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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 그가 있었기에... 김현식 下 <비 오는 날의 수채화>
입력 : 2021.03.09

김현식의 노래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또 하나의 노래가 권인하, 강인원과 함께 부른 <비 오는 날의 수채화>이다. 1989년에 나온 동명 영화의 주제가이다.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에 사운드트랙이 발매되면서 나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노래를 좋아해 영화를 보긴 했는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여름방학에 한국에 왔다 이 노래를 처음 듣고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OST를 카세트테이프로 사 가지고 가서 듣고 또 들었다. 아직도 이 노래를 들으면 서울의 장마철과 내가 대학을 다닌 텍사스의 여름이 생각난다.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도 서울에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가 이 노래를 매일같이 듣던 텍사스는 여름이 1년의 2/3는 족히 차지할 정도로 무덥고 습해 거의 매일 소나기가 온다. 말이 소나기지 한 10〜20분 전기가 나갔다 들어왔다 하며 뇌성벽력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진다.

요란하게 비가 오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뜨거운 태양이 다시금 머리를 내밀면 여태 내린 비가 증발해 올라가며 다시금 찜통 날씨가 된다. 내가 살던 휴스턴 근교는 평지밖에 없어서 그 10〜20분 동안 여기저기 물이 넘치기도 한다.  

노래 제목까지 비 오는 날이니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서울의 장맛비와 텍사스의 소나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끈끈한 여름날 옷과 신발을 흠뻑 적시던 비의 기억이 나를 미소 짓게 만드는 건 그 기억 속에 박혀 있는 젊은 날에 대한 그리움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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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권인하가 TV조선 예능 《신청곡을 불러드립니다. 사랑의 콜센타》에 특별 출연해 '비 오는 날의 수채화'를 열창했다. ⓒTV조선

이 노래에서 화자는 ‘그대 숨소리 느껴지면’ 그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붓 하나를 들고나와 그림을 그린다. 나에게도 그림 그리는 재주가 있다면 이 노래를 처음 듣던 그 날의 장맛비나 텍사스의 소나기를 그려보고 싶다.

노래 처음 부분은 강인원, 권인하, 김현식이 각각 몇 소절씩 나눠 부른다.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경쾌한 리듬을 타고 비 오는 날의 하늘처럼 흐르는 단조의 멜로디를 삼인삼색의 목소리가 나눠 부르며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낸다.

카페는 초콜릿색으로, 가로등 켜진 거리는 보라색으로 칠한다. 이 노래의 첫머리 ‘거리에 투명하게 색칠을 하지’를 들을 때마다 ‘맞아, 그래서 내가 수채화를 좋아해’라고 생각한다. 수채화 속 세상은 밑그림조차 고스란히 드러날 정도로 투명한 세상이다.

후반부 갑자기 노래가 단조에서 장조로 바뀌며 셋의 화음이 들려온다. 마치 비온 뒤 맑게 갠 하늘처럼. ‘세상 사람 모두 다’ 행복한 ‘도화지 속에 그려진 풍경’처럼.

권인하는 요즘도 이 노래를 종종 부른다. 얼마 전 《신청곡을 불러드립니다. 사랑의 콜센타》에서도 불렀다. 환갑이 넘은 나이임에도 공기를 가르며 올라가는 고음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음악이 흐르는 그 카페에’ 대목을 부를 때 김현식의 거친 목소리가 그리웠다. 노래를 부른 후 권인하도 그 목소리가 그리웠는지 ‘현식이 형’ 이야기를 잠깐 했다. 

가수 권인하가 TV조선 예능 《신청곡을 불러드립니다. 사랑의 콜센타》에 특별 출연해 '비 오는 날의 수채화'를 열창했다.

 

김현식 노래 다시 부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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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의 1집 앨범 속 자작곡 <사랑했어요>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3집 속 <비처럼 음악처럼>은 <내 사랑 내 곁에>와 <사랑했어요> 사이의 목소리이다. 고음에서 거친 소리가 잠깐씩 들린다. 이런 걸 보면 김현식의 후기 목소리는 몸의 컨디션의 영향이 컸지만, 스스로도 매끈한 목소리보다는 다소 거친 하드로커의 목소리를 지양했나 보다.

<내 사랑 내 곁에>를 <사랑했어요>를 부를 때 같은 매끈한 목소리로 불렀으면 과연 똑같은 감동이 있었을까 생각한다. 반대로 <사랑했어요>를 <내 사랑 내 곁에>의 목소리로 불렀다면 그것도 이렇게 애절하게 울려오지 않았을 것 같다.

<비처럼 음악처럼>은 너무 예쁘거나 너무 갈라지는 소리가 아닌 딱 적당하게 거친 소리로 해서 제맛이 난다.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는 몽환적인 풍경은 달콤한 예전의 목소리가, ‘당신’이 떠나가던 날의 아픈 기억과 하루 종일 비만 맞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아직도 그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은 거친 소리가 살짝 섞이며 제맛을 낸다. 목소리가 매끄럽게 나오건 갈라져 나오건 그걸 가지고 자신만의 음악을 만드는 것은 김현식의 재주이다.

<내 사랑 내 곁에>는 몇몇 노래 잘하는 젊은 가수들이 부르는 것을 들어봤다. 목소리가 너무 깨끗해서 감동이 없었다. 목소리는 김현식과 흡사한데 기분은 나지 않는 가수도 있다. 한영애가 부른 <내 사랑 내 곁에>는 좋아한다. 한영애도 모든 음악을 한영애화 하는 가수다. 자기식대로 불러서 좋다. 그냥 김현식에 대해 매우 까다로운 나만의 입맛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주관적인 평이다.

1990년대 초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이 나와 <내 사랑 내 곁에>를 바이올린으로 연주한 적이 있다. 의외로 좋았다. 이것도 주관적 평가다. 나에게는 편파적으로 바이올린 소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JTBC 《패티김 쇼》에 김태우와 바비킴이 함께 출연해 부른 <비처럼 음악처럼>. ⓒJTBC

<비처럼 음악처럼>은 패티김이 은퇴하기 전에 진행했던 JTBC의 《패티김 쇼》에 김태우와 바비킴이 함께 출연해 부른 것을 좋아한다. 어정쩡하게 김현식의 개성을 모방하지 않고 자신들의 듀엣 곡으로 만들어 불러 좋았다. 임창정이 부르는 영상도 본 적이 있다. 노래를 끝까지 부르지는 않았지만, 들은 부분까지는 아주 좋았다. 노래방 기계 반주로 부르면서 키를 반음씩 네 번이나 올렸는데 올릴 때마다 재빨리 음정을 잡는 것도 놀라웠다.

이세준, 김경호, 홍경민이 《불후의 명곡》 강인원 편에 출연해 부른 <비 오는 날의 수채화>는 종종 찾아 듣는다. 김현식의 노래들이 홍경민에게 대체로 잘 어울리지만, 홍경민이 부르는 ‘음악이 흐르는 카페에’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김현식의 목소리에 대한 나의 갈증을 풀어줄 정도로 좋다.

편곡도 다시 했는데 재즈의 느낌도 있고, 영국 가수 스팅이 로얄 필하모닉 콘서트 오케스트라와 자신의 히트곡들을 녹음한 앨범처럼 도시적인 세련미도 오리지널보다 강하다. 노래 끝날 때 ‘워우워’ 하던 스캣 부분은 오리지널보다 훨씬 더 강렬해서 노래가 끝날 때 관객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바흐의 음악은 바로크 악기로 그 시대의 소리를 내는 연주도 좋고, 현대 악기로 현대적인 기분으로 연주해도 좋다. 그만큼 바흐의 곡들이 넓고 깊게 모든 시대를 포용하기 때문이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를 들으며 같은 생각을 했다. 시대가 지나도, 편곡 스타일이 달라져도 그날의 감동, 그날의 비 냄새가 다시 살아온다. 위대한 곡이다.

이세준이 ‘빗방울 떨어지는…’ 하고 노래를 시작할 때 강인원이 ‘후’ 하고 짧게 한숨을 쉬는 모습이 비친다. 그에게도 떠나간 친구, 돌아오지 않는 지난날, 그날의 녹음 스튜디오 냄새가 그대로 살아온 것 같았다.

 

김현식 그가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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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김현식. 그가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도 행복하다.

내가 미국으로 떠났던 1985년 이전 젊은이들은 가요를 잘 듣지 않았다. 우리 가요의 주 대상이 중장년층이었다. 하지만 이듬해 여름 처음으로 한국에 다시 오자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이 대거 지상으로 진출해 젊은 층을 사로잡고 있었다.

친구가 소개팅을 시켜주며 들국화의 콘서트 입장권을 줘서 처음 만난 아가씨와 그 콘서트에 갔던 기억도 있다. 언더그라운드의 신선함이 세상에 기지개를 펴고 우리 가요계를 이끄는 중심에 김현식이 있었다. 그룹 봄,여름,가을,겨울과 신촌블루스의 멤버로 또한 솔로로 활동하며 지하세계를 지상으로 들어 올렸다.

1980년대 이전에 이미 지상으로 진출했던 가수들이 있었지만, 언더그라운드 가수의 지상 진출이 하나의 신드롬이 되는 1980년대 중후반부터 그들의 활약도 더욱 눈에 띄었다. 김현식이란 걸출한 예술가가 없었어도 가능했을까 감히 질문해 본다.

한편으로 왜 그 아까운 재능, 그 젊은 인생을 그렇게 빨리 소진했을까 안타까움도 든다. 권인하가 어느 인터뷰에서 ‘김현식이 술을 끊어 보려 애를 쓰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포기하고 파국으로 치닫는데 옆에서 뻔히 보면서도 말릴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흔히 예술가들은 괴팍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공연예술 분야에서 일하다 보니 ‘괴팍하긴 진짜 괴팍하구나’라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가슴 시리게 여린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 많다. 김현식을 일찍 떠나보낸 아쉬움을 그냥 그렇게 달래본다. 그의 여린 감성이 견뎌내기에 이 세상이 너무 버거웠다고.

그래서 또 돈 맥클레인의 노래를 듣는다.

“This world was never meant for one as beautiful as you.”

그러나 그가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도 행복하다.

이철재 미국 변호사, 《뉴욕 오디세이》 《나도 바흐를 즐길 수 있을까》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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