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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밑 정동 길에 눈 덮인 교회당 이문세 '광화문 연가'
입력 : 2020.07.21
ⓒ조선DB

내가 <광화문 연가>라는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노래와 내 어린 시절의 끈끈한 인연 때문이다. 다른 일에 심취해 있다가도 이 노래가 들리면 스르르 시간 여행을 떠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던 2020년 3월 나는 천신만고 끝에 미국에서 서울로 날아 왔다. 집에 갇혀 무료해지던 차 사진 앨범들을 하나하나 꺼내 보기 시작했다. 거기서 나는 중학교 일학년 때 담임 선생님과 나랑 가장 친했던 친구 정욱이와 덕수궁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나는 덕수궁 근처 중구 정동에 있던 배재 중학교를 다녔다. 그 당시 우리는 가끔 자연보호운동이라는 이름하에 학교 밖으로 나가 주변 청소를 했다. 어느 가을날의 토요일 오후 우리 반 전체가 덕수궁으로 가 잠시 형식적으로 쓰레기를 주운 뒤 친한 친구들과 모여 선생님과 사진을 찍었다. 주변에 은행나무는 노랗게 물들어있고, 날이 흐려 을씨년스런 분위기에 부츠를 신은 선생님과 나와 정욱이가 벤치에 앉아 있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언제나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그 삼년의 기억이 우연히 찾은 한 장의 오래된 사진 속에 고스란히 프리즈프레임 되어 있었다. 사진을 보는 순간 내 머릿속에서 <광화문 연가>가 흐르고 사진이 살아 움직이고, 나는 시간 여행을 떠났다.

 

시간 여행으로 떠나는 정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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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DB

요즘처럼 볼 것도, 할 것도 많은 세상에도 덕수궁 돌담길은 종종 데이트 코스로 언급된다. 내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길거리에서 구워 파는 오징어 다리 사 먹으며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것은 연인들의 필수 코스였다. 가을에는 땅에 떨어진 은행이 깨지며 나는 악취가 좀 문제긴 했지만 연인들에게는 그런 것이 별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나는 새까만 교복 입고 등교하고, 쓰레기 줍기 위해 그 길을 걸어 다녔다. 그래도 언젠가는 연인과 데이트를 하러 오리라 다짐을 했다.

연인과 걸으며 데이트를 한 기억은 없고, 한 일년 전쯤 친한 친구와 광화문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그 일대를 걸어서 돌았다. 조선 시대부터 있었음직한 꼬불꼬불한 광화문 뒷길에서 평안도식 돼지국밥을 먹고 광화문로로 나오니 면세점이 있다. 그 면세점 자리에 예전에 성룡의 영화를 재미있게 봤던 국제극장이 있었다. 면세점 옆에는 세종문화회관이 보인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그곳에는 서울시민회관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 딱 한 번 가본 기억이 난다. 나의 초등학교가 그곳에서 교내 학예회를 했다. 형이 마림바 독주로 <보리밭>을 연주했다. 어려서 형과 참 많이 다투었는데 그날만큼은 형이 위대해 보였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저녁 인기 가수들이 모여 공연을 하던 도중 시민회관에 화재가 났다는 뉴스 속보가 나왔다. 불행히도 그날 시민회관은 역사 속으로, 불길 속으로 영영 사라졌다.

사상자도 꽤 많이 낸 이 사고의 원인은 합선이었다. 몇 년 후 시민회관이 사라진 자리에 세종문화회관이 들어섰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이다. 학교에서 세종문화회관으로 견학을 가는데 걸어서 다녀왔다. 견학 안내를 해주던 분이 세종문화회관 무대를 가리는 막은 2년간 손으로 수를 놓아서 만들었다고 설명해 주던 기억이 난다. 한국에는 기술이 부족해서 그걸 일본에서 주문 제작해 가져왔다고 은근히 자랑을 하는데 어린 내 마음이 참 좋지 않았다.

 

언덕 밑 조그만 교회당, 정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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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을 쭉 걸어 덕수궁까지 오면 정동길이다. 정동 주변은 구한말 서구 문물의 집합소였고, 정치, 문화, 외교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여러 역사적인 건물들이 많다.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이자 사교 공간이었던 손탁 호텔, 러시아 공사관, 성공회 건물 등 구한말의 건물들이 모두 정동에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정동교회이다.

덕수궁 대한문에서 돌담길을 따라 걸어 들어 가다보면 길이 세 갈래로 갈린다. 그 갈린 곳에 '언덕 밑 정동 길에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정동교회가 있다. <광화문 연가>의 작사가이기도 한 이영훈은 정동교회라는 말을 쓰지 않았지만, 정동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서 이 대목에서 정동교회 이외에 떠오르는 것이 없다.

지금도 정동교회 벧엘 예배당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정동교회의 오리지널 건물은 아담하고 아름다운 교회이다. 1897년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진 서양식 개신교 건물로 국가사적이다. 그 당시에는 교인이 늘어 오백 명을 수용하는 대형 교회로 지었는데 오늘날 나는 아담한 교회라고 부르고, 이영훈은 ‘조그만 교회당’이라고 부르니 우리가 너무 요즘의 척도로 이야기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함께한 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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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모교 배재중고등학교는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에 세운 학교이다. 내가 다닐 때도 일주일에 한번 ‘성경’이라는 교과 시간이 있었고, 매주 목요일 예배를 드리는 ‘채플’ 시간이라는 것이 있었다. 채플 시간은 학년별로 진행했는데 운동장에 전체 학년이 모여 줄을 서고 각 담임 선생님의 인도에 따라 목요일에만 열리는 운동장 옆 교문을 통해 정동길로 나가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는 정동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왔다.

배재뿐 아니라 이화여중고, 예원학교 등이 같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줄지어 걸어가다 먼발치에서라도 여학생들이 예배드리고 가는 모습을 보면 남자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고 선생님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통제를 하느라 소동이 벌여졌다.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이미 백년이 되어오는 쇠락한 건물이라 채플 시간에 입장을 하려면 목사님이 강대상에 서서 마이크에 대고 “살살 걸어라”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하셨다. 오래된 나무 마루가 언제 꺼질지 몰랐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중학교 이학년이 되던 해 벧엘 예배당을 폐쇄하고 바로 옆에 새 건물을 지었다.

교회 일반 신도들은 일요일마다 어디 가서 예배를 드렸는지 모르겠지만, 그 후로 배재의 채플 시간은 한동안 없었다. 그리고 내가 3학년 졸업하기 직전 새 예배당이 완공되고, 처음으로 새 예배당으로 들어간 것이 중3 졸업 예배였다.

정동은 우리 근대사뿐만 아니라 현대사의 한 장도 지켜보았다. 내가 중학교 이학년이었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됐다. 삼학년이 되는 1980년에도 재판이 계속되었다. 현재 배재중고등학교는 고덕동으로 이사를 갔다. 배재 옛 건물들은 모두 철거하고 그 자리에 외국계 금융사가 들어와 있는데 1916년에 완공해 아펜젤러 홀이라고도 불리던 동관 건물은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되어 박물관이 되었다. 

배재는 동관, 서관, 주시경학관, 우남학관 등의 건물에 학년별로 교실들이 산재해 있었다. 배재중학교 3학년 교실은 동관에 있었다. 나의 학급이었던 3학년 4반 창문 밖으로 지금은 시립미술관이 된 대법원 건물이 아무 장애물 없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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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 신문기사(조선일보 1979. 10. 27일자). 조선DB

어느 날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 시해범으로서 대법원으로 들어서는 것을 봤다. 조회 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창밖을 함부로 내다보지 말라고 경고를 한 날이었다. 중3이었으니 그 이유를 모두 알고 있었다. 선생님이 내다보지 말라고 자리에 가만 앉아있을 중3이 아니다. 우리는 쉬는 시간마다 창문에 모여 밖을 내다보고, 수업 중에도 슬쩍슬쩍 커다란 창문 밖을 내다봤다. 복도를 지나가던 다른 선생님들도 들어와 창문에 있는 아이들을 야단치고 자리로 가서 앉으라고 고함을 치셨지만, 선생님이 나가면 다시 우르르 창문으로 몰려갔다.

그날은 대법원 문도 굳게 잠겨 있었다. 김재규를 태운 호송버스 한 대가 삼엄한 경비 속에 기자 한명 얼씬 거리지 않는 거리를 지나 대법원 문 앞에 도착하고 문이 살짝 열리더니 차가 들어갔다. 어느 아이들은 포승줄에 묶인 김재규가 버스에서 내리는 것을 봤다고도 했는데 나는 그 모습을 본 기억은 없다.

요즘 세대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정동은 우리나라 방송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정동교회에서 정동길을 따라 이화여중고를 지나 쭉 걸어가면 새문안로 거의 다 가 MBC 문화방송 사옥이 있었다. 그 뒤에 문화체육관이 있어 그곳에서 그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스포츠인 복싱 경기가 매주 열리고 문화방송이 이를 중계했다. 그 유명한 장학퀴즈 공개방송도 매주 토요일에 문화방송 사옥에서 녹화를 했다. 친구와 함께 가서 방청을 했던 적이 있다.

문화방송이 있던 새문안로 쪽은 내가 잘 가지 않던 길이라 기억이 흐리다. 하지만 내가 매일 하굣길에 버스를 타러 가려고 건너다니던 서소문로 쪽은 지금도 눈에 훤하다. 큰길로 나가 길을 건너면 현 JTBC의 전신인 TBC 동양방송국 사옥이 있었다. 당시 배우들은 각기 다른 방송국에 전속으로 있었는데, 장안의 ‘핫한’ 여배우들은 모두 TBC 소속이었다. 친구들은 매일 학교에 오면 앉아서 어제 배우 누구를 봤다, 가수 누구를 봤다 진위를 알 수 없는 주장들을 늘어놓곤 했다.

나도 한 가지 주장을 하자면 차를 타고 학교 앞을 훅 지나가던 당시 최고 슈퍼스타 혜은이를 본 기억이 있다. 타고 가던 차가 현대 포니였던 기억도 난다. TBC-FM에서 오후 5시부터 《팝스 다이얼》이라는 프로를 진행하던 가수 양희은은 몇 번 봤다. 내가 집에 가려고 방송국 앞을 지나던 시간이 그녀가 방송 준비하러 도착하던 시간과 엇비슷했던 것 같다. 청바지에 손지갑 하나 들고 택시에서 내리던 그녀의 모습을 기억한다.

 

전차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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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뒷골목에서 국밥 같이 먹은 친구에게 중학교 시절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며 서소문로까지 걸어 나와 헤어졌다.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집으로 가려고 시청역으로 들어갔다가 오랜만에 들어간 역이 너무나 깨끗하고 멋있어서 놀랐다. 그간 대대적인 수리를 한 것 같았다.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가 총탄에 맞아 돌아가시던 날이었다. 엄마, 아빠 손잡고 그날 개통한 1호선 지하철을 타보러 갔다. 내 기억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전차가 사라진 뒤 서울에 대중교통 수단이라고는 버스 밖에 없었는데 ‘선진국’에나 있다는 땅속으로 가는 기차가 생겼다니 우리 가족도 한 번 타보려 나들이 삼아 나갔다.

구한말부터 있던 전차가 운행을 완전히 중지하기 며칠 전 부모님이 우리를 데리고 나가 전차를 태워주셨다. 전차표를 샀는데 어린 내가 전차표를 들고 있겠다고 우겼다. 아버지가 쥐어주신 표를 들고 있다 전차를 타러 뛰어서 길을 건너면서 속으로 ‘어,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표를 스르르 놓아버렸다. 결국 우리 가족은 전차에서 현금으로 차비를 다시 지불해야 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서울의 전차가 사라진 게 언제인지 찾아봤더니 내가 만 세 살 6개월 때의 일이었다. 어린나이에 얼마나 무안하고 죄송했으면 그걸 평생 잊지 않고 있다. 내 딴에는 그게 트라우마였나 보다. 지하철을 처음 타던 날도 마음속으로 ‘오늘은 결코 표를 잃어버리지 않겠다’ 다짐을 했다. 당시 지하철 1호선은 서울역, 시청, 종로를 거쳐 청량리까지 가는 열 개 정도의 역이 다였다. 전동차 내부 냉방은 생각도 못했고 더우면 창문을 열 수 있었다. 우리 가족도 8월의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창문을 열고 종각에서 서울역까지 타고 갔다.

사진 한 장 발견하면 <광화문 연가>가 머릿속에 흐르고, 그 노래 한 번 들으면 이 모든 것이 보인다. 내가 이 노래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영훈 그리고 이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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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말이 있다. 노래를 듣다보면 작곡가가 가수를 잘 만난 건지, 가수가 작곡가를 잘 만난 건지 생각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이영훈과 이문세가 그런 경우이다. 이문세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가수도 아니고, 별밤지기도 아니다. 입담 좋은 방송 리포터이다. 사회자들이 늘 “가수 이문세 씨 나오셨다”고 소개를 하는데 노래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리포트를 듣다보면 ‘목소리가 좋아 노래를 하면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을 늘 하긴 했다.

1984년 버스를 타고 반포대교를 건너 강남 고속터미널 방향으로 좌회전을 하려 신호를 기다리는데 기사 아저씨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이문세의 노래로 듣습니다”라는 멘트가 나왔다.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이문세의 노래였다. 제목은 <파랑새>. 나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이문세 팬들에게 상당히 죄송한 말이지만 처음 느낌은 ‘어, 말하는 목소리가 노래하는 목소리보다 훨씬 좋네’였다.

나는 이문세와 이영훈 황금 콤비가 탄생하면서 나온 일련의 명곡들을 모두 좋아한다. 그래도 여전히 이문세가 노래를 잘 하는 가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특히 좋아하는 <광화문 연가>를 여러 가수들의 버전으로 아무리 들어도 이문세만큼 이영훈의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없다.

노래 실력이 이문세보다 낫다는 생각이 드는 가수들이 불러도 그 버전보다 이문세의 버전이 좋다. 한 가수가 잘 부르는 것 같아 한동안 듣다가도 결국은 이문세에게로 돌아간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처럼 눈 덮인 어느 겨울 날 뭔가 사연을 가슴에 품고 광화문 일대를 배회하던 한 사람의 회한과 그리움이 꺽꺽거리는 것 같은 이문세의 목소리와 절묘하게 어울린다. 이런 것이 케미스트리라는 것인가? 이영훈과 이문세는 전생에 어떤 관계여서 이생에 서로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사이로 태어났을까?

<광화문 연가>의 가사를 듣다보면 두 가지 의문이 든다. ‘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의 이곳은 과연 어디일까? 그냥 광화문 네거리 전체를 가리키는 말일까? 아니면 특별한 사연을 간직한 어느 한 장소를 가리키는 말일까? 또 하나 의문이 있다. 가사 내용이 눈 내리는 겨울의 광화문이니 꽃향기가 그리운 건 이해하겠는데 왜 꽃향기가 그리울 때 하필 광화문으로 갔을까? 5월이 되면 화분에 심은 꽃들이 광화문로 인도에 늘어서 있긴 하지만, 나는 광화문 거리를 꽃향기가 그리워지면 찾아갈 곳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꽃향기보다는 자동차소음, 매연, 인파, 크리스마스 장식 등이 생각난다.

 

오월의 꽃향기 같은,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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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나 혼자 맘대로 상상하는 이야기는 이렇다. 이영훈 자신 혹은 그에게 이 가사의 영감을 준 그 누군가는 한 여인을 사랑했다. 그는 그 여인의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릴 때마다 나는 향긋한 냄새를 맡으며 속으로 ‘아, 이 냄새. 오월의 꽃향기 같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정동교회를 지나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광화문 네거리 어딘가에 있는 빵을 맛있게 구워 파는 곳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가는 시간을 아쉬워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여인은 그를 떠났다. 아니 세상을 떠났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 그는 눈 내리는 날 광화문 네거리를 찾았다. 문득 그녀가 그리워졌기 때문이다. 오월의 꽃향기 같던 그녀의 체취가 그리웠다. 광화문은 하얀 겨울이 덮여있고, 그의 마음도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이다. 그래도 광화문에는 아직 그녀의 향기가 배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주변은 알아볼 수 없이 변했다. 교회와 돌담길을 지나 빵을 구워 파는 집에 앉아 빵 냄새를 맡으며 커피를 마시지만, 그녀의 꽃내음은 온데간데없다.

그는 생각한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간다. 그녀는 조금 일찍 떠났을 뿐이다.’ 이렇게 맘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불러본다. 글쎄. <옛사랑> 가사에도 눈 내린 광화문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면 광화문 거리에 무슨 사연이 있긴 한 것 같은데,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생전의 이영훈이 이문세에게 뒷이야기를 귀띔이라도 해줬다면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덕수궁 근처는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 모교 건물들은 동관 하나 남고 가루가 되었다. 대법원은 이사를 갔다. 선생님은 돌아가셨고, 정욱이는 대학 이후로 연락이 끊겼다. 그래도 덕수궁 돌담길에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이 아직 남아 있다. 하지만 그저 연인이란 이름이 같을 뿐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한 쌍의 연인들의 뒤를 이어 다른 사람 둘이 연인이란 이름으로 지나가는 것이다. 우리 모두 세월 따라 떠나가는 것이다.

아직도 서 있는 정동교회와 덕수궁의 돌담이 나의 마음을 위로해 주지만 언젠가 그들도 사라질지 모른다. 그래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만큼은 친구와 돼지국밥 먹고 걸을 때마다 그 자리에 있어 줬으면.

 

 

 

이철재 미국 변호사, 《뉴욕 오디세이》 《나도 바흐를 즐길 수 있을까》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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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서영혜   ( 2020-07-26 )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0
참 좋은 글을 읽게 해주시네요. 동 시대를 지내온 한 사람으로서 그 때의 추억이 떠오르는 순간입니다. 지금도 그 노래를 들으면 아련한 추억속에 젖곤 합니다.
  박종준   ( 2020-07-26 )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0
저도 서정적인 광화문연가를 참 좋아하여 지방에 사는대도 광화문과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보고자 일부러 가본 적이 있는데 님의 부연설명을 들으니 너무나 공감되고 곡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는 듯하여 마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손병남   ( 2020-07-25 )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0
나 역시 배재고등학교를 79년 2월에 졸업한지라 필자의 시간여행에 많은 부분 공감합니다. 이제는 환갑을 맞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없이 적적한 공간에서 엣 추억에 물들때,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를 듣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축축해지지요. 그 시절로 단 하루라도 돌아갛 수 있다면 참 좋을거 같습니다
  이화인   ( 2020-07-25 )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0
이화여중은 평준화가 도입되면서 1971년 사라지고 이화여고만이 남게 되었죠. 이화여고는 제가 다니던 1975년경 이미 교내에 있는 강당에서 예배를 보고있었으니 정동교회로 예배보러 다닌 기억은 전무합니다. 그저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기억의 오류라 생각됩니다 ㅎㅎㅎ
  기억 속   ( 2020-07-24 )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0
저는 한해 먼저 태어났고 중동중학교를 다녔고 79년 사건과 조선일보 1면도 기억합니다. 그때 광화문에 음악사가 많아서 레코드 판이며 카세트 사러 다녔던 기억이네요. 국제극장, 금강제화, 그리고 고입재수학원이 세종문화회관 뒤쪽에 많았죠.. 정동에는 유난히 접골원이 맣았구요
 
  허무당   ( 2020-07-23 )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0
나는 당신보다 몇 년 위인 듯 한데 서울고등학교를 나왔소.....당신보다 더 진한 기억들이 평생 뇌리를 떠나지 않지요. 그곳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대동소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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