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을 준비하면 현장에서 겨우 50을 보여줄 수 있었어요.

기회도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었고요.

학창 시절부터 배낭 하나 메고 독립영화를 찍으러 다녔고,

그렇게 찍은 필름을 들고 소속사를 찾아다니기도 했어요.

더 어릴 때는 현장에서 많이 혼나기도 해서

매일 저녁 울면서 잠들었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한 번도 연기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악에도 농도가 있다면 〈더 글로리〉의 박연진(임지연)은 순도 100%의 악인이다. 일말의 양심이나 선량함이 제거된 상태의 박연진은 도리어 크리스털처럼 견고하다. 눈이 부신 것만 같은 착시도 든다. 더구나 연진은 그 힘을 너무나 잘 사용할 줄 알기 때문에 웬만한 외력은 그 단단함을 뚫을 수가 없다. 설령 문동은(송혜교)의 복수가 성공한다고 해도 그 복수는 박연진의 바깥은 무너뜨릴 수 있어도 안쪽까지 붕괴하진 못한다. 그가 후회하는 것은 자신의 악행이 아니라, 그 악행을 들킨 것이므로. 여기엔 어떤 갱생의 여지도, 참회의 기미도 없다.

선이 그렇듯, 악이 이토록 꽉 찬 모습으로 서 있으면 거기에도 어떤 경이가 생긴다. 한 사람이 저럴 수도 있구나, 한 인간을 저렇게까지 할 수 있구나. 그 경지는 결코 어설프거나, 흉내로는 다다를 수 없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악에 받쳐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더 글로리〉가 막을 내린 지금도, 임지연을 향한 박수가 그치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런 순악질이 있다손 쳐도, 그 인물을 형상화해 실존하게 하고, 믿게 만드는 건 오직 배우의 몫이다. 배우가 어떤 생기를 불어넣느냐에 따라 인물의 밀도는 달라진다. 애초 송혜교의 복귀작으로 시작한 이 작품은 ‘임지연의 발견작’으로 막을 내렸다. 임지연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아서 더 그랬다. 그가 빈틈없이 검어서, 이 복수극은 더 찬란했다.

 

천사의 얼굴, 악마의 심장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저를 미워하길 바랐어요. 어떤 이해도 연민도 느끼지 않기를요. 김은숙 작가님도 처음 쓸 때부터 연진에게는 어떤 여지도 주지 않을 것이라고 했어요. 단 한순간도 연진이가 용납되거나 이해되지 않을 거라고요. 저도 동의했고요.”

연진 역에 임지연을 캐스팅한 김은숙 작가는 “한 번도 악역을 해보지 않은 배우라, 내 작품이 처음이길 바랐다”고 했다. 그가 박연진을 두고 그렸던 “천사의 얼굴, 악마의 심장”이라는 인물 설명에 어울리려면 일단 ‘천사의 얼굴’을 가졌어야 하니까. 그러니 악마의 심장을 탑재하는 건 임지연의 몫이었다.

“주변 선배님들과 동료 배우들부터 학부 때 선생님까지 만나서 조언을 구했어요.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취재했던 과정이 촬영 때보다 더 치열했죠. 그러다가 답이 내 안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나의 사소한 습관들, 짜증 났을 때 짓는 표정 같은 걸 극대화해보기로 했죠. 연진은 악인이 되려고 된 게 아니라, 이유도 없고 죄책감도 없어서 모르고 보면 해맑아요. 누구랑 있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하고요.”

담배 하나를 피우더라도 혼자 있을 때와 남편과 있을 때, 친구들과 있을 때의 무드를 모두 달리했다. 그 사소한 디테일 하나하나가 연진을 만들었다. 진한 스모키 화장을 하지도, 올백 머리를 하지도 않고 자신의 얼굴과 헤어와 의상으로 그 사람이 됐다. 악의 마음을 읽고 나니 “난 잘못한 게 없어, 동은아”라는 대사도 어렵지 않았다. 이 순간 정말 그렇게 믿었으니까.

“송혜교 선배님과 붙는 신에서 긴장을 많이 했어요. 처음부터 교실에서 서로 기싸움을 하는 신이었어요. 감독님이 일부러 그렇게 설정하신 것 같기도 하고요. 저도 모르게 동은이의 멱살을 잡았는데, 선배님이 다 받아주셨어요. 작품 내내 송혜교 선배님은 ‘너 준비한 거 많잖아. 다 받아줄 테니까 해봐’ 하는 느낌이었어요. 오히려 다른 누구보다 동은이와 함께 있을 때 연기하기가 제일 편했을 정도로요.” 

연진의 악행이 적나라할수록 동은의 복수는 절실해지고, 연진이 꼿꼿할수록 그가 무너질 때 쾌감은 더 커진다. 이 낙차를 만드는 것도 연진의 몫이었다. 복수의 서사는 피해자의 치밀함에 가해자의 뻔뻔함이 더해져야 완성되니까. 연진의 남편 하도영(정성일)이 말했듯, “누가 봐도 이 공간의 주인공은 너”였고, 동은의 꿈은 오직 연진이었던 덕에 동은의 모든 편지는 “연진아”로 시작한다.

“우리 부모님도 저를 ‘연진이’라고 부르세요(웃음). ‘연진아, 된장찌개 끓여놨는데 언제 오니’ 이렇게 문자가 와요. 작품은 끝났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계속 저를 연진이라고 불러주면 좋겠어요.” 

 

나를 알아보지 못하면 좋겠다

그의 부모가 그를 ‘연진이’라고 부르는 건 그의 악행을 옹호해서가 아니라, 그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서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그 인물이 되기 위해 그가 얼마나 몸서리쳤는지는 가까운 사람들만 안다. 임지연은 자신을 ‘타고난 배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예술종합학교 09학번으로 입학할 때부터 알았다. 가진 게 없는 자신은 이제부터 모든 걸 노력으로 채워야 한다는 걸.

“100을 준비하면 현장에서 겨우 50을 보여줄 수 있었어요. 기회도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었고요. 학창 시절부터 배낭 하나 메고 독립영화를 찍으러 다녔고, 그렇게 찍은 필름을 들고 소속사를 찾아다니기도 했어요. 더 어릴 때는 현장에서 많이 혼나기도 해서 매일 저녁 울면서 잠들었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한 번도 연기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데뷔 후 모든 순간이 절실했다. 그를 세상에 알린 작품은 2014년 영화 〈인간중독〉. 작품 속 종가흔은 신비롭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이다. 대령 김진평(송승헌)은 그에게 매료돼 자신의 모든 것을 잃는다. 임지연이 처음 대중에 소개된 건 그런 이미지였다.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인물. 하지만 그는 여기 갇히지 않았다. 이후 〈간신〉 〈럭키〉 〈타짜〉 〈유체이탈자〉 등에 출연했다. ‘그 배우가 그 배우였어?’라는 말을 들으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그 배역이 남기를 바랐다. 이전과 다른 장르라면, 완전히 다른 인물이라면 언제든 도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단편 영화 〈9월이 지나면〉 찍을 때가 생각나요. 인물 이름도 ‘지연’이었어요. 학교 동기들이랑 버스 타고 다니면서 영화를 찍었어요. 〈더 글로리〉가 넷플릭스에 공개되고 1위에 오르면서 제 작품들을 찾아보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신기해요. 이 작품과 그 작품의 배우가 같은 인물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면 제일 기쁘고요.”

그 정도로 그가 맡은 배역들은 겹치지 않는다. 범죄오락영화 〈타짜〉의 영미나, 미스터리 스릴러 〈장미맨션〉의 지나는 어떤가. 그는 작품 속에서 어떤 이미지를 추구하지 않았고, 몸을 사리지도 않았다. 그가 ‘청순의 대명사’이거나 ‘로코의 여왕’이었던 적은 없다. 그는 다만 작품의 인물로 살았고, 그 이름으로 기억됐다. 〈더 글로리〉의 임지연이 온통 연진이로 기억되듯이.

“이번 작품으로 생전 처음 호평과 칭찬을 받으면서 좀 얼떨떨하기도 해요. 이전 작품을 같이했던 분들에게 ‘네 덕분에 예전 작품도 찾아보는 사람이 늘었다. 고맙다’는 연락을 받기도 하고요. 이런 순간이 오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는데, 이번에 행운을 누려보니 알겠어요. 내가 꼭 이 순간만을 위해 연기해오지는 않았다는 걸요. 칭찬과 인기가 기쁘고 행복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저만 아는 성취감이에요. ‘아, 내가 또 한 고개를 넘었구나’ 싶은 성취감이요. 그 마음 덕분에 또 다음 작품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한계를 넘어서

그가 〈더 글로리〉에서 차지한 영광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도전을 위해 용기를 냈고, 그 용기가 부끄럽지 않도록 준비했다. 눈썹의 움직임 하나, 대사의 끝맺음 하나하나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연습하고 조율했다. “알아들었으면 끄덕여” “이 어리기만 한 X아”같이 평범한 대사도 그가 씹고 뜯고 맛보며 생생한 딕션으로 세상에 내놓자 다른 이야기가 됐다. 자신의 연기에 대해선 야박하고, 칭찬보단 자책에 익숙하다는 임지연도 이번에 스스로에게 한 가지 칭찬을 해준다면 “용기를 낸 점을 높이 사고 싶다”고 했다.

“스스로 한계가 없으면 좋겠어요. 작품을 고를 때도 어떤 선을 두지는 않아요. 센 캐릭터만 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요. 다만 ‘나한테 상상은 안 되는데 한번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그 인물을 선택했어요. 배역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았고요. 앞으로도 그런 작품을 하게 될 것 같아요. ‘이런 얼굴이 있었나?’라는 말을 들으면 제일 좋겠고요.”

모든 사람이 왼쪽 얼굴과 오른쪽 얼굴이 다르다. 임지연의 경우는 더 그렇다. 오른쪽 얼굴을 잡았을 때와 왼쪽 얼굴을 잡았을 때의 느낌이 다르다. 한없이 천사 같은 모습도, 끝없는 악마 같은 순간도 자유자재로 변주한다. 그 순간을 믿고, 의심하지 않아서다.

한 번도 반성하지 않고, 때문에 용서를 빌지도 않았던 연진은 결국 교도소라는 학교에 갇혀 다른 재소자들의 체육관에 불려 가 일기예보를 전하며 추락한다. 오래오래 억울해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건 죽는 것보다 더한 형벌이다. 임지연은 그 장면을 찍고 오래 주저앉아 있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연진을 미워하길 바랐지만, 자신마저 그러지는 못했다. 그 모든 순간에 그는 그저 연진이었기 때문이다. 연진은 망했고, 임지연은 흥했다. 자신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새삼 감탄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우리는 계속해서 임지연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누구보다 그 자신이 스스로를 재발견하기 위해 분투할 테니까. 자신의 한계를 넘을 수 있다면 1%의 누수 없이 절실하게 그 사람이 되고자 했던 임지연이 맞은 영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