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깅스가 된 페트병

레깅스는 러너들의 필수템이다. 레깅스 하나면 스타일도 챙기면서 운동을 할 수 있어서다. 무엇보다 편하다.
러닝뿐 아니라 필라테스, 헬스 등 운동복으로 활용도가 높고 일상복으로도 손색이 없다.
웬만한 스포츠 브랜드에도 레깅스 라인이 빠지지 않는다. 넘쳐나는 레깅스 제품 가운데 착한 레깅스가 눈에 띈다.
폐페트병으로 만든 플리츠마마의 레깅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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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슬레저룩 시장의 성장세가 매섭다. 애슬레저룩은 애슬레틱(atheletic)과 레저(leisure)를 합친 용어로, 일상생활과 레저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패션을 말한다. 애슬레저룩의 대표적인 예가 레깅스다. 가볍게 산책 나갈 때나 한강을 달릴 때, 등산할 때는 물론이고 회사에 갈 때, 일상을 즐길 때도 착용할 만큼 레깅스는 패션의 뉴노멀이 됐다. 여성만 찾는 것도 아니다. 레깅스 위에 짧은 반바지를 덧입는 남성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한국패션산업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애슬레저 시장은 2009년 약 5000억 원에서 2016년 1조 5000억 원 수준으로 성장했다. 2020년 시장 규모는 약 3조 원에 달했다. 시장 조사 업체 유로모니터는 한국의 레깅스 시장 매출이 미국, 일본에 이어 세 번째로 크다고 밝혔다.

스타 마케팅으로 소비자를 현혹하는 레깅스 시장에서 플리츠마마의 제품은 단연 돋보인다. 플리츠마마는 니트 회사에서 일했던 왕종미 대표가 2017년 11월 설립한 스타트업이다. ‘Look Chic, Be Eco(룩 시크, 비 에코)’를 브랜드 철학으로 내세운 플리츠마마는 버려진 페트병을 수거해 패션용품을 제작한다. 플리츠마마는 아코디언 모양처럼 접는 숄더백과 토트백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최근 의류로 영역을 확장해 레깅스, 맨투맨, 조거세트 등도 출시했다. 즉 달릴 때 마시던 생수병이 달릴 때 입을 수 있는 레깅스로 변신한 것이다.

“플리츠마마는 리사이클과 업사이클에서 한층 더 확대된 개념인 미사이클(me-cycle)을 추구해요. ‘나(me)로부터 시작하는 아름다운(美)’ 선순환, 즉 내가 모든 것의 주체가 되는 거예요. 내가 버린 페트병이 아름다운 패션이 되어 다시 내게 돌아오는 것, 내가 소비하고 내가 책임진다는 의미입니다.”

20~30대의 옷장 속 필수템이 된 레깅스에 가치소비가 더해진 결과다. 똑같은 레깅스를 입더라도 환경과 지속 가능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소비자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지금까지 플리츠마마가 사용한 페트병은 500ml 기준 185만 개에 이른다. 왕 대표는 “MZ세대는 친환경 제품이라도 디자인이나 기능성이 미흡하면 구매하지 않는다”면서 “플리츠마마 모든 제품이 빠르게 완판되는 것을 보면 디자인이나 기능 면에서 모두 인정받은 것 같다”고 했다.

플리츠마마는 온라인 중심의 판매처를 오프라인으로 확대했다. 올해 2월 여의도 ‘더현대 서울’에 첫 오프라인 매장을 낸 것을 시작으로 롯데백화점, DDP SEF(Seoul Ethical Fashion) 스토어, 편집숍 토우드 등에 입점했다. 지난해 11월 오픈한 글로벌 사이트를 통해 싱가포르·홍콩·일본·미국·중국 등에서도 주문이 이어지고 있다.

폐페트병(500ml 기준) 16개면 가방 1개, 10개면 레깅스 1개를 만들 수 있다.

‘버려진 페트병이 옷과 가방이 된다’는 발상이 MZ세대에게 통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됐나요.


“플리츠마마를 시작하기 전 니트 제품을 디자인·생산 하는 회사에서 근무했어요. 일을 하다 보니 수많은 원사들이 제작 후 버려지더라고요. 너무 큰 낭비라고 생각했습니다. 폐원사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에 효성티앤씨의 폐페트병 재생원사를 발견했어요. 페트병과 폴리에스터 섬유는 거의 동일한 원료로 만드는데, 폐페트병 재생원사에 니트 공법을 접목하면 보다 친환경적인 패션 제품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탄소와 폐기물 배출도 최소화할 수 있고요.”

페트병을 깨끗하게 세척해 잘게 부수면 플레이크가 된다(왼쪽). 이를 다시 잘게 부수면 폴리에스터칩이 되는데 여기에서 리사이클 폴리에스터 원사를 추출한다.

플리츠마마는 아코디언 모양의 숄더백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레깅스, 조거팬츠 등으로 제품 영역을 확장한 이유가 있나요?

“기업 목표 중 하나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 중 친환경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조금씩 바꿔나가는 거예요. 가방을 주력 제품으로 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의류라고 생각했어요. 2020년 6월 제주 에디션을 출시하면서 니트 폴로티와 리사이클 티셔츠 등 의류를 처음 선보였고, 그해 페트병 53개로 만든 플리스 재킷과 리사이클 캐시미어 스웨터, 머플러를 만들었습니다. 올해 3월부터 ‘러브서울’ 의류라인을 통해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레깅스, 조거세트, 맨투맨을 출시했어요. 애슬레저룩 붐이 일면서 인기 아이템이었거든요.”

버려진 페트병으로 만든 재생원사.

레깅스에 휴대전화를 넣을 수 있는 포켓이 있어서 운동할 때 유용하겠는데요?
디자인에 실용성을 강조한 부분이 눈에 띕니다.


“플리츠마마는 편한 브랜드이고 싶어요. 지구도, 소비자도 편하면서 스타일이 살아나는. 가방을 내놓았을 때 예쁘고 편하다는 반응이 많았어요. 그래서 의류도 활동성이 좋은 라인을 구축하려 했고요. 특히 실용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는데 인체공학적인 절개로 휴대전화 포켓을 만든 게 대표적인 예죠. 레깅스의 기능성도 신경 썼어요. 고탄력 스판덱스인 크레오라를 함유해 신축성을 살렸고, 입체적인 재단으로 체형을 잡는 실루엣을 만들었어요. 또 하이웨스트 와이드밴드로 배와 허리를 조이는 대신 안정감 있게 감쌌고요.”

플리츠마마의 스테디셀러, 아코디언 모양의 솔더백.

레깅스 하나 만드는 데 페트병 몇 개가 필요한가요?

“열 개면 돼요.”


플리츠마마를 설립한 지 4년이 됐는데, 그동안 사용한 페트병 양도 엄청나겠군요.

“지금까지 리사이클한 폐페트병은 500ml 생수병 기준 185만 개 정도 돼요. 이를 활용해 만든 원사 길이는 200만km고요. 감이 잘 안 오죠? 200만km면 지구를 50바퀴 감고도 남는 길이고, 지구에서 달까지 세 번 왕복할 수 있는 길이예요. 이처럼 엄청난 수치는 그만큼 환경에 기여했다는 걸 증명하는데, 소비자들과 함께 이뤄낸 성과예요.”


페트병이 패션 제품으로 탄생하는 과정이 궁금합니다.

“플리츠마마의 의류나 가방을 만들기 위해서는 투명 폐페트병이 필요합니다. 지난해 말부터 아파트 등 공동 주택에 설치된 분리수거장에서 투명 페트병은 분리 배출하도록 법이 바뀌었어요. 이렇게 수거한 폐페트병을 깨끗하게 세척해 잘게 부수면 플레이크가 되는데, 이를 다시 폴리에스터칩으로 만들어요. 폴리에스터칩에서 다시 리사이클 폴리에스터 원사를 추출합니다. 이 원사를 활용해 플리츠마마 제품을 만드는 거죠.”


페트병을 재활용해 다시 저렴한 페트병으로 만드는 것보다 패션 제품으로 재탄생시키면 부가가치가 더 크겠네요.

“버려지는 페트병의 약 90%는 차량용이나 부직포용으로 재탄생되고 있어요. 국내 폐페트병 대부분이 해외 시장에서 저가 제품 용도로 판매됐습니다. 수익성이 높지 않아 큰 주목을 받지 못했죠. 작년에는 코로나19로 수출 문제까지 겹쳐 쓰레기 대란이 있었어요. 반면 친환경 섬유로 활용하면 국내에서 사용 가능하기 때문에 외부 환경에 취약하지 않고 가격 면에서도 일반 섬유보다 높은 대우를 받습니다. 환경보호라는 단순 캠페인을 넘어 성장성 높은 산업으로 연결되는 거죠. 또 페트병이 폐기되고 분해되는 데 500년 이상이 걸리지만, 페트병을 재활용해서 가방·신발·의류 등으로 만들면 길게는 몇 십 년을 사용할 수 있어 수명도 늘어나는 셈이에요.”


아웃도어족 MZ세대가 늘고 있습니다.
가치소비를 지향하는 MZ세대의 특징과 맞물려 폐플라스틱을 활용한 레깅스 반응도 좋을 것 같은데요?


“패션 분야에서도 친환경·리사이클링이 ‘힙’한 키워드로 떠올랐어요.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지속적인 트렌드로 자리 잡아가고 있죠. 이러한 추세에서 아웃도어 활동이 확산되며 두 가지가 잘 맞물렸다고 생각해요. MZ세대는 가치소비를 지향할 뿐 아니라 상상력을 디자인으로 구현한 제품에 매력을 느껴요. 친환경 제품이라도 디자인이나 기능성이 미흡하면 구매하지 않습니다. 플리츠마마 모든 제품이 빠르게 완판되는 것을 보면 MZ세대 소비자에게 디자인이나 기능성 면에서 모두 인정받고 있다고 느껴요.”


플리츠마마가 어떤 브랜드로 자리 잡길 바라나요.

“앞으로 기술 발전과 인류의 상상력이 결합되면 우리에게 당면한 기후문제를 차근차근 해결해갈 수 있다고 믿어요. 플리츠마마는 이러한 상상력을 저희 방식으로 표현한 브랜드고요. 패션은 포기할 수 없지만 지구도 보살피기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따뜻한 브랜드가 되고 싶습니다. 에코를 강요하기보다, 힙하고 멋지기 때문에 함께할 수밖에 없는 브랜드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