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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판타스틱 베이비의 시작 늦여름, 귤의 맛
입력 : 2021.09.01

아이는 귤을 까는 것을 좋아한다. 처음 옹이를 내기 위해 힘껏 힘을 주어야 하는 바나나나 손가락 마디마디와 손톱 사이사이가 모두 검붉게 물드는 포도에 비해 귤은 부드럽고 말랑하며 대부분 본인의 의지대로 순순히 까진다. 처음에는 껍질을 까는 데만 몰두하던 아이는 이제는 속살도 제법 잘 먹는다. 하나씩 떼어 먹을 때도 있고 전체를 들고 이로 베어 먹을 때도 있다. 주홍빛 즙은 입안 뿐 아니라 입 바깥과 아이가 앉은 의자와 매트를 물들이지만 개월 수가 쌓이면서 그 범위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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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무렵이던 지난 겨울부터 귤을 마음에 들어 한 아이는 봄과 여름을 지나 20개월에 접어든 가을의 초입에도 한결같이 귤을 애정한다. 하지만 귤의 가격이란 그렇게 한결같지 않아서 여름과 가을의 하우스 귤은 한 바구니에 만 원정도 한다. 어떨 때는 한 알에 천 원이 넘는 값을 받을 때도 있다. 그래도 어쩐지 과일 가게에 가면 아이가 좋아하는 귤을 외면하기가 어렵다. 물론 제철 과일인 복숭아도 수박도 모두 곧잘 먹었지만, 복숭아나 수박은 아이에게 껍질을 까는 기쁨을 더해주지는 못한다. (친정집에 사시사철 사과가 있었던 이유는, 냉동사과가 잘나와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해서였다는 걸 나는 아이를 낳고야 알았다)

나는 평생 귤을 씻어 먹어본 일이 없지만 아이에게 줄 때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흐르는 물에 한 번 헹구어 건넨다. 그러면 아이는 상기된 얼굴로 귤을 받아들고는 여기 저기를 살피다가 옆구리 정도에 흠집을 내어 까기 시작한다. 어쩔 땐 중간에 뚝 끊기고 어쩔 때는 끝까지 제법 긴 타래가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두근거리는 순간은 그 다음이다. 겨우겨우 하나의 귤을 다 깐 아이가 절반을 과감하게 잘라서 옴마 꺼하고 내민다. 아이는 내가 다른 방에 있거나 주방에 있으면 그 절반을 들고 나를 찾는다. 국물을 뚝뚝 흘려 자신이 지나온 길에 궤적을 내면서

아이가 귤물이 든 손으로 귤을 들고 오면, 나는 수전을 끄고 고무장갑을 벗고,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접으며 반가이 아이를 맞는다. 그리고 두 손으로 내 몫의 조생귤을 받는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도 잊지 않는다. 아이는 만족스럽게 자신이 귤을 까던 위치로 돌아가 남은 귤을 먹는다. 중간 중간 힘 조절을 잘못해 손가락 모양으로 문드러지고 물컹해진 귤을 한 입 베어문다. 이 맛을 나는 평생기억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러지 못할 것이다. 사실 귤 값이 예전같지 않아 그냥 아이가 하나를 다 먹었으면 싶은 마음도 있다. 하지만 정성껏 깐 귤을 절반 툭 갈라 옴마 꼬~”라고 부르며 나를 찾는 순간은 분명 조생귤의 비싼 값보다 더 호사스런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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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아이의 아빠도 한 번도 절반을 갈라 엄마나 아빠에게 주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할머니나 할아버지와 있을 때 맛있는 걸 먹을 때는 할머니 할아버지 먼저 드리는 거'라고 권한 적은 있다. 그렇대도 아이의 조부모는 양가 모두 늘 가장 가운뎃 토막의 가장 맛난 부분을 아이 입에 먼저 넣어 주었다. 그런데 아이는 어디에서 배워 자신의 귤을, 절반을 나에게 나누어 주는 걸까. 나는 내 새끼가 이렇게 갸륵했던, 이 경이를 깊이 기억하기로 다짐한다.

물론 아이와 함께 한 순간 모두가 감격스럽고 기특한 것은 아니다. 아이는 냉동실에 있는 죠스모양의 아이스크림을 먹겠다고 드러눕기도 하고(아이 아빠는 죠스의 흔적을 더 잘 숨겨야 한다), 지워지지 않는 곳에 지울 수 없는 펜으로 수없이 많은 동그라미를 그리기도 한다. 찰랑거리는 우유컵을 굳이 들고 굳이 매트위로 올라가 굳이 매트의 접지 구석구석에 쏟아 매트 전체를 거대한 요거트 덩어리처럼 만든 적도 있다. 그런 순간들이 쌓이면 하루는 정신없이 지나갔는데 남은 건 소독제의 알싸한 냄새와 물티슈의 잔해들 뿐 하루종일 한 게 없는 것처럼 혼곤하다

그래서 나는 노후를 대비해 적금을 붓듯이 아이의 빛나는 순간을 적어 저금해두려고 한다. 나중에 아이가 귤을 자기 입에 다 털어 넣더라도, 식탁위에 귤이 있든 말든 밖에서 돌아와 자기 방으로 직행해 문을 쾅 닫고 들어가 걸어 잠그더라도 이런 순간들이 우리 안에 쌓여있음을 기억하려고. 일상의 분주함이 우리의 빛나는 찰나를 분진으로 만들게 두지 않으려고. ‘판타스틱 베이비의 시작이다.   

 

유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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