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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눈물로 새싹이 돋아날 때까지... 김동률 下 <기억의 습작>
입력 : 2020.11.03
김동률의 명반들 중에서도 내가 특히 좋아하는 앨범은 그가 ‘엄친아’만 들어간다는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중퇴하고 유학길에 올라 보스턴의 유명한 버클리 음대를 졸업한 직후 내놓은 《토로》이다. 그중에서도 <잔향>을 나의 최애로 친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피아노와 런던심포니의 수준 높은 연주, 곡 전반에 걸쳐 뒤에서 쫓아오는 발자국처럼 사라지지 않고 들려오는 6/8박자의 비트 그리고 무엇보다 그 가사의 아름다움 등이다.

김동률이 쓴 노랫말들이 다 아름답지만 <잔향>의 아름다움은 좀 다르다. 김동률의 다른 노래의 가사들은 대체로 산문적이고, 어느 한 사람이 어떤 상황을 차근차근 이야기해 주는 것 같다. 한 예로 <기억의 습작>은 마치 누군가의 편지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반면 <잔향>의 노랫말은 시적이고 아름다운 역설과 비유로 가득 차 있다.

- 김동률 上에 이어...

"소리 없는 그대의 노래 귀를 막아도 은은해질 때… 향기 없는 그대의 숨결 숨을 막아도 만연해질 때…"

왜 이럴까? 그것이 마음속에서 들려오고 풍겨 나오기 때문이다. 상사병이다. 대체 누구를 얼마나 사랑하기에 이 지경이 된 것일까? ‘남모르게 삭혀온 눈물’이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용기 있게 고백 한 번 해보지 못한 것 같다. 상대방은 무심한 것일까? 아니면 그 사람도 나름의 이유가 있어 사랑을 받아줄 수 없어 모른 척하는 것일까?

그런 건 상관없다. 이 화자의 세계는 온통 ‘그대’로 가득 차 눈을 뜨나, 감으나 ‘그대’ 생각만 난다. 속으로 삭이는 것도 한도가 있다. 드디어 그는 혼자 술을 마시고 벽을 긁으며 울기라도 했나 보다. ‘남모르게 삭혀온 눈물 다 게워내고…’ 게워내니 속이 후련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다 게워내고 기진맥진해 천장 쳐다보고 누워서 결국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가 ‘그대의 이름’이다. ‘허기진 맘 채우려 불러보는 그대 이름.’ 그리움은 오히려 더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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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 ⓒ뮤직팜

다음 구절은 더 난감하다. 이제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잊고자 그간의 미련을 모두 털어냈다고 하지만 ‘휑한 가슴 달래려 헤아리는’ 것은 ‘그대의 얼굴’이다. 아, 이 사랑을 어찌할꼬? 정말 이런 말은 하기 싫은데 시간이 약이라고 해줄까? 그다음 말을 들어보니 시간도 약이 될 것 같지 않다.

이 사람은 속이 시커멓게 타고, 그 까맣게 탄 속에서 ‘그대의 눈물로’ 싹이 나고 나무가 될 때까지라도 기다릴 테니 그때라도 생각나면 돌아와 ‘내 사랑을 받아주오. 날 안아주오. 단 하루라도 살아가게 해주오’라고 간절히 애원한다. ‘단 하루라도 살아가게…’ 단 하루라도 그 사랑 없이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새까맣게 탄 속에서 싹이 나는 대목부터 화자의 감정이 울컥하는지 노래도 격양되고 때로 악보상에는 계속 6/8박자를 유지하지만 실제 리듬은 노골적으로 3박자의 춤곡풍으로 바뀐다. 그의 영혼이 흠모하는 ‘그대’와 왈츠라도 추는 것일까? 

이윽고 그는 큰 소리로 피를 토할 듯 토로한다. ‘사랑하오.’ 그러나 이 간절한 외침 역시 용기 없는 입술에 갇힌다. 출구를 찾지 못한 외침은 영혼의 벽과 천장만을 무수히 두드릴 뿐 공허한 잔향이 되어 끝없이 안에서만 울리고 만다. ‘얼어붙은 말 이내 메아리로 잦아드네.’ 마지막 오케스트라의 멜로디는 처음 시작 멜로디의 변주이다. 결국 제자리인 것이다. 오늘 또 해가 졌으니 하루가 가는 것뿐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다. 고백도 하지 못하고 그냥 아프기만 하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화자는 검게 그을린 자신의 맘에 ‘그대의’ 눈물로 싹이 돋는다고 했을까? 나의 눈물이라고 해야 맞는 것이 아닌가? 그대에 대한 혹은 그대를 향한 나의 눈물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위에서 의심을 품었듯 그 상대방에게도 어떤 상처가 있어 이 화자의 사랑을 받아주지 못하고 떠난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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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잔향> 속의 ‘그대’가 <기억의 습작> 속의 ‘너’가 아닐까 상상해 본다.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기억의 습작>은 현재의 화자가 과거의 ‘너’에게 한 장의 편지를 쓰는 것 같다. 부치지 못할 편지라 굳이 습작이라 불렀나 보다.

어느 날 우연히 화자는 과거의 ‘너’를 떠올린다. ‘너’는 과거에 뭔가 힘든 일이 있었던 듯하다. 어쩌면 병마와 싸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너’는 힘들 때마다 화자에게 기대었다. 그 ‘슬픈 눈빛이’ 화자를 너무도 아프게 했다. 이렇게 연민으로 시작해 사랑이 된 것일까? ‘너’의 힘든 삶을 알기에 ‘그대’에게 사랑 고백도 하지 못한다.

‘너’는 그의 사랑을 알지만 자신의 힘든 처지로 인해 그 사랑을 받아주지 못하고 애써 외면한다. ‘그대의 눈물로 새싹이 푸르게’ 돋아날 때까지 기다리겠다 했지만, ‘너’는 돌아오지 않는다. 현재의 화자는 마침내 독백한다. ‘많은 날이 지나고 나의 마음 지쳐갈 때 내 마음속으로 쓰러져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찾아올 것이라고. 이제 정말 포기하려나 보다. 어쩌면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영화 《시월애(時越愛)》에서처럼 이 기억의 습작이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의 ‘너’에게 전해진다면 둘은 잠시라도 맺어질 수 있었을까? 언젠가 김동률을 만나 사인이라도 받는 날이 오면 한 번 꼭 물어봐야 할 질문으로 남겨 놓는다.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김동률이 <기억의 습작> 가사를 쓴 건 고등학교 재학 시절이라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라면 도대체 고등학교 시절 어떤 정신세계였다는 말일까? 놀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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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 ⓒ뮤직팜
 
<잔향>과 <기억의 습작> 말고도 내가 좋아하는 김동률의 노래는 수도 없이 많다. <취중진담>은 듣는 이들이 젊은 날의 ‘과오’를 생각하며 혼자 겸연쩍은 미소를 짓게 만든다. 늘 이 노래를 들을 때면 ‘그래도 나보다 용기 있는 친구로군’ 하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취중에도 고백하지 못한 아픈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과연 이게 취중진담일까 아니면 그냥 취중에 속으로만 웅얼거리던 것을 말을 했다고 착각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후자가 이루지 못한 사랑과 실연을 노래하는 김동률의 예술세계와 더 상통할 것 같기도 하다.

이소은과 함께 부른 <기적>은 오랜만에 실연이 아니라 사랑이 이루어진 기쁨과 감동을 노래해 좋아한다. 김동률이 이소라와 함께 부른 <사랑한다 말해도>는 듀엣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 같다. 세상에 다시없을 남자 목소리와 세상에 다시없을 여자 목소리가 만나 한 사람의 목소리처럼 기막힌 호흡으로 동상이몽의 사랑 노래를 부른다. 서로가 사랑한다 말하지만 예전의 열정은 없고 차마 꺼내지 못하는 한마디 때문에 사랑이 의무가 되어버린다. 서로를 바라보지 않으면서 상대방이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다고 불만 한다. 015B의 <오래된 연인>의 약간 더 심각한 버전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카니발 시절 이적이 가사를 쓰고 김동률이 곡을 붙인 <거위의 꿈>은 처음 듣는 순간 내가 그림만 좀 잘 그리면 그 가사에 일러스트레이션을 해서 그림책을 만들고 싶었다. 여러 다른 버전을 들어봤지만 오리지널 버전을 좋아한다. 특히 피아노 반주에 맞춰 부르는 비슷한 듯 조금 다른 이적과 김동률의 목소리가 소박하고 진실성이 있게 들려 좋다. 빅마마가 SBS 쇼 프로그램에 나와 부른 것을 유튜브에서 한 번 봤는데 그것도 좋아해서 종종 찾아 듣는다. 

 

밀크초콜릿을 녹인 듯한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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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 ⓒ뮤직팜

내가 좋아하는 김동률의 노래를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하나만 더 말을 하자면 <여름의 끝자락>을 꼽겠다. 늦여름 날 낮잠 속에서 내 마음을 이리 안타깝게 만드는 그런 사랑이 언제였던가 아련하게만 느껴진다. 이 노래는 김동률의 노래 중 유일하게 내가 그의 목소리 없이도 즐겨 듣는다.

미국 태생의 교포 2세인 대니구(Danny Koo)가 바이올린으로 연주한 것을 최근에 유튜브에서 유연히 발견해 들었다가 내 심장이 다 녹았다. 나중에 음향 조절 잘해서 한 번 더 녹음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연주는 좋은데 음향이 맹맹하니 답답하고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6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1990년대 초 우리나라 가요계에는 비슷한 목소리의 가수들이 부르는 비슷한 분위기의 발라드 노래들이 주류를 이루던 시절이었다. 가요에 싫증을 느껴 별 관심이 없었다. 얼마나 관심이 없었으면 <오래된 연인>을 부른 015B와 <기억의 습작>을 부른 전람회를 헷갈릴 정도로 무지했다.

그래도 김동률의 스위스 밀크초콜릿을 녹여 꺼룩한 시럽을 만들어 놓은 것 같은 목소리는 단번에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전주도 없이 ‘이젠’ 하며 첫마디를 시작하던 순간부터 ‘저 목소리를 손으로 꽉 짤 수 있다면 거기서 무엇이 나올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 후로 20년 넘게 그의 노래를 들었지만 그 목소리는 전혀 진력이 나지 않는다. 오히려 세월이 갈수록 내 영혼을 더 깊이 파고든다. 남의 것 부러워하지 말자고 하면서도 자꾸 부러워지는 그의 목소리. 내가 그런 목소리를 갖고 태어났다면, 나라도 로스쿨 중퇴하고 음악 공부 계속해서 훌륭한 가수의 꿈을 이루려 노력했을 것이다. 자신의 꿈과 재능을 위해 과감히 어렵게 이룬 것의 희생을 감수하는 결단력도 존경스럽다. 

이철재 미국 변호사, 《뉴욕 오디세이》 《나도 바흐를 즐길 수 있을까》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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