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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재 변호사의 라떼가요
노래는 개인과 사회의 기억과 역사를 담고 있다. 어느덧 라떼 세대가 된 필자가 좋아했던 노래들의 아름다운 노랫말을 곱씹고 노래와 얽힌 기억들을 회상한다. 우리 가요와 사회의 반세기의 이야기가 풍요롭게 펼쳐진다. 나이 든다는 건 기억이 풍성해 진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나 당신 사랑해도 될까요 심수봉 下 <비나리>
입력 : 2021.01.21
서울성곽 여섯 개 구간 중 가장 힘들다는 백악 구간을 오르던 날 지하철 경복궁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궁정동을 지나며 생각했다.

'1979년 10월 27일 아침 나의 우주가 혼돈 속으로 빠져들 때 바로 그 몇 시간 전 눈앞에서 사람이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그 냄새를 맡고, 그 피로 옷이 흠뻑 젖었던 심수봉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무 생각도 못 했을 것 같기도 하다. 우리 가요사에 길이 남을 싱어송 라이터(Singer-Song Writer) 심수봉이 그 음악적 재능을 맘껏 펼쳐보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좌절과 시련이 있을지 그때 그녀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수봉 上편에 이어...

심수봉의 노래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1996년에 나온 <비나리>이다. 지금의 남편을 짝사랑하며 쓴 구애의 노래이다. 지난 고통을 딛고 사랑하고픈 간절한 마음이 심수봉의 목소리를 타고 폐부 깊이 파고든다. ‘큐피트 화살이 가슴을 뚫고 사랑이 시작된 날’ 큐피드의 화살이 가슴을 뚫는 순간 우리는 그것에 저항할 힘이 없다.

그녀의 ‘운명의 페이지는’ 또다시 넘어간다. 뜻하지 않게 역사의 한복판에 있었다는 이유로 당한 고통과 방황하며 했던 결혼과 이혼을 돌이켜 본다면 이제 또 새로운 페이지가 시작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사랑 때문에 아파본 사람은 두렵고 지쳐 이제 더이상 사랑할 힘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새로운 사랑은 늘 새로운 용기와 에너지를 함께 가지고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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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페이지를 넘긴다.
‘나 당신 사랑해도 될까요. 말도 못 하고 한없이 애타는 나의 눈짓들’
참 구차하다. 사랑해도 되냐고 물어보니 말이다. 더 구차한 건 그 말조차 하지 못하고 눈짓만 계속 보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 빠지면 구차가 구차로 보이지 않는걸 어쩌랴. ‘세상이 온통 그대 하나로’ 변해버린다. 아무리 밥을 씹어도 넘어가지 않고, 먹어도 살은 쪽쪽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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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랑 연습도 없이 벌써 무대로 올려졌네’
황당할 거다. 더이상 사랑하지 않겠다 그렇게 다짐했건만 마른 섶에 옮겨붙은 불처럼 사랑은 어느새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른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사랑에 가장 필요한 것은 위험을 감수하는 결단력과 용기이다. 바로 다음 구절에도 나온다.
‘생각하면 덧없는 꿈일지도 몰라…’
어차피 사랑은 모 아니면 도이다. 한낱 꿈일지도 모르지만 아주 달콤한 꿈이 될 수 있다. 물론 앞의 사랑처럼 끔찍한 고통을 줄 수도 있다. 고통이 두려우면 포기하면 된다. 대신 ‘어땠을까?’라는 평생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갖고 살아야 한다. 심수봉처럼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일을 여럿 겪은 사람은 하늘이 나를 저주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하늘에 대고 절규하며 묻는다.
‘하늘이여, 저 사랑 언제 또 갈라놓을 거요. 하늘이여 간절한 이 소망 또 외면할 거요.’
2절로 넘어가면 둘이 처음 만나던 때를 노래한다. ‘예기치 못했던 운명의 그 순간 당신을 만나던 날’ 그리고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나온다. ‘드러난 내 상처 어느새 싸매졌네.’ 여기서 심수봉의 마음이 결정적으로 열리지 않았나 한다.
내 주변에 수녀원에서 살다 여러 사정으로 수녀원을 나온 분이 있다. 2〜3년 힘들게 살아가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다. 수녀로서의 삶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던 때라 고민했다. 이 남자는 그녀를 데리고 자동차를 운전하고 새벽 2시에 그 수녀원 문 앞으로 갔다. 모두가 잠든 밤 그녀는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의 옛집 문을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문을 붙잡고 울도록 옆에서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와 결혼을 결심했다.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많은 상처들 때문에 ‘내 인생에 일상의 행복은 허락되지 않았나 보다’ 생각할 때 누군가 그 상처를 진정으로 받아들여 주면 그 상처는 ‘어느새 싸매져’ 치유된다.
 KBS '불후의 명곡'에 출연한 심수봉이 직접 피아노 반주하며 부르는 '비나리'.
내가 이 노래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노랫말이 2절 끝부분에 나온다.
사랑이란 작은 배 하나, 이미 바다로 띄워졌네.’
사랑하는 두 사람 좀 행복하게 살면 안 되는 것일까? 하지만 사랑은 세상이란 바다에 떠 있는 배이다. 세상이 협조해 주지 않으면 사랑은 폭풍 만난 똑딱선 신세가 된다. 그녀는 이미 자식이 둘이 있는 상태에서 재혼했으니 그들의 사랑이 녹녹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1절에서 ‘이 사랑 언제 또 갈라놓을 거냐’고 하늘에게 묻던 심수봉은 2절에서 단호히 말한다.
‘이 사랑 또 눈물이면 안 돼요. 저 사람 영원히 사랑하게 해 줘요.’
그녀는 마음을 굳혔다. 여태 이만큼 당했으면 하늘에 대고 요구할 자격이 있다 생각했나 보다. 노래는 여기서 끝나는 듯하다. 여기서 끝나도 음악적으로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 마치 보너스 트랙처럼 네 소절이 더 들어 있다. 거의 떼쓰다시피 마지막에 뱉는 한 마디 ‘아~~ 사랑하게 해 줘요.’ 이 부분이 매력 포인트이다.
이 노래를 처음 만들고 친구에게 들려줬더니 노래가 너무 비관적이라고 해서 추가했다고 한다. 그 친구에게 감사한다. 심수봉의 콧소리가 애원하듯, 떼쓰듯, 물고 늘어지듯 부르는 이 마지막 구절이 없었다면 훨씬 심심한 노래가 되었을 것이다.  

 

미국에 캐롤 킹이 있다면, 한국에는 심수봉이 있다
심수봉의 노래 중 내가 좋아하는 또 하나의 노래가 자작곡은 아니지만 그녀가 러시아 노래를 개사해 부른 <백만 송이 장미>이다. 이 노래는 임주리도 같은 제목으로 불렀는데 가사는 완전히 다르다. 임주리는 TBC-TV 전설의 드라마 《야, 곰례야》의 주제가를 불러 유명해진 가수이다. 그 뒤로 <립스틱 짙게 바르고>가 크게 히트했다.
《엄마의 바다》라는 주말 드라마에서 김혜자가 우울할 때면 이 노래를 계속 불러 유명해졌다. 임주리의 목소리도 특이하고 좋아하는데 <백만 송이 장미>는 심수봉의 가사를 더 좋아한다.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사랑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워 오라는…’
캄캄한 밤하늘 수많은 별 속에 별똥별 하나가 사랑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를 피우려 이 세상으로 내려오는 모습을 그려보며 심수봉의 콧소리를 듣다보면 신화적이라고 할까 신비한 느낌이 든다.
 
KBS '7080 콘서트'에 특별 출연한 심수봉이 장기하와 함께 부른 <백만 송이 장미>.
유튜브에 심수봉이 장기하와 얼굴들의 콘서트에 특별 출연해 <백만 송이 장미>를 부르는 비디오가 올라와 있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 둘이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니 종종 찾아 듣는다.
<그때 그 사람>의 재즈 버전도 유튜브에 있다. 피아노와 재즈 반주로 시작하는데 ‘이 노래가 이런 면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굳이 재즈의 기분을 과하게 내려 하지 않는 심수봉의 노래가 아주 좋다. 피아노와 드럼에 가끔 플루트 소리가 들리면 얼마 전 타계한 프랑스의 재즈 피아니스트 클로드 볼링(Claude Bolling)이 전설적인 플루트 연주자 장-피에르 랑팔(Jean-Pierre Rampal)과 녹음한 ‘바로크와 블루(Baroque and Blue)’ 분위기가 난다.
심수봉은 작사, 작곡 능력도 뛰어나지만 피아노, 드럼 등의 연주도 상당한 수준이다. 이 버전에 나오는 피아노와 드럼 연주가 혹시 그녀의 연주가 아닐까 한다.  

 

애절한 목소리 만큼 굴곡진 그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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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봉의 매력은 우선은 특이한 목소리이다. 특유의 콧소리는 때로는 흐느끼는 듯하고, 때론 영혼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때로 신비롭기도 하다. 일부러 콧소리를 낸다는 느낌 없이 콧소리가 나는 것이 매력이다. 거기에 더해 심수봉은 심금을 울리는 곡 해석력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노래가 자작곡이니 잘 부르지 않겠느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 곡은 잘 쓰는데 그 곡을 남이 불렀을 때 훨씬 빛이 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 하나 있다. “미국에 캐롤 킹(Carole King)이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심수봉이 있다.”
캐롤 킹은 1960년대부터 당시 남편이던 작사가 제리 고핀과 함께 수많은 곡을 썼다. 때로는 자신이 피아노를 치며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유명 가수들에게 줘서 120여 곡을 빌보드 싱글 차트에 올린 불세출의 싱어-송 라이터이다. 캐롤 킹도 노래를 잘하는 가수이지만 그녀의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 같은 노래만 들어도 아리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의 버전이 훨씬 좋다.
심수봉은 작곡과 악기 연주에 있어 캐롤 킹에 뒤지지 않지만 여기에 작사 능력까지 갖춘 데다가 자신의 노래를 그 누구보다 소화를 잘하는 만능 뮤지션이다.
심수봉은 사는 날까지 아니 죽어서도 10·26을 자신의 생에서 지워버릴 수 없을 것이다. 나부터도 심수봉의 음악 세계를 존경하고 좋아하면서도 그 이야기를 하는데 10·26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는 10·26 이후의 정치 상황 때문에 그녀의 귀중한 10여 년을 잃었다.
앞으로 그녀가 얼마나 더 오래 신곡을 발표하고 노래할지는 모르지만 될수록 오래 활동하길 바란다. 그리고 심수봉도 그 어느 누구도 정치인들의 싸움 때문에 그들의 삶과 고결한 예술세계가 짓밟히지 않는 세상이 왔으면 하고 바래본다. 
이철재 미국 변호사, 《뉴욕 오디세이》 《나도 바흐를 즐길 수 있을까》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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