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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이란 헤어짐이 아니었구나 조용필의 <서울 서울 서울>
입력 : 2020.08.24

 라떼는 말이야, 온 국민이 1988년 서울 올림픽만 바라보고 사는 것 같았다. 1981년 9월 30일 늦은 밤, 서독(그 당시 독일은 분단국가로 서독과 동독이 있었다)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가 생중계되었다. 총회의 가장 큰 안건은 대한민국 서울과 일본의 나고야 중 한 도시를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하는 것이었다.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위원장이 나와 “쎄울!”이라고 선포하는 순간 온 대한민국이 들썩 성층권 밖까지 날아올랐다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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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초등학교 때 박정희 대통령이 어디 연설문에서인지 “우리도 한 번 해보자”는 취지로 올림픽을 개최하자는 말을 했다. 당시 우리 집에서 구독하던 소년 동아일보에서 그 기사를 읽고 초등생인 내가 피식 웃었다. 어린 마음에도 우리는 올림픽 따위를 개최할 꿈을 감히 꿀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뒤에도 그 사업이 이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올림픽을 개최 한다는 것이 될 법이나 한 소린가”라고 반신반의하면서도 “한 번 해 보기나 하자”고 했다. 그런데 그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이럴 수가. 우리가 올림픽 개최국이 되다니. 그것도 일본을 꺾고 되다니. 그 뒤로 우리는 이제 선진국이 되는 건 시간문제라고 여겼다.

 바덴바덴의 승전보 이후 7년, 올림픽에 모든 것을 걸었다고 할 만큼 텔레비전이든 라디오든 틀기만 하면 ‘올림픽을 위해’ 질서도 잘 지켜야 하고, 바가지 상혼도 근절해야 하고 택시 합승도 없애야 한다고 떠들었다. 나는 한 술 더 떴다. 아예 우리가 이미 선진국이라고 믿었다.

 자라면서 선생님들로부터 늘 “너희는 행복하다. 나라가 잘살아 행복한 줄 알아라”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거기다 이제 올림픽까지 개최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그렇게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시내버스 문이 버스 안내양들이 열고 닫던 수동식에서 자동식으로 바뀌는 것까지 우리가 선진국이라 가능한 거라며 혼자 뿌듯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쏘아 올린 축배의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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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5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 위해 여권을 신청했다. 당시에는 여행을 가는 사람들은 단수 여권이라고 해서 한 번 여행을 다녀오면 여권이 자동 만료되어 다시 사용할 수 없는 여권을 받았다. 병역 미필 유학생들은 유학 여권이라고, 유학하는 국가 이외에는 여행할 수 없는 여권을 받았다.

 거기에 더해 하루 종일 ‘소양교육’이라는 이름의, 북한 공작원의 포섭에 넘어가지 않는 교육을 받고 그 수료증을 받아 여권 신청 서류와 함께 제출해야 그나마 단수 여권이나 유학 여권이 나왔다. 이제 기억이 희미한데 자유총연맹인가 하는 동숭동에 있던 곳으로 가 점심을 사 먹어가며 하루 종일 영화도 보고, 강의도 들었다.

 그해 8월 16일 드디어 미국 땅에 발을 딛고 학교로 갔다. 그 첫 학기는 나에게 이해하기 힘든 한 학기였다. 교수님들이나 한국을 알고, 학생들은 한국에서 왔다면 그냥 멍한 얼굴이 되기 일쑤였다. 아예 “너는 일본에서 왔니, 중국에서 왔니?”라고 물어보는 사람도 많았다.

 어쩌다 동네의 연세 지긋한 분들은 한국을 알았지만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전쟁 중에 뉴스를 보니 한국은 굉장히 추운 곳인가 보더라” 혹은 “나 매쉬(M.A.S.H, 한국전을 배경으로 미 육군이동병원 군의관들의 이야기를 그린 시트콤) 좋아해” 정도였다. 교양필수 영어작문 시간에 한국에서 1년 미군으로 근무했던 크리스라는 아이를 만났을 때는 반가워 얼싸안을 뻔했다. 한국은 아무도 모르는 ‘너무 조용한’ 아침의 나라였다.

 사정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86년 현대 자동차가 미국에 진출하면서부터였다. 1976년 처음으로 자동차를 만든 현대가 10년 만에 가장 까다롭다는 미국의 안전 테스트를 통과했으니 아무리 외국에서 주요 부품 사다 만든 조립품이라고 해도 뉴스거리였다.

 1987년 무렵 아메리칸 엑스프레스라는 신용카드 회사가 고종이 행차하는 오래된 기록 필름을 사용해 광고를 제작해 미 전역에 방송하기 시작했다. 올림픽을 겨냥한 광고들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동네 초등학교에서 내게 한국과 올림픽에 대한 이야기를 해 달라는 부탁도 들어왔다.

 드디어 올림픽 개막식을 하던 날 한국 학생 몇 명이 나의 아파트에모여 길에서 보이도록 창문에 커다란 태극기를 테이프로 붙이고, 태극기 밑에 형광등을 위로 쏴 조명으로 밝힌 뒤 개막식을 시청했다. 맨 마지막에 코리아나가 <손에 손잡고>를 부를 때는 마시던 캔맥주를 한 손에 들고 서로 얼싸안고 축배를 들었다. 나의 룸메이트 알렉스도 괜히 같이 감동해서 우리와 축배를 들었다. 알렉스가 키우던 개는 우리가 소리를 지르자 따라 짖으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노래로 기억되는 80년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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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림픽 개막 전 우리 가요계에도 올림픽 바람이 불어 올림픽을 겨냥한 노래들이 여럿 나왔다. 코리아나의 <손에 손잡고>도 올림픽 직전 뮤직 비디오로 나왔다. 그밖에 <손에 손잡고>가 나오기 전까지 서울 올림픽의 공식 주제가로 정해져 있던 김연자의 <아침의 나라에서>도 있었고 조용필의 <서울 서울 서울>도 있다.
 그중 <서울 서울 서울>을 즐겨 들었다. 전부 응원가 같은 노래들인데 <서울 서울 서울>은 올림픽을 겨냥한 노래 중에서 드물게 조용해서 좋았다. 다른 노래들이 싫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무리 올림픽이 단군 이래 최고의 사건이라곤 했지만, 1981년부터 7년 동안 눈만 뜨면 올림픽 캠페인에 올림픽 노래니 좀 진력이 나긴 했다. 
 <서울 서울 서울>은 소설가이기도 하고 조용필의 <바람이 전하는 말> <그 겨울의 찻집>의 작사도 한 양인자 씨가 쓴 노랫말과 조용필이 작곡한 멜로디가 좋다. 첫 소절 ‘해 질 무렵 거리에 나가 차를 마시면’ 하는 유럽풍의 분위기가 그때까지 유럽을 동경만 하고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나를 사로잡았다. 후렴구에 ‘서울 서울 서울’ 할 때면 그리운 고향의 푸근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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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노랫말의 화자는 거리로 나가 차를 마시며 옛사랑을 추억한다. ‘이별이란 헤어짐이 아니었구나’ 생각한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이별과 헤어짐은 서로 비슷한 말이 아니었나? 얼마 전 국어사전까지 찾아봤다. 이별은 ‘서로 갈리어 떨어짐’이고 헤어지다는 ‘사귐이나 맺은 정을 끊고 갈라서다’이다. 그렇구나. 몸이 멀리 떨어져 서로 보지 못해도 그 마음의 정이 가시지 않으면 그건 헤어짐이 아니구나.
 커피를 마셔도 생각나고 ‘베고니아 화분이 놓인 우체국 계단’만 봐도 ‘엽서를 쓰던 그녀의 고운 손‘이 떠오른다면 그건 헤어짐이 아닌 것이다. 그는 탄식하며 자신에게 묻는다. ‘이별을 알면서’ 왜 사랑에 빠졌느냐고. 그런데 답이 바로 다음에 나온다. ‘차 한 잔을 함께 마셔도 기쁨에 떨렸네. 내 인생에 영원히 남을 화려한 축제여.’
 아무리 이별이 아프다 해도 이 정도면 사랑에 빠져야 하는 것 아닐까? 이 세상 사람들 중 축제 같은 사랑을 해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 사람은 그 축제 같은 만남과 이별의 아픔을 묵묵히 바라봐 주던 서울에게 영어로 부탁한다. ‘내 사랑 서울이여 영원히 잊지 말아 달라’고. 이 부분이 조용필의 발음도 불분명하고 가사도 뭐를 잊지 말라는 건지 30년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이지만, 이 모든 추억들을 늘 간직하고 자기가 꺼내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말이 아닐까? 뜻은 불분명해도 서울이 아픔까지도 보듬어 주는 것 같다.
 
80년대의 진짜 서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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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생각해 보면 가사가 그 당시 서울 풍경과 잘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 특히 유럽풍이라 내가 좋아했던 ‘해 질 무렵 거리에 나가 차를 마시면’은 말 그대로 유럽풍이지 서울풍이 아니다.
 당시 서울의 차 문화는 모닝커피를 시키면 날달걀 노른자를 커피 안에 떨렁 떨어뜨려 가져다주는 침침한 지하다방이 대부분이었다. 내부에는 열대어 어항이 있고, 담배 찌든 냄새가 배어 있었다. 테이블마다 재떨이가 있었는데 여기에 동전을 넣고 범, 말, 양 등 자기 띠가 그려진 단추를 누르면 돌돌만 작은 종이에 적은 그날의 운세가 재떨이 안에서 굴러 나왔다.
 지상에는 카페라는 것들이 조금씩 생기긴 했다. 동숭동 대학로 등에 가면 식사와 커피를 파는 근사한 카페들이 좀 있었다. 영화제목에서 따온 듯한 8과 1/2이라는 집이 분위기도 좋고, 먹을 것도 종류가 많아 자주 갔다. 나머지는 그냥 다방들이 간판만 바꿔 단 집들도 많았다. 카페들은 여름이면 “(선풍기가 아니라) 냉방 됩니다”라고 문에 써 붙이고 손님을 끌었다. 요즘 연남동 등의 커피 전문점에 가면 내부도 으리으리하고 공원과 맞붙은 테라스에 의자를 놔 진짜 거리에서 차를 마시는 기분을 내며 직접 볶은 커피에 마카롱 한 입 베어 물며 기분을 낼 수 있다. 그때 서울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이 거리’라는 대목도 그렇다. 그 당시 서울 거리는 그리 아름다운 거리가 아니었다. 아파트 빌딩들은 전부 성냥갑처럼 네모나게 생겨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거리를 지나면 늘 최루탄의 매캐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고등학생 시절 어느 날 오후에 내가 마당으로 나가 석간신문을 가지고 들어왔는데 갑자기 나를 포함 온 식구들이 재채기를 시작했다. 우리 집에서 버스타고 두세 정거장은 가야 하는 한 대학교에서 시위를 해 그 최루탄 가루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신문에 붙은 것이었다.
 게다가 젊은이들이 가방이라도 들고 길을 걸어가면 전경들이 불러 세워 남의 가방을 마음대로 열어 뒤져보고야 보내 줬다. 우연히 시위 현장 가까이에 있으면 지나가던 행인을 모두 시위가 끝날 때까지 전경버스 안에 가둬 놨다 보내줬다. 얼마 전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인도 정부가 국민들에게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말라고 하고 나다니는 사람들을 경찰이 붙잡아 회초리로 매질을 하는 것을 보며 웃었다. 1980년대 서울 거리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1988년 나는 어린 나이에 집 떠나 2~3년 되어 서울이 그립고 올림픽을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컸다. 노래에 배어나는 고향의 포근함에 가사고 뭐고 따질 틈 없이 확 빠져들었나 보다. 현실이 어떻든 서울은 언제나 내 맘속에 따스한 고향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바야흐로 '조용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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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필은 대한민국의 슈퍼스타이다. 1960년대 말부터 미8군 무대에서 주로 록 음악을 하던 그가 처음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것은 1976년에 나온 <돌아와요 부산항에>이었다. 록 가수가 트롯을 불러 유명해 진 것이다. 이 노래는 초등학생들이 학교에서까지 부르다 선생님께 혼이 날 정도로 대 유행을 했다.
 당시 한국을 몇 번 방문했던 프랑스의 팝 오케스트라 폴 모리아(Paul Mauriat) 악단이 편곡해 자신들의 앨범에도 삽입했다. 원래 이 노래는 <돌아와요 충무항에>로 다른 가수가 불렀다 잊힌 곡이었다. 작곡가가 원래 자신이 의도했던 대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고쳐 조용필에게 줬다. 이 또한 실패로 돌아갔으나, 몇 년 뒤 조용필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약간 빠른 템포로 편곡해 녹음한 것이 대 히트를 한 것이다.
 놀랍게도 나는 이 시절 조용필의 얼굴을 텔레비전에서 본 기억이 없다. 노래가 히트하고 얼마 되지 않아 그가 대마초 사건에 휘말리면서 노래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가수가 사라지니 그의 노래까지 자취를 감췄다. 참, 이 노래도 사연이 기구하다. 내가 어렸을 때 잠깐 반짝 했던 노래이니 잊을 법도 한데 아직도 이 노래 2절까지 또렷이 기억한다. 트롯의 또 다른 전설인 조미미가 이 노래를 취입해 명맥이 이어지며 계속 귀에 익히게 되었던 것이다.
 1979년 대마초 파동을 겪은 지 2년쯤 지나 해금이 되고 그는 가요계로 복귀했다. 복귀도 그냥 복귀가 아니라 뇌성벽력을 동반하고 우렁차게 복귀했다. 그해 발표한 공식 1집 앨범이 국내 가요 사상 최초로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조용필이 절규하듯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고 했는가’라고 묻는 자작곡 <창밖의 여자>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조용필은 내친김에 <창밖의 여자>를 들고 1980년 제2회 TBC 세계가요제에도 출전했다. 일본의 세계적인 여성 듀엣 핑크레이디가 게스트로 출연하여 실은 거의 음치에 가깝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모잠비크의 슈디(Shoody)가 라는 노래로 대상을 차지한 이 대회에서 조용필은 금상을 차지했다. 바야흐로 조용필의 시대가 열렸다.
 
인생의 40여 년을 함께한 조용필의 노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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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쓰며 조용필의 정규 앨범 목록을 찾아 쭉 훑어보니 특별히 기억에 남는 곡만 꼽아도 ‘특별히’라는 말이 무색하게 많다. ‘거의 다’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이번에는 내가 좋아하고 즐겨 부르는 곡들을 꼽아보았다. <들꽃> <친구여> <허공> <창밖의 여자>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등 그것도 일일이 꼽기 힘들다.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는 좋아하기 시작한데 나만의 작은 에피소드가 있어 더 기억난다. 방위병 근무할 때였다. 휴가라 하루 집에서 늦잠 좀 자려고 했는데 새벽 5시에 부대에 비상이 걸렸다고 당장 오라고 전화가 왔다. 그때는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니 온 집안에 전화가 울리고 식구들이 모두 잠에서 깼다. 나는 후닥닥 준비를 마치고 뛰어나가고, 어머니는 우유라도 마시고 가라며 쫓아 나오셨다.
 우리 집에서 부대까지는 버스를 타고 나가 4호선 지하철을 타고 3호선으로 갈아탄 뒤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마음이 급해 택시를 타고 가까운 3호선 역으로 갔다. 남산 3호 터널을 지날 무렵 기사 아저씨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나왔다. 그 전에는 이 노래에 관심이 없었는데 그날따라 가사가 귀에 들어왔다. 사랑 노래인데 애절하거나 슬프지 않고 담담한 행복과 진심이 묻어나온다.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숨결이 느껴진 곳에 내 마음 머물게 하여 주오….’
 얼핏 들으면 스토커 같은 말을 어쩌면 저렇게 아름답게 부를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장가로 들려줘도 좋을 듯 했다. ‘조용필 노래 참 잘한다’는 누구나 다 아는 하나마나한 생각에 잠기며 끝까지 들었다. 노래가 끝날 무렵 새벽에 집에서 뛰쳐나와 택시타고 가느라 급하기만 하던 내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 뒤로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 진다. 
 조용필이 부른 동요 <따오기>도 좋아한다. 미국으로 유학 갈 때 친구가 조용필의 4집 앨범 《못 찾겠다 꾀꼬리》 카세트테이프를 선물로 줬다. 기숙사에 살며 한동안 매일 밤, 소니 워크맨에 그 테이프를 꼽고 들으며 잠이 들었다. 그 안에 <따오기>가 들어 있었다. 그 노래가 나올 때면 집 생각이 그렇게 날 수가 없었다.
 <촛불>은 흑백시대 마지막 드라마라 할 수 있는 정윤희와 한진희 주연의 TBC 드라마 《축복》의 주제가였다. 노래도 좋았지만 드라마가 사연이 많아 더 기억에 남는다. 자고 깨보니 TBC 방송국이 언론통폐합으로 없어져서 1980년 9월 TBC에서 시작한 드라마가 12월 한 달은 KBS2 TV에서 방송하고 막을 내렸다. TBC가 사라진데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고자 그랬는지 컬러 방송을 전격적으로 시작해서 드라마 시작 전 주제가가 나오는 《축복》의 타이틀백이 드라마 종영할 무렵 잠시 컬러가 되기도 했다.
 
박강성 적우의 버전, 그리고 임영웅의 <그 겨울의 찻집>
 다른 가수들이 조용필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가끔 듣는데 나는 음식도 음악도 오리지널을 좋아하는 탓인지 조용필의 원곡 버전이 좋다. 휘트니 휴스턴이 불러 대히트 한 ‘I Will Always Love You’도 돌리 파튼의 오리지널 버전이 좋고,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도 박강성, 적우 등 노래 좀 한다하는 가수들이 부르는 것을 들어봤지만, 조용필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차분히 부르는 것이 제일 가슴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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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외로 임영웅이 부른 <그 겨울의 찻집>은 아주 좋아한다. 노래가 한창 클라이맥스로 치달을 때 다른 사람이 숨 쉬고 두 번에 부를 대목을 한 번에 붙여 긴 호흡으로 부르는 것이 임영웅의 장기이다. 이 노래도 그렇게 부르는데 처음으로 ’아, 이건 그냥 조용필과 상관없는 다른 노래라고 생각하고 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초등학교 때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따라 부르던 아이가 사춘기를 지나 유학생이 되고, 직장인이 되고 어느덧 아재가 된 오늘까지 조용필의 노래를 듣는다. 이 나이에 <서울 서울 서울>을 들으면 ‘88 올림픽, 그날의 감격이 되살아오고, 우리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 역사가 보인다. ‘못 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하고 신나게 부르던 노래에선 이제 인생이 보인다.
 내 인생의 40여 년을 함께한 조용필의 노래들. 그들은 이미 나의 오랜 친구가 되었다. 초등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 위대한 가수가 스타가 되고 전설이 되어가는 것을 처음부터 함께 한다는 것은 인생을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현재 초등학생도 내 나이가 되었을 때 그런 가수 하나쯤 갖게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 가수의 노래를 다시 들으며 ‘우리는 코로나도 잘 극복하고 참 멀리 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길 바란다.
이철재 미국 변호사, 《뉴욕 오디세이》 《나도 바흐를 즐길 수 있을까》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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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최은화   ( 2020-09-24 )    수정   삭제 찬성 : 4 반대 : 0
언제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저는 그때.. 초등학교 1학년이였나.. 그랬는데 그래도 잠실경기장에 관람했던 기억이 나네요. ㅎㅎ 노래 관련된 글도 너무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신영자   ( 2020-08-27 )    수정   삭제 찬성 : 12 반대 : 0
글에 빠쪄 읽었습니다
 동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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