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이선주 객원기자

독학으로 최고가 된 멀티미디어 디자이너

오프라인에 비해 수명이 짧은 멀티미디어 디자인. 그는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창의성과 자기 혁신이 생명인 이 일이 자신의 성격과 잘 맞는다고 말한다.
멀티미디어 디자이너 최은석. 그는 2006년이 끝나가는 때 굵직한 상 2개를 한꺼번에 받았다. 그가 대표이사로 있는 회사 ‘디스트릭트 홀딩스’의 개편 홈페이지가 런던 국제광고제에서 금상을 받은 데 이어 그가 디자인 책임을 맡은 현대자동차 LUV 베라 크루즈의 온라인 카탈로그가 ‘코리아 디자인 어워드 2006’에서 디지털 미디어 디자인 부문에 뽑힌 것.

그를 만나기 위해 서울 역삼동 디스트릭트 홀딩스 사옥을 찾았다. 현관문 옆에 직원들 이름을 가나다라 순으로 적어놓은 문패가 있었다. 어디에도 직급 구분은 없었다. 한참 뒤쪽에 자리 잡은 ‘최은석’의 구내번호로 전화를 하자 그가 직접 받아 문을 열어준다. ‘freight’란 표시가 붙어있는 자그마한 방에서 그는 “찬 것, 뜨거운 것 중 어느 걸로 드실래요?”라며 음료 주문을 받는다. 그가, 우리나라 멀티미디어 디자이너 중 1인자로 꼽히고, 100명 가까운 직원을 둔 디자인 회사의 대표다.

“일할 때는 위계질서가 필요해요. 팀을 이뤄 일하는 작업에서 누군가 방향을 잡아가야 하니까요. 그 외에는 권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각자가 자신의 디자인을 책임지는 디렉터이고, 저는 그들에게 박수를 치거나 비평을 해주는 존재지요.”

각 디자이너들의 개인 공간이 널찍한 데 비해, 대표인 그의 공간은 그리 크지 않다. 수많은 디자이너들을 진두지휘하는 그는 정식 교육기관에서 디자인을 공부해 본 적이 없다. 대학도 졸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최고의 디자이너라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집안 반대로 미대 진학을 포기하고 경희대 사회학과에 진학했던 그는 몇 달 만에 학교를 그만뒀다.

전산병으로 군대에 다녀온 후 ‘앞으로 멀티미디어 세상이 열리겠구나’ 직감했고, 멀티미디어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유학도 생각해 봤지만, “일단 일부터 해보자”며 뛰어들었다. 군대를 제대한 1994년, CD-Rome 타이틀 디자인부터 시작했다.

“어머니가 화가셨어요.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고독한 예술가’의 길을 걷고 싶지는 않았죠. 사람들과 활발하게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화가가 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런던 국제광고제 금상과 ‘코리아 디자인 어워드 2006’ 수상

웹 사이트, 휴대전화, 디지털 TV 등 사람들이 하루 종일 곁에 두는 멀티미디어 세상을 디자인하고 있으니, 그의 꿈대로 된 셈이다. 그가 제일 처음 디자인 책임을 맡아 진행한 프로젝트가 1995년 청와대 홈페이지 개편 작업이었다. 그 후 검찰청, 국가정보원, 경찰청, 재경부 등 관공서 홈페이지를 도맡아 작업하다시피 했다.

“청와대 홈페이지를 만들 때 한 비서관이 ‘꿈에서 계시를 받았다’며 자신의 꿈을 영상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백두산에서 날아오른 봉황이 한라산에서 알을 낳고 인왕산 청와대 쪽으로 날아왔다는 거예요. 당시 기술로는 홈페이지 안에 동영상을 넣을 수 없었지요.”

1998년 그는 새로 개발된 ‘드림위버’ 프로그램을 이용해 자신의 홈페이지에 멀티미디어를 접목시켰다. 마우스 조작에 따라 인터액티브하게 움직이며 사용자들과 교감하는 그의 홈페이지 ‘오렌지 서핑’은 그해 인터넷 대상, 디지털 대상을 받으며 돌풍을 일으켰다. 자신의 홈페이지 이름을 ‘오렌지 서핑’이라고 지은 것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관공서에서는 하나같이 배경을 파란색으로 해달라고 주문했어요. 믿음과 권위적인 느낌을 주는 색이라고요. 제 홈페이지는 그것과 반대로 만들었죠. 파랑과 반대되는 활동적인 오렌지색에 사용자들로 하여금 파도 타는 것(서핑) 같은 역동적인 느낌을 느끼게 하고 싶었어요.”

1998년 독립해 한동안 ‘제일 비싼 프리랜서’로 주가를 높였던 그는 2000년 멀티미디어 디자인 회사 ‘뉴틸리티’를 세웠다. 1973년생 동갑내기 김준한 씨와 함께였다. 같은 회사에서 잠시 함께 일한 적도 있다는 그들은 서로가 ‘짝’임을 금방 알아봤고, 지금까지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동갑내기인 공동대표 김준한 씨(왼쪽)와.

김준한 씨는 최은석 씨를 처음 봤을 때 “한 마리 야수 같았다”고 말한다. 김준한 씨는 서울대 미대 산업디자인과 출신. 교과서적인 디자인 훈련을 받아온 그에게 최은석 씨의 작품은 “톡톡 튀는, 어디서도 본 적이 없던 것”이었다. 반면 최 씨는 김 씨의 ‘기본에 충실한 논리적 디자인’에 이끌렸다. 그렇게 둘이 하나가 됐고, 김 씨의 후배인 서울대 산업디자인과 출신들이 이 회사의 주축이 됐다. 이 회사는 적대적 M&A의 위기를 넘긴 후 2004년 디스트릭트 홀딩스로 새로 출발했고, 더욱 발전했다.

삼성전자와 SK, 하나은행, 혼다, 야후, 다음 등이 주요 고객. SK 커뮤니케이션스가 인수한 싸이월드의 개편도 맡았다. 올 상반기 새로 론칭할 예정인데,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선보일 것”이라고 말한다. 오프라인에 비해 수명이 짧은 멀티미디어 디자인. 그는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창의성과 자기 혁신이 생명인 이 일이 자신의 성격과 잘 맞는다고 말한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다들 어깨가 넓어 보이도록 일부러 교복을 고쳐 입던 중고등학교 시절, 그는 반대로 어깨를 좁혀 입었다. ‘굳이 남들을 따라가야 하느냐’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촌스럽다고 야유했지만 굴하지 않았다고. 주위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정신이 그의 오늘을 만든 셈이다.

그의 일이 그랬다. 2개의 창이 동시에 열리면서 역동적인 화면이 연출되는 삼성전자의 3세대 휴대전화 홍보 플래시나, 클릭으로 창을 열던 방식에서 벗어나 마우스를 끌어오는(드래그) 방식으로 세부 내용이 열리게 하는 디스트릭트 홀딩스의 새 홈페이지나 모두 일반의 예상을 뛰어넘는 데서 디자인이 시작돼 “놀랍다”는 반응을 얻었다. 요즘은 새로운 형태의 MP3 개발에 열을 올리며 오프라인 디자인까지 영역을 넓히려 한다. 그에게 “함께 일할 식구를 어떤 기준으로 뽑느냐?”고 물었다.

“열정적이고 게으르지 않고, 무엇보다 정치적이지 않아야 합니다.”

돈이나 입신양명이 목적이 아니라 일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 그런 면에서는 철저히 ‘코드 인사’인 셈이다. 김준한 대표와 그가 그런 면에서 서로 맞아 함께 일을 하게 됐다고. 김준한 대표는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디자이너와 사내 결혼을 했는데, 30대 중반인 최은석 씨는 아직 미혼이다. “디자인업계의 발전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며 원하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라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이상향을 묻자 ‘가죽 치마가 어울리는 여자’란다. 멋을 아는 여자라는 뜻이다.

사진 : 이창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