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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이 되고 싶은 노루 탐험대원 '사슴'의 언어탐험
입력 : 2021.08.03

내 블로그 닉네임은 노루. 고등학교 3학년 때, 그동안의 흑역사가 담긴 네이버 블로그를 한 번 정리하면서, 블로그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닉네임도 바꾸겠다고 결심했다. 가장 좋아하는 동물인 사슴으로 바꾸고 싶었는데, 이미 사용하고 있는 닉네임이라며 거부당했다.

그래서 사슴이 안 되면 사슴 친구로 하면 되지라는 단순한 이유로, ‘노루라는 이름을 짓게 되었다. 프로필 소개 글에는 사슴이 되고 싶은 노루라고 적었는데, 이것도 역시 사슴이란 이름을 사용하지 못한 게 아쉽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노루…… 코를 통해 공기가 부드럽게 흘러나오다가 혀에서 굴려지는 발음도 좋고, 왠지 사슴보다 유순하고 순박한 느낌이 있어 좋았다.

이후 새내기 대학생이 되어 학교 포털 사이트 계정을 만들 때도 ‘noru****’라는 아이디를 사용했다. 블로그 이름인 노루**학번이라는 정보를 섞었다. 이때도 역시 사슴에서 따 오고 싶었지만, ‘deer’는 왼손으로만 네 번 키보드를 쳐야 해서 불편했고, 발음을 그대로 적는 ‘sasum’은 너무 어색해 보였다.

어쨌든 그러고 나니, ‘노루라는 별 뜻 없이 지은 별명은 어느새 나의 아이덴티티가 되었다. ‘노루라는 단어 자체에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노루를 두 번이나 사용하고 나니 왠지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이후 구글 계정의 새 이름, 새로 가입하는 카페의 닉네임, 필명까지도 모두 노루가 되었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사슴이 되고 싶은노루다. 노루는 왠지 사슴보다 순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있다는 점에서는 좋지만, 나쁘게 말하면 좀 멍청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슴은 대표성을 갖는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사슴의 백과사전적 정의는 사슴과에 속하는 동물의 총칭이다. 그러니, 사슴은 대충 뿔이 있고 검고 큰 눈망울을 가졌고 다리가 얄쌍하고 발굽이 있고 털은 갈색 계열인 네발 초식동물을 대표하는 동물인 것이다. 말하자면 노루, 고라니, 순록 따위의 대표 얼굴 격이랄까? (하지만 내게 있어 순록은 왠지 사슴의 한 종류라기보다는크리스마스 시즌에만 반짝 생각나는, 산타클로스 전용의 불쌍한 수레 짐승처럼 느껴지니 여기서는 논외로 하겠다)

잠시 즐거운 언어학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자. 전공 수업에서 범주화 이론이란 것을 배운 적이 있다. ‘범주화, 인간이 경험하는 사물, 개념, 현상을 분류하거나 한 데 묶어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오이, 방울양배추, 치커리, 사과, 오렌지, 레몬]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오이, 방울양배추, 치커리][사과, 오렌지, 레몬]으로 나누고 싶지 않은가? 채소와 과일을 기준으로 한 분류다. 이런 식으로, 다양성 속에서 유사성을 파악하는 능력을 사용해 어떤 개념들을 분류하거나 묶어서 이해하려는 것이 범주화다.

그런데 범주 안에서도 위계가 존재한다. 치커리는 분명 채소지만, 왠지 내게 있어 오이보다는 덜 채소같다. 말하자면 오이와 치커리 중 더 채소다운것은 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레몬도 마찬가지다. 레몬보다는 사과가 왠지 더 과일답다’. , 범주 안에서도 가장 전형적이고 원형적인 것, 그리고 가장 비전형적이고 원형에서 먼 것으로 위계가 나뉘는 것이다.

다시 노루 얘기로 돌아오자. 나는 사슴이라는 범주를 하나 마음속에 그렸다. 그리고 그 범주에 속한 사슴, 노루, 고라니를 차례로 떠올렸다. ‘사슴과 동물의 총칭사슴이야말로 이 범주에서 가장 전형적이고 원형적인 개념이다.

내게 있어 사슴에서 가장 멀고 비전형적인 예는 고라니다. 사슴과 고라니 사이의 중간 어딘가에 노루가 있다. 다음의 사진과 설명을 참고하면, 이런 생각이 순전히 터무니없는 분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우선, 사슴은 갈색 털에 흰 반점이 있고, 수사슴에게는 가지가 많은 뿔이 난다.

노루는 사슴과 아주 비슷하게 생겼지만 몸집이 더 작고, 털에 흰 반점이 없다. 수컷의 뿔도 사슴보다 작고, 특히 꼬리는 너무 작아서 거의 안 보일 정도라고 한다. 고라니는 셋 중에서 가장 몸집이 작고, 암수 모두 뿔이 없다. 대신 암수 모두 입 밖으로 돌출된 큰 송곳니가 있다. 그래서인지 왠지 더 야생적이고, 가장 비전형적으로 보인다.

 

그림.png

 

사슴과라는 범주의 중간 정도에 있는 노루는 현재의 나를 의미한다. 여기서 현재의 나2021년 지금의 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매분 매초 과거로 사라지고 있는 순간들과, 매분 매초 현재로 가까워지고 있는 미시적인 근미래의 순간들, 그 사이 어딘가에 항상 존재하고 있는 나이다. 그러니 나는 2021년 지금이든, 2022년이든, 2099년이든 언제나 노루일 것이다.

사슴과 범주의 원형인 사슴은 이상향을 의미한다. 되고 싶은 나의 모습 중 가장 멋있고 가장 닮고 싶은 나. 지금까지와는 달리, ‘노루라는 필명 대신 사슴이라는 필명을 언어탐험대에서 사용하는 이유다. 이상향이란 절대로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바를 모르지는 않는다. 그래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언어의 영역에서만큼은, 내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싶었다. 그 바람이 사슴이라는 필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편, 범주의 외곽에 있는 고라니는 외형적으로 가장 구별되는 생김새를 가졌다. 사나워 보이는 송곳니가 왠지 보는 사람을 움츠러들게 만든다. 그리고 고함을 지르는 듯한 잘 알려진 울음소리는 야생적이다. 때문에 고라니는 내가 가장 외면하고 싶은 내 밑바닥의 모습, 가장 어두운 기억들과 단점만 모은 나를 의미한다.

현재의 나인 노루는 항상 사슴과 고라니라는 가능성을 모두 품고 있는 존재로 둘 중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동시에 둘 중 무엇도 될 수 없기도 하다. 이상향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고, 가장 절망적인 치부와 허물도 존재의 전부는 아니니까. 때문에 노루는 어느 순간에는 사슴으로, 어느 순간에는 고라니로 보일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언제나 노루로만 존재할 것이다.

과거의 경험과 과오, 미래에 꿈꾸는 모습을 그러모아 만들어진, 완벽하지 못한 인간 존재로서의 내 모습. 그러므로 사슴, 노루, 고라니는 과거, 현재, 미래의 내 삶과 세계, 나의 모든 면을 표현하는 범주이다.

여러분의 이상향은 무엇인가? 여러분은 스스로 어떤 사람이기를 바라는가? 범주를 초월해 도달하고 싶은 그 이상향의 모습을 한 단어에 녹여내 보면 어떨까? 그 단어를 지향하다 보면, 어느 순간 사슴이 되고 싶은 노루가 정말 사슴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슴(필명) 고려대학교 언어학과 19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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