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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주의 클래식 디저트
클래식 음악을 글로 소개하는 일이 업(業)이다. AI 음악가에 반대하지만, 미래 인류가 클래식 음악을 박물관에 처박아두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모차르트와 쇼팽, 특히 바흐를 존경한다. 누구나 킬킬대고 웃을 수 있는 클래식 음악사의 에피소드를 모은 <알아두면 쓸모 있는 클래식 잡학사전>을 썼다.
천년을 기다린 여자 음악가의 시대 ② 안토니아 브리코부터 장한나까지! 이미 여성 지휘자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입력 : 2020.10.23
네덜란드 출신의 여성 지휘자 안토니아 브리코의 삶을 다룬 영화 <더 컨덕터>는 21세기 여성 지휘자의 차별과 어려움을 현실적으로 그렸다. 사진 제공 라이크 콘텐츠

작년 가을 어느 날의 일입니다. 딱 이맘때 같아요. 당시 유치원 형님반에 다니던 제 아이를 등원시키고, 종종 가던 카페에 들어갔어요. 노트북을 켜고, 이런 저런 것들을 검색하며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종종 저는 원고도 쓸겸 혼자만의 시간도 가질 겸 카페에서 시간 보내기를 좋아하는 편이거든요. 그때 떠올랐던 주제가 바로 여성 지휘자였습니다. 자세한 여성 지휘자의 역사를 공부한 적은 없지만, 재미있을 것 같았거든요. 곧장 제 칼럼을 담당하는 에디터에게 여성 지휘자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고 이메일을 보내고 있었어요. 

그런데 곧장 날아온 답신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여성 지휘자의 생애를 다룬 영화가 개봉하는데, 홍보사 측과 협업할 수 있겠냐고 묻더라고요. “응? 물론이죠, 해야죠.” 그렇게 해서 여성 지휘자 안토니아 브리코의 이야기를 직접 전해 듣는 기분이 드는 영화 <더 컨덕터>의 메이킹 영상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제 인생 최초의 촬영이었어요. 3분 정도 영상 촬영을 한다고 했는데, 결국 두 시간이 넘어 끝이 났지요. 처음에는 카메라 앞에서 말을 잘 했는데, NG가 날수록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갔거든요. 또 한 문장 잘 말했다 치면, 얄미운 오토바이 소리가 휘잉 녹음되는 바람에 다시 찍기도 했고요. 기진맥진한 채 촬영 장소를 나왔던 기억입니다. 그러나 돌잔치 이후로 헤어, 메이크업도 받고 예쁜 원피스도 입으니 마치 제가 스타라도 된 듯 기분이 좋았고요. 

무엇보다 메이킹 촬영을 통해 제가 얻은 것은 여성 지휘자에 대한 공부였습니다. 촬영을 위해 여성 지휘자의 역사부터 천천히 공부하면서, 이런 일도 있었구나, 하는 마음도 여러 번 들었고요. 오늘날 여성 지휘자들이 자유롭게 무대에 오를 수 있는 현상은 선배 여성 지휘자들의 피눈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으니까요. 

“나의 악기는 남성 연주자입니다. 당신들이 내 말을 듣지 않으니 나는 연주할 수가 없습니다”
_영화 <더 컨덕터> 중 안토니아 브리코의 대사.


여성 총리는 되고, 여성 지휘자는 안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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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뉴욕필을 최초로 지휘한 여성 지휘자, 안토니아 브리코.

안토니아 브리코는 1938년 뉴욕필을 최초로 지휘한 여성 지휘자입니다. 뉴욕필 오케스트라의 아카이브 홈페이지에 가보면, 당시 안토니아 브리코의 뉴욕필 데뷔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읽어보실 수 있는데요. 당시의 청중들은 분명 여성 지휘자, 뉴욕필을 진두지휘한 안토니아 브리코의 모습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모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평생 뉴욕필의 정규직 지휘자로 채용되거나 정기적으로 초청받는 지휘자로 인연을 잇지 못했어요. 뉴욕필 이외의 어떤 교향악단에서도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고요? 그때는 그래야 했으니까요.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지휘자에 자리에 여성이 오른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세계사를 움직인 여성들은 수도 없이 많은데, 왜 클래식 음악사 특히 지휘자의 역사에서 눈에 띌 정도로 적은 걸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 현상은 한 집안의 가장과 지휘자의 역할을 동일시하게 느끼던 문화의 영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생계를 위해 일터로 출근하고, 또 집안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결정했던 당시의 가장들처럼,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또한 그래야 한다고 정해놓았던 거죠. 누가요? 바로 남성 연주자들이요! 

음악을 이끌고 지휘하는 것은 오직 남성 지휘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하는 여성들도 있지만, 포디엄만은 안 된다는 편견이 지나쳤던 것 같아요. 그러지 않고서야 이토록 긴 긴 음악의 역사 중에 여성 지휘자의 존재가 적을 수 있었을까요.


교향곡은 양보 못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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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출신의 여성 지휘자 안토니아 브리코의 삶을 다룬 영화 <더 컨덕터>.

며칠 전 바티칸의 교황께서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도 주님의 자녀”라는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엄격한 규칙을 가진 단체 중 하나인 로만 카톨릭의 수장이 더 이상 세상의 성역은 없음을 고한 것입니다. 만약 100년 전의 교황이 “여성 지휘자를 허락한다”는 말씀을 해주셨더라면, 오늘날의 클래식 음악사는 꽤 많은 변화가 있었겠지요? 

남성 지휘자의 강력한 차별에도 불구하고, 지휘자가 되고 싶었던 여성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습니다. 최초의 여성 지휘자로 기록된 엘프리다 앙드레(1841년 2월 19일~1929년 1월 11일)을 선두로 안토니아 브리코, 주디스 소모기, 알마 로제, 잔느 에브라르, 마거릿 힐리스, 나디아 불랑제, 세라 콜드웰, 시안 에드워즈 등 적지 않은 여성 지휘자들이 등장했고요. 그녀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통해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오케스트라와 함께 교향곡을 지휘할 수 없었습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어렵게 얻은 지휘봉으로 작은 편성의 연주회나 합창 심지어 여성 연주자만으로 구성된 단체를 지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무대를 만든 남성들은 아마 이런 심보였을 겁니다. 합창이든 실내악이든 지휘하고 싶다면 한 번 해보세요. 그러나 교향곡만큼은 절대로 안 됩니다. 그곳은 오직 남성만의 영역이라고요! 

참 안토니아 브리코가 뉴욕필과의 데뷔 무대에서 연주한 작품은 차이콥스키 <로미오와 줄리엣>, 리스트 <메피스토 왈츠> 등인데요. 당시 그녀가 선택한 작품들이 오케스트라 음악이긴 하지만, 짧은 연주 시간 등 교향곡으로 치면 1단계 순한맛 정도랄까요. 그녀는 말러의 교향곡을 지휘하고 싶었을텐데다. 청중과 남성 연주자들에게 5단계 매운맛을 보여주고 싶었을 테니까요. 20세기부터 여성 연주자들이 천천히 포디엄에 오르는 데 성공했지만, 원하는 작품을 연주할 수 있는 기회는 여전히 없었습니다. 


여성 지휘자의 맹활약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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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출신의 여성 지휘자 안토니아 브리코의 삶을 다룬 영화 <더 컨덕터>.

그러나 천천히 부풀어 오르는 빵 반죽처럼, 여성 지휘자의 역할은 느리지만 멈춘 적이 없습니다. 역사 속 여성 지휘자들의 노력과 눈물의 값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그들이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오늘날 여성 지휘자들의 무대는 남성 지휘자의 무대만큼이나 자주 오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지구촌 오케스트라 공연 무대 위의 여성 지휘자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으니까요. 특히 올해 100주년을 맞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도 최초로 오페라 지휘를 여성 지휘자 요아나 말비츠에게 맡겨 화제를 모았고요. 또 지난 9월에는 세계 최초의 여성 지휘자 전용 콩쿠르가 열렸는데요. 51개국에서 220명의 여성 지휘자가 참가해, 여성 지휘자의 밝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실감케 했습니다. 

이런 장면을 볼 때면 저는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모든 분야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우대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요. 지휘자의 자리만큼은 남성과 여성이 차별 없이 오르내리는 것이 더 인간적인 음악이라고 느끼거든요. 음악이 존재하는 이유, 음악이 주는 기쁨을 단순하게 떠올려본다면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 어떤 성이든 하고 싶은 노래를 할 기회를 주는 것이 당연하거든요! 그렇지 않나요? 때때로 절박한 세상에서 적어도 음악만큼은, 그런 포근한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고, 그것이 음악의 힘이라고 믿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지금 자신의 한계나 일종의 터부에 부딪혀 적지 않은 고생 중인 모든 분들에게 슈베르트의 <마왕>을 보내드립니다. 제 인생 드라마 중 하나인 <스카이캐슬>의 김서형(김주영 선생 역)이 밤마다 와인 한 잔을 마시며 듣던 노래인데요. 괴테의 시에 18세의 슈베르트가 선율을 붙여 만든 노래고요. “어머님 저만 믿으셔야 합니다”라는 김서형의 대사가 떠오르며, 순간의 웃음꽃을 피우기 딱 좋은 노래거든요. 그리고 곧 가을남자, 슈베르트의 음악에 빠져 따스한 위안을 느끼실 수 있을거에요! 

 

 

정은주 《알아두면 쓸모 있는 클래식 잡학사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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