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닷컴

today's pick

magazine 인기기사

topp 인기기사

daily 인기기사

임신 8개월, 유부남인 줄 모르고...가수 현미와 김추자를 발굴한 그 작곡가 이봉조上 <무인도>
입력 : 2021.02.10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갈 때 텍사스주로 간 것은 그곳에 나의 작은외삼촌이 살고 계셨기 때문이다. 작은외삼촌과 외숙모는 1950년대에 대학을 다니러 미국으로 갔다가 졸업하고도 그냥 정착해 살고 계셨다. 외삼촌과 외숙모는 내가 주말에 쉬러 가면 어디를 가도 나를 늘 달고 다녀서 사람들이 내가 보이지 않으면 “조카는 어디 갔어요?” 하고 물을 정도였다.

일요일마다 들르던 한국 식료품점에도 같이 갔다. 1980년대에는 이미 미국 내 대도시에는 한국 식당과 식료품점들이 깔려 있었다. 헌데 이 한국 식료품점에 1980년대 초반부터 새로운 상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국의 방송사들이 자신들의 드라마, 쇼, 뉴스 등을 비디오테이프에 담아 미국으로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테이프들은 다시 전국의 한국 식료품점으로 퍼져나갔고, 그들은 가게에 비디오 기계를 여러 대 놓고 그 테이프들을 복사해 손님들에게 대여했다. 처음에는 테이프 하나에 1달러 정도 했다.

commonY3XZYGVD.jpg
80년대 초반 미국의 한국식료품점에서 한국 드라마나 쇼, 뉴스가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대여하기 시작했다. 당시 테이프 하나 대여료는 1달러 정도였다.

외삼촌과 외숙모가 미국으로 건너온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 미국 내에서 한국은커녕 동양 문화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2019년 현재 텍사스주 휴스턴 주재 한국 총영사관 집계로 휴스턴 지역 한인 수가 17만 명이 넘는다고 하지만, 외삼촌과 외숙모가 휴스턴으로 이주한 1962년에는 그들이 휴스턴의 유일한 한국인 부부였다.

그 당시 휴스턴에는 한국인이라고는 전쟁 때 미군과 결혼해 그곳으로 이주한 미시즈 스미스라는 한국인 여성이 딱 한 명 살고 있을 뿐이었다. 나의 아버지도 휴스턴에서 5년간 공부하셨지만 그때는 어머니와 결혼 전이었고 외삼촌과 외숙모가 텍사스주의 다른 도시인 오스틴이라는 곳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는 휴스턴의 유일한 유학생이었기에 미시즈 스미스와 남편 미스터 스미스도 잘 알았지만, 외삼촌과 외숙모가 휴스턴으로 이주하기 전에 한국으로 돌아와 서로 엇갈렸다.

 

실향민들의 유일한 위로, 한국 드라마  

commonV0N6QGAX.jpg
이미숙과 유인촌 주연의 드라마 <장희빈>.

한국 식료품점이나 식당 하나 변변한 것이 없던 이 시절 미국에 살던 한국인들 중에는 북한에서 온 실향민이 유난히 많았다. 남한도 어차피 타향인지라 일찌감치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그들은 자동차로 두세 시간 가는 거리는 이웃으로 생각하며 몇 되지 않는 한인들끼리 모여 미국에 있는 재료로 한국 음식 비슷하게 만들어 먹는 레서피를 공유하고 이북 말씨를 계속 사용하며 그들만의 한인 문화를 만들며 살았다.

한국은 10년 가까이 한 번도 방문해 보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 외삼촌 친구 중 한 분은 국제전화 값이 너무 비싸 한국에 전화해서 어머니가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만 듣고 끊었다는 이야기를 나에게 무용담처럼 해준 적도 있다.

어린 나이에 고향 등지고 피란 내려와 새로 정착한 곳에 정 붙일 틈도 없이 미국으로 건너온 그들에게 한국에서 날아오기 시작한 비디오테이프들은 가뭄의 단비였다.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잊고 살던 고국에 대한 향수를 깨웠다.

외삼촌과 외숙모도 1981년 이미숙과 유인촌 주연의 <장희빈>부터 한국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외삼촌 댁에 비디오 플레이어가 없어 근처 친하게 지내던 한인 부부 집에서 늘 함께 시청하곤 했는데 그 부부가 싸움을 크게 하고 한 달 이상 냉전 중일 때 드라마가 너무 궁금해 비디오 플레이어를 사가지고 보기 시작했다.

내가 미국으로 이사했을 때는 외삼촌, 외숙모 두 분이 거의 중독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일요일에 한국 식료품점에 가면 음식물 사러 간 건지 비디오테이프 빌리러 간 건지 구분이 힘들었다. 나는 대학 시절 차가 없었고 학교 동네에 한국 식품점이 없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한국 식품점을 갈 수 없었다. 외삼촌 댁에 가야 한 번씩 한국 비디오를 보고 왔다.

학년이 올라가 공부가 바빠지면서 외삼촌 댁에 한 달에 한 번 정도도 가기 힘들었다. 그래도 늘 가면 외숙모의 맛깔난 이북식 김치와 내가 온다고 신경 써서 만든 별식을 먹고 나를 위해 버리지 않고 모아 놓은 한국 신문의 미주판을 통해 한 달도 지난 한국 소식을 읽고, 저녁식사 후에는 함께 앉아 한국 드라마를 봤다.

때로 일제 강점기나 6·25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볼 때면 외삼촌과 외숙모는 비디오를 아예 멈춰 놓고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자식들에게 해 봤자 이해하지 못할 평안도에서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나에게 듬뿍 해줬다. 

한번 오랜만에 외삼촌 댁에 갔더니 그날은 전에 없이 《가요무대》를 빌려다 놓으셨다. 그 비디오테이프에는 ‘떠날 때는 말없이- 이봉조 특집’이라고 쓰여 있었다. <떠날 때는 말없이>는 이봉조의 대표곡 중 하나이다. 비디오를 틀고 김동건 아나운서의 “전국에 계신 시청자 여러분, 해외에 계신 동포 여러분…” 하는 인사말이 끝나고 곧이어 이봉조가 얼마 전 별세했고 이번 《가요무대》는 이봉조 추모특집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봉조는 외삼촌과 외숙모의 세대였지만 1960-70년대 한국 문화를 거의 접하지 못하고 산 두 분에게는 낯선 인물이었다. 오히려 어린 내가 “앗, 이봉조 씨가?” 하며 깜짝 놀랐다.

 

가수 현미와 김추자를 발굴한 그 작곡가

commonW8CLJK7E.jpg
가수 현미와 이봉조의 이야기를 다룬 TV조선 프로그램 '인생다큐 마이웨이'. ⓒTV조선 화면캡처

1970년대 MBC의 ‘여대영과 그의 악단’, KBS의 ‘김강섭과 그의 악단’과 더불어 ‘아무개와 그의 악단’의 트로이카를 이뤘던 TBC의 ’이봉조와 그의 악단‘의 이봉조는 TBC 간판 쇼 프로그램이었던 <쇼쇼쇼>를 비롯한 모든 음악 프로의 반주를 맡았고 편곡도 자주 했다. 작곡가로서 수많은 명곡을 썼으며 요즘으로 치면 기획자로 현미, 정훈희, 김추자 등의 빅 스타를 발굴했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이봉조는 한때 서울 시청의 토목과 공무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이미 1950년대 학생 시절부터 미8군 무대에서 재즈 색소폰 실력을 인정받던 터라 결국 공무원 자리를 박차고 나와 뮤지션으로 살기 시작했다. 역시 미8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던 현미와 1962년 미국 노래 을 <밤안개>로 개사하고 빠른 재즈풍으로 편곡해서 앨범을 냈다.

ddddd.jpg

이후 1963년 간첩 혐의로 처형당한 김수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나는 속았다>에서 이봉조가 작곡한 주제가 <보고 싶은 얼굴>을 현미가 불러 스타 커플이 되었다. 그 뒤에도 <떠날 때는 말없이> 등을 히트시키며 둘 사이에 아들까지 둘을 낳았지만, 이봉조에게 법적인 부인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현미의 요구로 헤어졌다.

이봉조는 '가요제 전문 작곡가'라는 별명답게 현미, 정훈희 등과 동경 가요제, 그리스 가요제, 칠레 가요제 등에 수차례 참가해 매번 수상하는 진기록도 세웠다. 이봉조가 아직 살아있다면 이제 90을 바라보는 나이이니 그의 데뷔 시절 이야기는 나도 주워들은 이야기들이다. 

 

한국 가요의 고전 <무인도>

commonM7ZDY7WE.jpg

commonMPETS16P.jpg
KBS2 '불후의 명곡'에 소개된 이봉조의 곡 '무인도'. ⓒKBS 화면캡처

 

내 기억에 이봉조가 깊게 각인된 첫 사건은 그가 정훈희와 함께 칠레 가요제에 출전해 <무인도>로 동상을 받고 정훈희가 최고가수상을 받고 돌아와 방송에 출연했을 때이다. 그게 1975년이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아직 올림픽에서 금메달도 한 번 따 보지 못한 처지였기 때문에 누가 국제 대회에 나가 상을 타오는 것은 온 국가의 경사였다.

1974년 홍수환이 김기수 이후 최초로 권투 세계 챔피언이 되고 몇 달 후 피아니스트 정명훈이 당시 적국인 소련(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차이코프스키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2위에 입상을 하고 돌아왔을 때는 시내에서 카퍼레이드까지 할 정도였다. 가요제 3위 입상은 카퍼레이드까지는 아니었지만 신문과 뉴스에 크게 보도가 될 만큼 대단한 일이었다.

언젠가 정훈희가 텔레비전 토크쇼에 나와 그때의 뒷이야기를 하는 것을 봤다. 이봉조가 무대에 오르기 전 그렇게 긴장을 많이 했다고 한다. 옆에서 보다 못한 정훈희가 “슨생님예, 뜰다 떨어지나 안 뜰다 떨어지나 떨어지는 건 마찬가지다 생각하시면 돼요” 했다고 한다. 위대한 공연예술가들의 공통점은 이렇게 긴장하고 떨다가 일단 무대에 서면 무섭게 몰입한다.

텔레비전에서 본 칠레 가요제 실황에서 이봉조도 그랬다. 마치 ‘내가 떨었어?’ 하는 것처럼 색소폰을 목에 걸고 전주와 간주에 연주를 하면서 정훈희가 노래할 때는 열정적으로 지휘를 했다. 정훈희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와 노래를 했다.

그녀가 스페인어로 노래를 시작하자 청중들이 열광했다. 하지만 정훈희의 말은 카메라에 잘 잡히지 않았지만 그곳에 정박 중이던 한국 원양어선 선원들이 객석에 앉아 초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응원했고 자신은 그 태극기만을 바라보며 노래를 했다고 한다. 휘날리는 태극기의 바람을 타고 정훈희의 끝을 모르는 고음이 독수리가 비상하듯 하늘 높이 솟구치며 노래가 끝났다. 그녀는 동양의 가수로 유일하게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commonOIHRTXDGs.jpg
KBS2 '불후의 명곡'에 소개된 이봉조. ⓒKBS 화면캡처

그 후로 40여 년이 흐른 지금 <무인도>는 우리 가요의 고전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수없이 들어왔지만 나이 들며 들어보면 참 기가 막히게 곡을 썼다는 생각이 든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연주하는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며 ‘정경화 씨는 어쩌면 비발디가 적어 놓은 시를 읽고, 그걸 음악으로 연주해서 사계절의 모습이 내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지게 할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비발디는 <사계>의 매 악장 앞에 그 악장의 주제에 맞게 짧은 시를 적어 놨는데, 새소리, 물소리, 폭풍우, 가을걷이의 기쁨, 을씨년스런 겨울날의 풍경 등이 시 없이 정경화의 음악만 들어도 눈에 보인다. <무인도>를 듣다 보면 같은 생각이 든다.

<무인도>의 가사는 그리 길지 않고 무인도의 풍경을 간략하게 그린다. 가사의 분위기와 곡조가 그렇게 잘 맞아떨어질 수가 없다. 노래의 가사가 없어도 가사에 나오는 그 풍경이 그대로 눈앞에 보일 것 같다. 노래 전반부 ‘파도여, 슬퍼 말아라. 파도여, 춤을 추어라. 끝없는 몸부림에 파도여, 파도여 서러워 마라’ 할 때는 리듬과 멜로디가 마치 무인도로 몰려와 부서지는 파도처럼 느껴진다.

‘솟아라 태양아’에 가서는 갑자기 트럼펫 반주가 요란하게 울리는 것이 마치 열대의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머리를 쑥 내미는 것 같고, ‘불어라 바람아. 드높아라 파도여, 파도여…’ 하는 대목에서는 폭풍우가 밀려오는 듯하다. 

 

재즈풍의 <밤안개> 

가요제에 출품하는 곡들은 대부분 웅장하고 클래식한 오케스트레이션 편곡을 하기 마련이지만 이봉조는 불세출의 재즈 색소폰 연주자답게 노래와 편곡 곳곳에 재즈적인 요소들을 가미하여 놓았다. 미국의 작곡가 조지 거슈인의 곡들처럼 클래식하게 연주해도 좋고 완전히 분위기를 바꿔 재즈곡으로 연주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느낌은 정훈희가 불러 크게 히트한 <안개>에서도 받는다. 두 곡 다 반주의 규모를 축소해 피아노와 드럼, 색소폰 반주에 맞춰 재즈풍으로 부르면 아주 좋을 것 같다. <밤안개>도 원곡인 ‘It’s a Lonesome Old Town’을 벤 버니와 그의 오케스트라의 연주곡으로 듣거나, 냇 킹 콜,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로 들으면 상당히 느리고 로맨틱한데 이봉조가 바꿔 놓은 <밤안개>는 재즈풍이다. 특히 윤복희가 1968년에 녹음한 것을 들으면 원곡의 형태를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재즈 냄새가 난다. 

 

정훈희가 부르는 <무인도>. 칠레가요제 실황(1975)

가수 현미가 TV조선 '인생다큐 마이웨이'에 출연해 이봉조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TV조선 유튜브

이봉조 下에서 계속...

이철재 미국 변호사, 《뉴욕 오디세이》 《나도 바흐를 즐길 수 있을까》저자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
이름      비밀번호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이달의 인기기사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75(독자팀)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위원회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