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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재 변호사의 라떼가요
노래는 개인과 사회의 기억과 역사를 담고 있다. 어느덧 라떼 세대가 된 필자가 좋아했던 노래들의 아름다운 노랫말을 곱씹고 노래와 얽힌 기억들을 회상한다. 우리 가요와 사회의 반세기의 이야기가 풍요롭게 펼쳐진다. 나이 든다는 건 기억이 풍성해 진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올해도 한가위가 찾아오면 목놓아 부르는 그 이름 현인上 <굳세어라 금순아>
입력 : 2020.10.01

근래 《내일은 미스터트롯》의 성공으로 트롯이 젊어졌다고 한다. 30여 년 전 주현미가 신나는 리듬의 <신사동 그 사람>을 불렀을 때도 트롯이 젊어졌다, 혹은 정통 트롯이 아니다 말이 많았다. 요즘 대세인 트롯맨들을 보면 주현미보다도 또 한 단계 젊어졌다.

이와 반대로 오히려 트롯의 시계를 70년 뒤로 되돌려놓은 20대 초반의 가수가 있다. 바로 조명섭이다. 요즘 미국에 사는 한국 가정에 한국 채널 시청하지 않는 집이 없을 정도인데 나는 집에 아예 케이블이 없다. 매일 밤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뒤적이며 한국 방송을 이것저것 찾아본다.

조명섭이라는 낯선 이름이 올라와서 무심코 듣다 깜짝 놀랐다. 나도 아주 어려서 듣던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를 어떻게 21세의 청년이 목소리, 발성법, 발음, 스타일까지 저렇게 똑같이 부를 수 있을까 놀라웠다.  


클래식 발성법으로 부르는 대중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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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인은 1949년 <신라의 달밤>을 발표하고 1953년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른 그 시절의 인기가수였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실향민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정작 그는 부산 출생으로 부유한 집 아들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노년의 모습은 콧수염만 기른다면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에 나오는 명탐정 포와로(Poirot)를 연상시키지만 젊을 때 사진을 보면 상당히 미남이었다.

현인은 독특한 창법으로 유명했다. 살랑살랑 부른다고 하기엔 목소리가 두꺼운 편이었고, 설컹설컹 부른다고 하기에는 성의 없이 부른다는 말 같아 어울리지 않는 설명하기 애매한 창법을 지녔다. 일본의 유명한 도쿄예술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기에 학교에서 배운 클래식 발성법을 대중음악에 접목시킨 결과가 아닐까 한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내가 어렸을 때도 이미 흘러간 옛 노래 시간에 나오는 노래였다. 우리 형제들은 이 흘러간 노래를 잘 알고, 따라 부르기까지 했다. 어머니의 대학교 1년 선배 중에 금순이란 분이 있었다. 어머니랑 친했고, 광주 출신으로 손맛이 기가 막혀 파김치, 갓김치 등을 잔뜩 담아 양손에 들고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셨다.

우리는 금순 이모가 오시면 들으라는 듯 ‘금순아 어데로 가고 길을 잃고 헤메였더냐’라고 노래를 불렀다. 참 맘도 좋은 분이었다. 당신을 놀리려 어린아이들이 버릇없이 노래를 하는데 일부러 우리를 불러 그 노래를 시키고 노래 잘한다고 용돈을 주곤 하셨다. 파김치 얻어먹고 용돈까지 받던 시절이었다. 철이 들고 나서도 이 노래는 계속 기억에 남았다. 어린 시절의 장난스러운 추억 때문만은 아니다.


"어머니, 3일 후에 돌아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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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어릴 적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여동생을 찾기 위해 '남북 이산가족찾기' 프로그램에 나간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의 모습이다.

 

나의 외가는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내려온 실향민이다. 온 가족이 감시를 피해 함께 월남하기가 힘들었다. 우선 교육 문제로 14세의 어머니와 11세의 작은외삼촌만 먼저 38선을 넘어와 이미 서울에 살던 어머니의 고모와 서울에서 공부하던 큰외삼촌과 함께 살았다. 약 1년 뒤 외할머니가 모든 살림을 놓고 몸만 달랑 오시고, 한두 달 뒤 할아버지가 집에서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오셨다.

당시에는 38선을 사이에 두고 은밀하게 왕래가 있었고 계속 사람들이 월남해 내려왔기 때문에 북쪽의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나의 외증조할아버지는 외할아버지가 월남하고 얼마 되지 않아 신의주에서 총살당하셨다. 외할아버지는 그 소식을 듣고 열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울기만 했다고 한다. 그 뒤로도 할아버지는 한동안 추석이 되면 먼산만 바라보고 계셨다. 내가 어렸을 때도 매년 친가에서는 성묘도 가고 떠들썩했지만, 외가는 늘 조용히 지나갔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잠시 피신한다는 생각으로 월남했다가 이렇게 영영 헤어지게 되었다. 함경도 출신의 재미교포 의사인 정동규 박사가 어머니께 “3일 후에 돌아오겠다”고 하고 월남했다가 결국 30년 후인 1983년 북한을 방문해 이미 4년 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 산소를 찾은 이야기를 자전적 수필로 써서 1989년 『The Three Day Promise(3일의 약속)』라는 책을 미국에서 출간하기도 했다.

평안도에서는 고모부를 ‘만들어진 아저씨’라는 의미로 ‘작숙(作叔)’이라고 한다. 어머니의 작숙 한 분도 며칠 피신한다는 생각으로 가족을 남겨두고 월남했다가 영영 다시 보지 못했다. 평생 부산에서 혼자 살며 매년 북에 두고 온 자식들과 아내의 생일상을 40여 년 손수 차리다 돌아가셨다. 어려서 현인이 부르는 <굳세어라 금순아>를 들었던 기억이 유난히 많다. 노래를 감상해서 기억에 남는다기보다는 노래가 나옴과 동시에 위의 이야기들이 줄줄이 나왔기 때문이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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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 중 한 장면.

<굳세어라 금순아>는 추운 겨울의 함경남도 흥남의 풍경으로 시작한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나의 아버지는 6.25 때 미 해병대에 배속되어 역대 미국 전투사에서 대대적인 패전(敗戰)으로 손꼽히는 ‘장진호 전투(The Battle of Chosin Reservoir)’에 투입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몇 되지 않는 사람 중 하나였다.

아버지가 전하는 함경남도의 겨울은 무시무시하다. 혹한의 추위에 장진호는 꽝꽝 얼고, 온 세상은 아무리 둘러봐도 하얀 눈밖에 없어 내가 호수 위를 걷는 것인지 땅위를 걷는 것인지도 모르고 이정표도 없는 길을 간다. 눈 위로 보이는 지형지물이라고는 산뿐이다. 다행히 아버지는 그 전날 야간 전투 때 미군의 조명탄이 터지는 곳을 봤기에 계속 그 방향으로 걸어가 살 수 있었다. 흥남도 같은 함경남도이니 눈도 많이 오고 무척 추운 곳이다. 이렇게 추운 날 이 노래의 화자는 왜 흥남부두에 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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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1951년 1.4 후퇴 약 2〜3주 전인 1950년 크리스마스 전후로 이미 대대적으로 미군을 수송해 후방으로 후퇴시키는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때 미군을 실은 배가 떠난 곳이 흥남항이고 이 작전을 흥남 철수작전이라고 부른다. 원래는 군 병력과 물자만 수송하려는 계획이었지만 한국군 장군들이 일반 시민을 데려가지 않는다면 자기들은 걸어서 남으로 내려가겠다고 우겨 피란민 10만여 명을 함께 실어 날랐다.   

아마도 이 사람은 그곳에서 금순과 만나 남으로 가기로 한 것 같다. 둘은 정인이었던 듯하다. 모르긴 해도 흥남항에는 남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아수라장이었을 것이다.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하지만 금순은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피눈물을 흘리며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 흥남항에서 떠나는 배를 보내고 며칠 더 금순을 찾다 홀로 남쪽으로 내려온 모양이다.

금순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가다 공습에 폭격을 맞고 죽은 것일까?

자라면서 들은 여러 이야기들을 생각해 보면 그리 무리한 추측도 아니다. 평양에서 온 어머니 친구 한 분은 1.4 후퇴 때 온 가족이 다른 수많은 피란민들과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다 큰오빠가 누구의 무엇에 맞았는지 갑자기 그 자리에 고꾸라져 죽었다. 그 와중에 가족들은 시신을 들판에 다른 죽어 널브러진 시신들과 함께 버려둔 채 뛰고 또 뛰어 남으로 넘어왔다. 피눈물을 흘리며 시체를 돌아볼 틈도 없이 뛰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인상파 화가 중 한 명인 김원 화백이 그린 <1.4 후퇴>라는 유화가 있다. 숨을 곳이라곤 없는 눈 덮인 허허벌판을 수많은 사람들이 짐을 이고지고 걸어간다. 아마도 이런 곳을 심지어 뛰어가다 가족 중 한 명이 쓰러져 죽었나 보다. 동물 다큐멘터리에서 수백 마리는 됨직한 얼룩말의 무리가 물을 건너다 그 중 몇 마리는 악어의 밥이 되는 것을 본다. 인간의 목숨이 그렇게 사라진 것이다. 어머니 친구는 갓 스물에 대학에 입학해 평생을 함께한 친구들에게조차 일흔 살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하며 “우리 오빠는 까마귀밥이 되었을 거”라고 펑펑 우셨다고 한다.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下 편에서 계속...

 

이철재 미국 변호사, 《뉴욕 오디세이》 《나도 바흐를 즐길 수 있을까》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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