중 한 곳을 향하지요. 취업에 관심 있는 청년이 80% 정도라면, 나머지 20%는 창업에 관심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전자가 기성세대가 이미 만들어놓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쓴다면, 후자는 세상에 없는 자기만의 의자
꼰대 전성시대, 어른 실종시대라고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나이 듦은 존경이나 경외의 대상보다 꼰대 이미지가 강해지고 있지요. 하지만 청년은 어른을 기다립니다. 그것도 아주 간절하게. 갈림길에서 헤맬 때 통찰력 있는 어른의 한마디가 필요하고, 삶의 의미에 굶주린 ‘그레이트 헝거(Great Hunger)’들은 자기만의 단단한 철학을 가진 어른의 책을 뒤적입니다.일명 ‘피터슨 현상’을 일으킨 조던 피터슨 하버드대 교수의 《12가지 인생의 법칙》이 출간 몇 개월 만에 10만 부 넘게 팔리고, 한동일 법학자의 《라틴어 수업》이 40만 부 이상
혹 삶이 고단해 증발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적 있나요? 마치 처음부터 존재가 없었던 것처럼. ‘해야 할 일’에 짓눌려서 ‘하고 싶은 일’은 저 뒤로 밀려나 있진 않나요? 그래서 버킷리스트가 하나둘 지워지기는커녕, 점점 늘어만 가지는 않는지.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도 오늘일 것 같은 일상의 무한 루프에서 헤매는 건 아닌지요. 그렇다면 당신은 바로 그때인지 모릅니다. 인생의 가을방학이 필요한 순간. 가을방학, 생소한 개념이지요.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그리고 본격 학기를 시작하기 전의 봄방학은 있는데 유독 가을방학만 없지요. 여기
이 글을 읽는 독자님은 대개 두 부류 중 하나일 겁니다. 《topclass》 정기 구독자이거나 이번 호 주제 ‘애서가들’에 자석처럼 끌렸거나. 어느 쪽이든 책 욕심쟁이일 것 같군요. 침대 주변에는 읽다 만 책들이 케이크박스보다 높이 쌓여 있고, 책상 위에는 밑줄 그으며 읽던 책들이 대기 중이며, 책꽂이에는 세로로 꽂을 공간이 부족해 그 위에 가로로 채워가면서 책들이 점점 숨 쉴 공간을 잃어가진 않는지요?그렇다면 당신은 애서가(愛書家)일 확률이 높습니다. 애서가라고 단정 짓지 않고 ‘확률’이라는 표현을 굳이 쓴 건 우리가 ‘사랑’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