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아나운서처럼 연습하면 아나운서처럼 될 수 있어요

정연주

26년 차 아나운서. TBS(교통방송) 간판 아나운서 중 한 명으로 오전 5~7시 〈라디오를 켜라 정연주입니다〉를 4년째 진행하고 있다. ‘아침의 목소리’ ‘출근길 동반자’로 불린다. 고위 공직자를 대상으로 공적 말하기 교육에서 특강을 했으며, 한국아나운서대상 아나운서클럽상, 어문기자협회 한국어문상 특별상 등을 수상했다. 말하기의 이론과 실제를 녹인 《말하기의 정석》(가제) 출간을 앞두고 있다. 

택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에 홀린 적이 있다. 프로그램 막간에 들려온 캠페인 방송으로 기억한다. 명료하고 정확한 발음에 확신에 찬 신뢰감 있는 음성. 일행과 대화하다가 멈추고 빨려들듯 듣게 됐다. 말끝에 슬쩍 묻어나는 온기만 아니었다면 인공지능(AI)으로 착각할 정도로 완벽한 말하기에 가까웠다. 당장 캠페인에 동참해야겠다는 마음이 동하게 하는 힘이 있는 음성이었다. 

음성의 주인공은 정연주 교통방송 아나운서. 그는 아침의 목소리다. 새벽녘, 풀잎에 맺힌 이슬이 도르르 굴러가듯 맑고 싱그러운 에너지를 뿜어낸다. 이 상쾌한 음성은 이나영 주연의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도 출연했다. 영화를 연출한 송해성 감독은 삶의 의욕을 잃은 주인공과 대비되는 목소리로 정연주 아나운서를 낙점했다고 한다. 정 아나운서는 새벽과 아침이 만나는 5~7시, 〈라디오를 켜라 정연주입니다〉를 4년째 진행하고 있다. 누군가에겐 이른 출근길이, 밤샘 근무를 한 누군가에겐 늦은 귀갓길이 되는 이 고단한 경계의 시간에 그는 청취자들에게 하루를 버텨낼 비타민을 전파한다. 목소리가, 더 나아가 말이 가진 힘이다. 

아나운서는 공적 말하기에 최적화된 직업군이다. 뉴스 보도든 진행이든 강연이든 공적인 공간에서 공적인 주제로 말을 건넨다. ‘탄탄한 발성을 바탕으로, 정확한 발음을 통해, 말할 내용을 상대방에게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사람’, 아나운서에 대한 정의다. 26년 차 정연주 아나운서는 아나운서를 과대포장된 직업이자 동시에 과소평가된 직업이라고 말한다. 직업적인 인지도나 각광도로 본다면 과대포장된 직업이지만, 노력에 비해서는 과소평가된 직업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 ‘노력’에 현미경을 대어본다. 아나운서의 첫발을 떼게 하는 건 ‘목소리’지만,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는 건 ‘내용’이다. 목소리가 아무리 좋아도 그 목소리에 담아내는 내용이 부실하면 살아남기 힘들다. 정연주 아나운서가 음성학, 심리학 관련 두툼한 전공서적을 곁에 두고 공부하는 이유다. “외국어 공부하듯 우리말을 연구한다”는 그를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서 만났다. 

 

청중 중에는 아군도 있고 적군도 있어요.

저는 아군과 우군만 바라보고 말하라고 합니다.

회의든 토론이든 강연이든 눈을 반짝이며 내 말을 경청해주는

한 사람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에요.

그 사람과 에너지를 교감하면서 말하는 거예요.

조는 사람, 팔짱 끼고 삐딱하게 앉은 사람을 보면서 말하면 에너지를 빼앗겨요.

택시에서 우연히 정 아나운서의 3분 캠페인 라디오 방송을 듣고 탄복했습니다. 그렇게 말을 잘하는 능력은 선천적인 건가요, 후천적인 건가요.
“100% 후천적이라고 봐요. 저는 스물두 살에 아나운서가 됐는데, 그때의 정연주와 지금의 정연주는 아주 다르거든요. 당시엔 목소리가 또랑또랑하고 말하기에 거침없다는 평가를 받긴 했지만, 말을 아주 잘한다고 보긴 어려웠을 거예요. 방송사에 들어와서 부단히 깨지고 구르면서 말하기를 연습해왔어요. 물론 저 역시 공적인 말하기 상황이 많이 두려웠어요. ‘실수하면 어쩌지? 나쁜 평가를 받으면 어쩌지?’ 싶었고요. 이런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신뢰감 있는 목소리로 거듭나기 위해 26년 동안 매일 담금질하고 벼려왔어요.”

누구나 훈련과 노력을 통해 말을 잘할 수 있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아나운서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면요. 아나운서로서 받은 교육은 말의 기초체력을 키우는 과정이었어요. 전달력을 높이기 위한 기본기를 갖추는 거죠. 흔들리는 버스에서 창밖을 응시하는 승객에게도, 마트에서 일하는 직원에게도 내가 전하는 뉴스가 잘 전달되려면 기초체력을 다져야 해요. 그 기초체력은 준언어적 요소와 비언어적 요소를 살피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준언어적 요소와 비언어적 요소라. 국어 교과서에서나 봄 직한 개념이에요.
“준언어적 요소는 발성, 호흡, 발음, 말의 빠르기 등이고, 비언어적 요소는 자세, 눈빛, 몸짓, 공간 등을 말해요. 똑같은 내용이라도 이런 요소들을 훈련하면 전달력이 높아지죠.”

그야말로 말하기의 정석이군요. 
“우리는 글쓰기는 공부하면서 말하기에 대해서는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을 크게 갖지 않아요. 발성은 무엇이며, 발음은 신체의 어떤 기관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나오는지를 알면, 다시 말해 목소리를 내는 과정을 알게 되면 발성이 훨씬 좋아질 수 있어요. 우리 목소리의 주원료는 호흡을 통한 공기예요. 호흡을 제대로 하고 공명을 잘 이뤄내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목소리를 낼 수 있거든요.”

그런 것도 아나운서 훈련과정에서 배우나요?
“기본적인 것은 배우지만 저의 경우 심층적인 공부를 하게 된 계기가 있어요. 원래 노래방에서 크라잉넛의 ‘말 달리자’, 진주의 ‘난 괜찮아’, 자자의 ‘버스 안에서’ 같은 곡을 내지르며 불러도 다음 날 방송에 지장이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말만 많이 해도 다음 날 방송이 힘든 거예요. 목에 이물감이 느껴져서 자꾸만 ‘흠, 흠’ 하고 가다듬게 되고, 아프고 갈라지는 상황이 많아지고요. ‘연축성 발성장애’ 진단을 받았어요. 내 목이 왜 이렇게 됐을까, 어떻게 해야 나아질까를 알기 위해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목과 관련된 책을 주문해서 읽다가 《호흡과 발성》이라는 의과대학 전공서적까지 읽게 됐어요.”

지금도 말을 잘하는데, 말하기에 대해 공부할 게 더 남아 있다니요.
“어휴, 그럼요. 제대로 된 말하기를 위해서는 공부가 일상이 되어야 해요. 방송일을 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후 저는 매일 신문을 봅니다. 인상적인 기사가 있으면 스크랩하고, 제 생각을 메모해요. 종이신문에서 앱 신문으로 매체는 바뀌었지만요. 또 좋은 글을 만나면 처음부터 끝까지 필사하면서 읽고 쓰고 생각하기의 힘을 기릅니다. 또 하나, 소리 내어 읽는 연습도 꾸준히 해요. 시와 산문, 소설, 자기계발서, 사내 발표자료 등 장르를 가리지 않아요.”

아나운서에게는 스크립트가 있어서 자신의 콘텐츠를 녹일 여지가 많지 않을 텐데요, 그럼에도 공부가 그토록 중요한가요?
“그럼요. 만약 ‘장관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됐다’는 내용을 보도한다고 해보죠. 글자를 읽어내는 건 큰 차이가 없어요. 하지만 머릿속으로 탄핵이 어떤 의미가 있고, 왜 일어났는지 등의 배경지식을 완전히 파악하고 읽는 것과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읽는 것은 천지 차이예요. 그걸 청취자들은 다 압니다.”

그럼 ‘말을 잘한다’는 건 어떤 차원인가요. 우리는 흔히 발언권을 주도하면서 청산유수처럼 쏟아내는 사람을 일컬어 ‘저 사람 참 말 잘해’라고 합니다만.
“신언서판, 즉 말과 글과 행동이 일치된 사람이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공적인 말하기에서 말을 잘한다는 건 자신이 가진 좋은 말거리, 즉 내용을 상대방이 잘 알아듣게 전달하는 능력이죠. 거기에 더해 행동과 마음의 변화까지 이끌어낼 수 있다면 가장 좋고요. 말과 글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이에요. 그렇게 보자면 말을 잘하려면 결국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래서 하면 할수록 말하기가 어려워요.”

우리는 종종 말도 잘하면서 글까지 잘 쓰는 사람은 드물다고 하는데요.
“제 생각은 달라요. 예전에는 이 둘이 별개라고 봤지만, 지금은 다른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말 잘하는 사람이 글도 잘 써요. 반대로 글 잘 쓰는 사람이 말을 잘하고요. 내가 가진 생각을 잘 풀어낼 수 있는 수단이 말이냐 글이냐의 차이죠. 단 말이라는 뭉치와 수단으로서 스피치는 구분해야 하는 개념이에요. 탄탄한 발성과 성량으로 말하기 스킬을 키우는 스피치는 훈련을 하면 누구나 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뭉치로 말을 잘 만들어내는 건 다른 차원이에요.” 

눌변가도 훈련으로 말을 잘할 수 있다?
“네. 사람에 따라, 어떤 선생을 만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누구나 스피치 훈련을 하면 발성 등은 좋아져요. 그런데 굳이 안 바꿔도 된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말뭉치만 아주 훌륭하다면 눌변 자체가 문제는 아니거든요. 말하기의 핵심은 말뭉치이지 스킬이 아니에요.”

의외예요. 메러비안 법칙에 따르면 말하기에서 내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7%밖에 안 되는데.
“메러비안 법칙을 다시 볼 필요가 있어요. 이 법칙은 결과만 차용해서 남용되는 이론 중 하나입니다. 말하기에서 내용(언어)이 차지하는 비중은 7%에 불과하고 표정(시각)은 55%, 목소리(청각)가 38%라는 건 친밀한 관계의 사적인 대화를 기반으로 한 데이터예요. 이걸 공적인 대화로 확장하면 안 돼요. 이 법칙이 시사하는 바는 있지만 7 대 38 대 55가 무슨 법칙인 것처럼 모든 말하기에 적용하는 건 무리가 있어요. 언어적 요소 외에 비언어적 요소도 중요하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정연주 아나운서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