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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재 변호사의 라떼가요
노래는 개인과 사회의 기억과 역사를 담고 있다. 어느덧 라떼 세대가 된 필자가 좋아했던 노래들의 아름다운 노랫말을 곱씹고 노래와 얽힌 기억들을 회상한다. 우리 가요와 사회의 반세기의 이야기가 풍요롭게 펼쳐진다. 나이 든다는 건 기억이 풍성해 진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美《에드 설리반 쇼》 최다 출연한 원조 걸그룹은 누구?..."태어나 보니 엄만 이난영이야" 김시스터즈 上 <어머님 생각>
입력 : 2020.11.30
미국 CBS에서 방송한 《에드 설리반 쇼(The Ed Sullivan Show)》라는 유명한 프로그램이 있다. 1948년부터 1971년까지 거의 사반세기 미국 안방극장의 황제로 군림한 쇼이다. 그 유명한 엘비스 프레슬리도 《에드 설리반 쇼》에 출연하고 싶어 오매불망 에드 설리반의 초대를 기다렸다.
에드 설리반이 엉덩이를 심하게 흔드는 엘비스의 춤을 문제 삼아 “그의 동작들이 안방극장에 소개하기에 너무 선정적이다. 그를 절대로 출연시키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에드 설리반 쇼》의 경쟁 프로인 “스티브 알렌 쇼(The Steve Allen Show)”에서 먼저 프레슬리를 출연시키고 그 주에 시청률에서 처음 《에드 설리반 쇼》를 완파한 뒤 에드 설리반도 마음을 바꿔야 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드디어 1956년 《스티브 알렌 쇼》에 출연한 지 약 한 달 뒤에 꿈에 그리던 《에드 설리반 쇼》에 출연했다.
반면 비틀즈의 출연은 에드 설리반 자신이 적극 추진했다. 비틀즈는 영국에서는 이미 최고의 스타였고, 미국에서도 음반을 통해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에드 설리반 쇼》 무대는 그들이 실제로 미국을 방문해 공연한 데뷔 무대였다.
비틀즈와 엘비스 프레슬리의 《에드 설리반 쇼》 출연은 미국 대중문화의 판도를 바꿔 놓은 역사적 사건이다. 특히 비틀즈가 1964년 2월 《에드 설리반 쇼》에 3주 연속 출연함으로써 미국 내에서 그들은 아이돌 스타의 위치로 올랐다. 뿐만 아니라 비틀즈의 《에드 설리반 쇼》 출연을 시작으로 ‘영국의 침략(British Invasion)’이라 불리는 영국 출신 가수들의 미국 진출이 거세게 시작되었다. 쉽게 말해 영국판 한류가 시작된 것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도 19세에 콩쿠르에 나가 세계를 제패하고 《에드 설리반 쇼》에 출연 한 적이 있다. 한때 그 출연분 비디오가 유튜브에 올라 왔지만 지금은 삭제되고 없다. 정경화와 같은 날 출연자 중에 재즈의 여신 엘라 피츠제럴드(Ella Fitzgerald)가 있다.
정경화 자신의 회고에 의하면 이날 출연자 대기실에서 만난 엘라 피츠제럴드가 어린 자신에게 다가와 상냥하게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엘라의 순서가 되어 노래를 마치고 들어왔을 때는 정경화가 다가가 “잘 들었다”고 말을 했더니 “즉흥연주(Improvisation)가 별로 맘에 안 들게 나왔어요”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엘라 피츠제럴드의 즉흥연주나 애드립은 말 그대로 100퍼센트 즉흥인 것이다. 자신도 무대에 나가 흥이 돋을 때까지 뭐가 어떻게 나올지 전혀 모르는 상태로 노래를 시작한다. 대단한 일이다.
더 대단한 것은 엘라처럼 대단한 가수도 《에드 설리반 쇼》에 나오면 출연자 대기실에서 자기 순서를 기다리다 나가서 노래하고 들어왔다. 모든 출연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3분이었다. 그러나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 한 그룹을 에드 설리반이 유난히 좋아해서 그들에게 나중에는 7분까지 시간을 준 일이 있다. 《에드 설리반 쇼》 최다 22회 출연 기록을 세우기도 한 이들은 다름 아닌 한국의 김시스터즈이다.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는 꿈도 꿀 수 없던 시절, 우리나라가 세계 최빈국이던 그 시절에 황금기를 구가하던 세계 최강 미국에 진출해 한국을 알린 그들의 이야기는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풍요로움과 성공을 당연하게 즐기는 우리들이 새겨볼 역사이다.
 
《에드 설리반 쇼》 최다 출연 기록 세운 원조 걸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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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 설리번(왼쪽에서 둘째) 쇼에 출연한 이난영(가운데)과 김 시스터즈. ⓒ인디라인

김시스터즈는 숙자, 애자, 민자로 구성된 세 자매 그룹으로 미국 라스베이거스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실제로 숙자와 애자는 자매간이고 민자는 숙자와 애자의 외삼촌인 유명 작곡가 이봉룡의 딸이라 성이 이씨이다.

숙자와 애자의 어머니이자 이봉룡의 여동생은 1930년대 우리나라 최초의 걸그룹이라는 저고리시스터즈의 일원으로 활약했고, 후에 솔로로 나서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이다. 이난영은 우리나라 근대 가요의 시조로 불리는 인물이다. 몇 년 전 나온 《해어화》라는 조선 마지막 기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서도 이난영의 캐릭터가 해방 직전 조선의 대스타로 등장한다.
김시스터즈의 아버지는 1930년대 이미 재즈를 우리 가요에 도입한 김해송이다. 김해송은 일제강점기 빅 히트곡 중 하나인 <오빠는 풍각쟁이>의 작곡가이며, 해방 후에는 악극단을 만들어 미군부대를 중심으로 오페라 《투란도트》 등의 이야기를 차용해 뮤지컬을 만들어 공연하는 등 선구자적인 음악 창작 활동을 했다. 미군을 위해 일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한국전쟁이 터지자 북한군에 체포되어 그후 실종되었다. 끌려가던 도중 서울 외곽에서 총살당했다고도 하고 북한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처형당했다고도 한다.
바버레츠라는 여성 그룹이 김시스터즈에 관한 노래를 부른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 가사가 ‘태어나 보니 엄만 이난영이야. 태어나 보니 아빤 김해송이야’로 시작한다. 그 정도로 이난영과 김해송은 우리 근대 가요사의 거목들이다.  
김해송이 납북되고 난 뒤 혼자 노래를 부르며 7남매를 키우느라 가난에 시달리던 이난영은 오빠 이봉룡을 찾아가 김시스터즈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김시스터즈의 맏언니인 김숙자가 아홉 살 나던 해부터 이난영이 레코드판을 사다 영어 노래를 들으며 한글로 영어 발음을 받아 적고, 그걸로 아이들을 가르쳐 노래를 부르게 했다. 뜻은 물론 모르고 불렀다. 발음도 영어를 모르는 엄마가 듣고 적어 준 것을 외워 불렀으니 정확할 리 없었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외국어에 재능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음악을 통해 귀가 예민하게 발달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들도 발음이 생각보다 좋았고, 그 당시 미8군 무대에 서는 가수들은 영어 발음 훈련을 따로 받았다. 유튜브에서 그들이 《에드 설리반 쇼》에서 노래하는 것을 들으면 그때도 뜻은 잘 모르고 불렀다고 하는데 발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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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시스터즈. ⓒ디모킴 뮤지컬 팩토리

1950년대 미국 음악계에 레논시스터즈(Lennon Sisters), 앤드류시스터즈(Andrew Sisters) 등 3자매 그룹 전성시대인 것에 힌트를 얻은 이난영이 노래에 더해 악기까지 다루면 미국 무대도 승산이 있겠다 생각을 해 첫째 숙자에게 기타, 둘째 애자에게 알토색소폰, 민자에게 드럼을 가르쳤다.

미국으로 돌아간 미군들에 의해 어린 소녀 셋이 노래하고 춤추며 악기를 연주하는데 기가 막히더라는 입소문이 퍼졌다. 급기야 유명 에이전트들이 한국으로 찾아와 1959년 김시스터즈를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데려갔다. 사막 한가운데 오아시스처럼 솟은 라스베이거스는 일명 ‘죄의 도시(Sin City)’라 불리는 환락과 도박의 도시이다.
호화판 마천루 호텔들은 의외로 숙박비가 그리 비싸지 않다. 밥을 먹어도 ‘왜 이러지?’ 싶을 정도로 비싼 곳이 없다. 먹고 마시고 즐기며 도박에 돈을 쏟아붓고 가라는 뜻이다. 호텔들이 손님을 유치하기 위해 1년 내내 공연을 유치한다. 공연도 얼른 보고 일어나서 도박하라고 짤막짤막하게 하지만, 이곳에는 세계 초일류 가수들만이 초대받아 와서 노래한다.
맨땅에 헤딩하듯 에이전트 계약만 하고 처음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했을 때 김시스터즈는 셋 모두 10대의 소녀들이었다. 어머니가 ‘한국의 미를 알리라’며 셋에게 한복을 입혀 보냈다. 당시 우리나라는 최빈국으로 미국 가는 직항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여의도 모래섬 허허벌판에 활주로만 만들어 놓고 모랫바닥에 서서 인사하고 비행기 타고 일본으로 가서, 비행기 갈아타고, 괌, 하와이, 캘리포니아를 거쳐 라스베이거스까지 거의 이틀 걸려 가야 했다.
긴 시간 비행기 좌석에 앉아 한복을 입고 있으려니 어린 소녀들이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했을 때는 빈사 상태였을 것이다. 이 어린 소녀들은 기진맥진 피곤해할 여유도 없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어머니가 ‘스물세 살이 될 때까지 아무도 남자친구를 사귀면 안 된다’고 엄명을 내렸다. 맏이인 숙자에게는 ‘성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라’는 밀명도 내렸다. 
 
뜻도 모르고 부른 영어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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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스터즈. ⓒ인디라인

김시스터즈는 다행히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하자마자 선더버드호텔과 6개월 계약을 맺었다. 주급 600백 달러를 받으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오래전 김숙자가 텔레비전에 나와 하는 말이 늘 연습과 공연으로 바쁘게 지내다 처음 한국 음식을 먹으러 로스앤젤레스에 간 것이 미국에 가 몇 년 지난 후였다고 한다. 그 당시 라스베이거스에 중국 음식점 말고는 아시아 음식점이라곤 없던 시절이었다.

둘째 애자는 중노동이나 다름없는 공연을 하루 몇 차례씩 소화하면서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끼니를 건너뛰다 황달까지 걸렸다. 어쩌다 일본식 매실장아찌인 우메보시를 구해 그걸 밥과 함께 먹는 것이 즐거움이었다. 몇 년 동안 김치 구경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눈만 뜨면 연습에 연습을 반복하다가 처음 로스엔젤레스 한인 식당에 갔을 때는 옷 주머니에 음식을 담아오고 싶었다니 그 힘든 성공의 과정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선더버드호텔에서 6개월 계약을 마친 뒤 스타더스트호텔로 옮겼다. 스타더스트(Stardust)는 직역하면 별가루이다. 김시스터즈가 무대를 스타더스트로 옮긴 후 별가루를 맞았는지 《에드 설리반 쇼》에서 출연 요청이 왔다. 그들은 그때 《에드 설리반 쇼》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도 모르고 출연했다.
《에드 설리반 쇼》 출연 이후 김시스터즈는 별가루도 아니고 아예 별이 되었다. 주급 600달러로 시작한 그들은 어느새 주급 15000달러를 받는 특급 그룹이 되었다. 네바다주 고액 납세자 명단에 매년 이름을 올렸다. 할리우드의 유명한 《딘 마틴 쇼》에 초대를 받았을 때는 스타더스트에서 4회 공연을 하고 비행기 타고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딘 마틴 쇼》에 출연하고 다시 비행기를 타고 돌아와 공연하는 강행군을 할 정도로 여기저기서 그들을 찾았다.
이런 살인적인 스케쥴을 소화하는 틈틈이 그들은 새로운 악기를 배워 연주하면서 동시에 춤추고 노래하는 연습을 했다. 에드 설리반이 매번 그들을 초청할 때마다 새로운 악기를 연주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김숙자는 아직도 영어가 서투르다고 한다. 미국에서 부른 노래도 대부분 뜻도 모르고 불렀다. 하지만 혹독하게 연습한 덕에 《에드 설리반 쇼》에 스물두 번 나가 공연한 비디오를 지금 봐도 한 군데 틀린 곳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새로운 악기를 배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연주하고 춤추며 노래를 했다니 놀라울 뿐 그들의 집념과 노력에 뭐라 달리 할 말이 없다.  

 

태어나보니 엄마가 이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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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눈물'을 열창하는 가수 이난영. ⓒKTV국민방송 영상자료 캡처

김시스터즈의 어머니 이난영은 자식들을 모두 미국으로 보내고 쓸쓸한 나날을 술과 아편에 의지해 살다 <애수의 소야곡>이라는 노래로 유명한 남인수와 사랑하기 시작했다. 남인수는 결핵을 앓고 있었다. 이난영의 정성 어린 간호에도 불구하고 남인수는 세상을 떠나고 그들의 짧은 사랑도 끝났다.

이난영은 1962년 딸들의 성화로 미국으로 건너가 딸들과 함께 생활하며 1963년 《에드 설리반 쇼》에 같이 출연해 노래도 불렀다. 미국 생활이 무료했는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이난영은 다시 우울증에 시달리다 1965년 알코올과 아편 중독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일부에서는 자살이라는 말도 있었다. 김시스터즈는 예정된 공연을 모두 취소할 수 없어 결국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1970년대 초에 처음으로 내한공연을 하면서 어머니 묘소도 찾아갔다.
나도 이때 TBC-TV 《쇼쇼쇼》에 출연했던 김시스터즈의 노래를 어렴풋이 기억한다. 프랑스 노래 ‘Comme d’Habitude’를 폴 앵카가 영어로 개사하고 프랭크 시나트라가 불러 유명해진 ‘My Way’를 <어머님 생각>이라고 개사해서 불렀다. 지나가다 슬쩍 봐서 가사를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머나먼 타국에서 형제끼리 손을 맞잡고…어머님 생각’ 하며 부르던 셋의 하모니가 어린 내 귀에 천상의 노래처럼 들렸다.  
 
한국 최초로 미국 진출한 김시스터즈 'All shook up'. KTV국민방송 영상.
 
이철재 미국 변호사, 《뉴욕 오디세이》 《나도 바흐를 즐길 수 있을까》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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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yc4564   ( 2020-11-30 )    수정   삭제 찬성 : 22 반대 : 1
1950년대 김시스터즈은 필동 유진오씨 댁으로 가는 대로에서 안쪽으로 약간 들어간, 그러나 집 전체가 잘 보이는 2층 일본식 적산가옥이었은데 외벽이 나무로 된것으로 어렴프시 기억이 난다. 고색창연한 꽤 큰 집이었다. 근처에 무슨 나무인지 꽤 큰 나무 한그루가 서 있었다. 나는 남산국민학교를 나왔으며 유진오씨 댁 바로 옆집에 내 친구가 살아서 그동네로 자주 놀러 다녔다. 그 당시에는 김시스터즈보다는 그의 어머니 이난영씨 집이다라고만 알았으며 당시에는 김시스터즈가 우리나라 방송, 미8군에서 노래를 할 당시로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다. 라스베가스레 가면 길 이름은 모르겠는데 대로변에 스타 더스트 네온 간판이 있다. 밤에 불이켜지면 그야말로 휘황찬란한 .... 그 밑에서 사진찍은게 있을 텐데...... 에드 설리반 쇼는 1960년초 쯤에 미 8군 텔레비죤 방송에서 볼수 있었으며 나는 잭슨 5 . 라는 흑인 그룹을 그당시에 보았는데 그중 가장 꼬맹이가 마이클 잭슨이었다. 에드 설리반은 머리통이 크고, 곱사등 같은 체형으로 외모는 사실 흉물같이 못생겼다. 그러나 그의 프로두싱과 단순명료한 진행솜씨 그리고 당시 무대 밖의 영향력은 대단했었다. 지금도 유튜뷰에 조각 조각으로 왕년의 유명한 가수들의 공연장면을 볼수 있다. 김시스터즈가 미국에서 히트친 노래는 리메이크한 챨리 브라운이었다.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김시스터즈는 생김새, 그리고 무대복등으로 대개의 미국인들은 중국소녀들로 알고 있었다. 이난영씨가 딸들과 함께 출연하여 공연하는 모습은 감동이었다. 나의 개인적인 주장이지만, 이는 위대한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자유를 주므로써 한국인들의 피에 흐르는 탈렌트를 세계무대에서 발산할수 있었다. 자유! 자유가 그 원동령이다. 당시에는 똥구멍이 찢어질 정도로 못살았기에...이말이 무슨뜻인지 조차도 지금 세대들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여기에 더하여서 우리에게 풍요를 주어서 방탄소년단이 출현한것은 99.99% 위대한 박정희의 한강의 기적의 선물, 풍요 덕분이다! 한국인들에게 자유와 풍요를 주면 이처럼 탈레트를 발산한다는 얘기이다. 문제는 한국인들은 역사에 반면교사하지 못하며, 위대한 인물 이승만, 빅정희의 진가를 알지 못하며 김시스터즈 같은 위대한 선배들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미 이중에서는고인이 되신분도 있고 만나보지는 못했어도 동병상련의 신세를 면치못하는 해외동포들은, 특히 미국교포들은 고국에 지대한 영향과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평가와 대우에 너무 인색하다. 이는 좌편향이 낳은 패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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