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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정지, 절대 시간, 절대 공간은 없다上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1879.3.14~1955.4.18.)
입력 : 2020.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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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신로아

 인류는 시간, 공간, 중력, 빛에 대해 수천 년을 생각해 왔고, 뉴턴의 시대에 이르러 결론이 내려졌다. 시간은 절대적이고, 공간은 영원불변하며, 중력은 만유인력의 결과이고, 빛은 직진하는 파동이다. 이러한 철학들은 19세기까지 천재 과학자들이 수없이 검토하고 검증한 사실이었고, 일상의 경험과도 일치했기 때문에 의심할 것 없는 진리로 통했다.

 그러나 1905년, 아인슈타인이 과학계에 등장하면서 이전까지의 진리들은 모두 신기루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독일 울름(Ulm)에서 태어난 아인슈타인은 또래들보다 말을 아주 늦게 익혔기 때문에 가족들은 그를 지진아라고 생각했다. 아버지 헤르만(Hermann Einstein, 1847~1902)은 유능하지 못한 사업가였다. 그러나 처가가 부자였던 덕에 중산층의 생활을 유지하며 아들 알베르트를 뮌헨 중심부에 위치한 루이트폴트 김나지움(Luitpold Gymnasium)에 보냈다. 알베르트는 복종과 규율을 강조하는 독일 군국주의식 학교를 싫어했다. 당연히 교사들도 그를 좋게 보지 않았고, 어떤 교사는 ‘무엇을 해도 성공하지 못할 아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15살이 되던 해인 1894년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다. 가족은 이탈리아 파비아로 이사했지만, 알베르트는 학업을 마치기 위해 뮌헨의 친척집에 머물렀다. 그러나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학교를 자퇴해 버렸다.

 이듬해 가을 알베르트는 스위스 연방 취리히 폴리테크닉 대학(Federal Polytechnic School in Zurich)의 ‘수학과 물리 전공’ 교사를 양성하는 학과에 합격했다. 단, 아라우(Aarau)의 주립학교에서 1년 동안 중등교육을 받아야 하는 조건부 합격이었다.

 아라우의 주립학교는 페스탈로치(Johann Heinrich Pestalozzi, 1746~1827)의 철학을 실천하는 학교로, 아이들의 개성을 존중하고 저마다의 자질을 육성하는 것에 교육목표를 두고 있었다. 알베르트는 이곳에서 배움의 행복을 느꼈고, 자유로운 사고의 싹을 틔웠다. 권위주의와 군국주의를 혐오하던 그는 17살이 되었을 때 독일 국적을 버렸다.(그리고 몇 년 동안 무국적자로 지냈다.)

 폴리테크닉 대학에서도 교수들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학교에서 낡은 학문을 가르친다고 불평했고, 교수의 지도 방식을 따르지 않을 때도 많았다.
 1900년 7월 졸업 가능한 학점을 턱걸이하여 대학을 졸업한 아인슈타인은 교직 자리를 구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추천서를 써 주는 교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별 수 없이 개인 교습과 사설학원 강사를 전전했다.
 1901년 2월, 22세의 아이슈타인은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다. 스위스 법에 따라 군 입대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평발, 발한증, 정맥류 등의 사유로 ‘입대 자격 없음’ 판정을 받았다.

 아인슈타인은 대학 동창인 세르비아 출신의 밀레바 마리치(Mileva Marić, 1875~1948)와 연인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가족, 특히 그의 어머니 파울린(Pauline Koch, 1858~1920)이 마리치와의 결혼을 완강히 반대했다.

 취직도 결혼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 괴로워하던 아인슈타인에게 대학 친구인 그로스만(Grossmann, 1878~1936)이 편지를 보내왔다. 베른 특허국에 자리가 날 것 같으니 지원하라는 내용이었다. 아인슈타인은 1902년 6월 베른 특허국의 3급 기술직 사원으로 채용되었다.

 직장이 생긴 아인슈타인은 1903년 1월 밀레바 마리치와 작은 결혼식을 올렸다. 아인슈타인의 가족은 아무도 결혼식에 오지 않았다. 이듬해 아인슈타인 부부는 아들 한스(Hans)를 낳았다.(혼전에 낳은 딸은 입양을 보냈는데, 어릴 적에 성홍열에 걸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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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버트 & 밀레바 아인슈타인(Albert and Mileva Einstein, 1912) ]
그림 출처: ETH Zürich, e-pics

 1905년 아인슈타인은 5편의 논문을 ≪물리학 연보≫에 보냈다. 논문은 하나같이 과학자들에게 충격을 안겨주는 놀라운 내용이었기 때문에 훗날 1905년은 기적의 해로 불리게 된다. 1905년 3월 논문은 광양자에 관한 것이었고, 4월 논문은 분자 크기에 관한 것이었고, 5월 논문은 브라운 운동에 관한 것이었고, 6월 논문은 특수 상대성 이론에 관한 것이었으며, 9월 논문은 에너지와 질량의 변환 공식 E=mC²에 관한 것이었다.

【 3월 논문 】
 ≪빛의 발생과 변형에 관한 발견적 관점, Über einen die Erzeugung und Verwandlung des Lichts betreffenden heuristischen Gesichtspunkt≫

 아인슈타인은 빛이 입자처럼 행동한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광양자(light quantum)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당시 빛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파동으로 알려져 있었다. 빛은 마루와 골을 가진 전자기파의 형태로 연속적으로 퍼져나간다. 빛은 전자기 복사(輻射, radiation)라고도 불렸다. 복사(輻射)는 바퀴살처럼 사방으로 쏘아져 나간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3월 논문에서 ‘빛이 한 점에서 퍼질 때, 에너지는 연속적인 것이 아니다. 빛 에너지는 유한한 개수의 에너지 양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양자는 분할되지 않고 오직 전체로서만 흡수되거나 생성될 수 있다.’라고 서술했다.

 양자(量子, Quantum)는 셀 수 있는 덩어리의 형태를 의미한다. 빵 가게에서 빵을 판매할 때 한 덩어리나 두 덩어리씩은 판매하지만, 1/2이나 1/3 조각으로는 팔지 않는 것처럼 에너지의 흡수와 방출도 그와 같은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아인슈타인은 광전 효과에 주목하면서 빛의 속성을 광양자(light quantum)로 설명했다. ‘광전 효과’는 금속판에 높은 에너지를 가진 빛을 쪼였을 때 전자가 튀어나오는 현상을 말한다. 높은 에너지를 가진 빛은 진동수가 높은(파장이 짧은) 파란색 광선이다.

 진동수가 낮은(파장이 긴) 붉은 빛은 많은 양을 쪼여도 광전 효과를 일으키지 못한다. 광전 효과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빛의 진동수를 ‘문턱 진동수(threshold frequency)’라고 한다. 문턱 진동수는 금속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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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인슈타인은 광양자 한 개가 전자 한 개를 당구공처럼 때려서 방출시키는 현상이 광전 효과인 것으로 해석했다. 아인슈타인의 ‘광양자(light quantum)’는 십여 년 후 ‘광자(Photon)’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 4월 논문 】
 ≪분자의 차원에 관한 새로운 규정, Eine neue Bestimmung der Moleküldimensionen≫

 4월 논문은 아인슈타인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용액 속에 용해된 물질의 확산 비율을 이용하여 물질의 분자 크기를 알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이 논문을 토대로 5월 논문을 썼다.

【5월 논문】
 ≪열 분자 운동 이론이 필요한, 정지 상태의 액체 속에 떠 있는 작은 부유 입자들의 운동에 관하여, Über die von der molekularkinetischen Theorie der Wärme geforderte Bewegung von in ruhenden Flüssigkeiten suspendierten Teilc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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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가루와 같은 입자들이 액체 위에서 불규칙하게 표류하는 운동을 ‘브라운 운동(Brownian motion)’이라고 한다. 1827년 스코틀랜드의 식물학자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 1773~1858)이 현미경 관찰을 통해 발견했다.

 브라운 운동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했다. 꽃가루가 살아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돌가루로 실험했을 때에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났다. 꽃가루나 돌가루 분자는 물 분자의 크기에 비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물 입자의 운동에 의해서 이동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당시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수백 만 개의 물 입자들이 요동하면서 알짜 힘이 한 방향으로 쏠리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고, 이로 인해 꽃가루가 무작위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꽃가루의 움직임을 단순화하여 수평 방향으로 움직이는 경로만을 수식으로 유도했다. 그의 이론은 당시로서는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원자 수준의 운동을 기술했기 때문에 여러 과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1908년 프랑스의 물리화학자 장 페랭(Jean Baptiste Perrin, 1870~1942)이 브라운 운동에 관한 정량적 실험을 통해 아인슈타인의 예측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 6월 논문 】
 ≪운동하는 물체의 전기동역학에 관하여, Zur Elektrodynamik bewegter Körper ein≫

 6월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고전역학에서의 상대성 원리’에 대한 모순을 지적하고 광속 불변을 도입하여 특수 상대성 이론을 제창했다.

 ‘고전역학에서의 상대성 원리’란, ‘관성 좌표계에서는 모든 물리 법칙이 동일하게 성립한다’는 원리이다. 관성 좌표계는, 정지 상태이거나 등속으로 운동하는 좌표계를 말한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는 잔잔한 바다 위에서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커다란 배의 경우를 예로 들어 상대성 원리를 설명했다.

 배의 선실에서 밖의 풍경을 보지 않는다면 배가 움직이고 있는지 정지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선실 안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일들은 육지에 있을 때와 다름이 없다. 즉 ‘등속으로 움직이는 여객선(관성 좌표계)’에서 일어나는 물리 법칙은 ‘정지해 있는 육지(관성 좌표계)’와 물리 법칙에서 차이가 없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6월 논문을 통해 ‘갈릴레이의 상대성 원리가 전기장에서는 성립하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기를 띤 물체가 ‘정지된 관성 좌표계에서는 자기장이 없는’ 것으로 측정되고, ‘움직이는 관성 좌표계에서는 자기장이 있는’ 것으로 측정되었다. 이는 동일한 전하에 대해서 자기장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말이니, 모순이 아닌가?”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진 아인슈타인은 절대 정지, 절대 시간, 절대 공간은 없으며 관측자의 입장에 따라 시간이나 공간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내용을 논문에 담아냈다.

【 9월 논문 】
 ≪물체의 관성은 에너지 함량에 따라 달라지는가?, Ist die Trägheit eines Körpers von seinem Energieinhalt abhängig?≫

 9월 논문은 6월 논문을 추가 설명하는 부록과 같은 것으로, 핵심 내용은 ‘물체의 에너지가 E 만큼 변하면, 물체의 질량이 E ∕ c² 만큼 변한다’는 것이었다.

E=mc² (E: 에너지, m: 질량 변화량, c: 광속)

 ‘질량-에너지 등가(mass-energy equivalence)’의 원리를 나타내는 위 방정식은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떨어진 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공식이 되었다.

 1909년 10월 아인슈타인은 취리히 대학 교수가 되었다. 1910년에는 부인 마리치가 둘째 아들 에두아르트(Eduard)를 낳았다. 1911년에는 프라하의 카를-페르디난트 대학 정교수로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취리히연방공과대학(ETH) 이론물리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1913년 말에는 막스 플랑크와 발터 네른스트1)의 추천으로 베를린 대학에서 강의 없이 연구만 하는 교수직에 임명되었고, 카이저빌헬름 물리학 연구소장으로 부임하였다.
1) 막스 플랑크(Max Karl Ernst Ludwig Planck, 1858~1947): 양자 개념의 기초를 만든 공로로 191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발터 네른스트(Walther Hermann Nernst, 1864~1941): 열화학에 대한 공로(열역학 제3법칙)로 1920년 노벨화학상 수상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 이론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등속 직선 운동 좌표계에서만 작동하는 원리이므로, 회전 가속 운동 좌표계에는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자연의 모든 좌표계에서 통하는 등가원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야 했다. 아인슈타인은 학창시절 수학 공부를 등한시했던 것을 후회하면서 수학 교수 그로스만을 찾아갔다. 그로스만은 대학 때 아인슈타인에게 수학 노트를 빌려주고 특허국 취직도 알선했던 고마운 친구였다. 그로스만은 곡면과 입체에 적용하는 리만 기하학을 활용해보라고 일러주었다. 아인슈타인은 몇 년 동안 고급 수학을 배우고 익혀 1916년 일반 상대성 이론을 완성했다. 그 내용은 ≪일반 상대성 이론의 기초, Die Grundlage der allgemeinen Relativitätstheorie≫라는 제목으로 물리학 연보에 실렸다.

 1916년 1월, 1차 세계대전의 전장에서 40세의 나이에 군복무 중이던 슈바르츠실트(Karl Schwarzschild, 1873~1916) 박사가 아인슈타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의 방정식 해를 구해 쓴 논문이었다. 별의 반지름이 특정 한계(슈바르츠실트 반지름)보다 작아지면 시공간이 무한히 휘어져서 빛도 빠져나올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연구는 블랙홀(black hole)의 존재를 예견한 것이었지만, 아인슈타인은 그런 천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편, 슈바르츠실트는 안타깝게도 피부가 괴사하는 천포창(天疱瘡)에 걸려 편지를 보냈던 그해에 전장에서 사망했다.

 1918년 12월 아인슈타인은 아내 마리치와의 이혼 문제로 법정에 섰다. 그는 4년 반 동안 사촌 누나인 엘자(Elsa Löwentha1, 1876~1936)와의 연애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노벨상을 타게 된다면 상금 전액을 마리치에게 주겠다고 약조했다. 이듬해 6월 아인슈타인은 엘자와 결혼했다.

 1919년 5월 29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천문 관측이 이루어졌다. 영국의 왕립학회와 왕립천문학회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개기일식 관측에서 별빛이 태양의 중력에 의해서 비스듬하게 휘어져 들어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언론은 그해 11월 이를 대서특필했고, 아인슈타인은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1921년 아인슈타인은 미국에 초대되어 순회강연을 했고, 1922년에는 일본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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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년 아인슈타인과 부인 엘자 ]
그림 출처: cdn.loc.gov

 일본을 방문 중이던 그해 11월, 아인슈타인은 ‘1921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전보로 받았다. 공식적인 업적은 ‘물리학에 대한 기여와 특히 광전 효과를 발견한 공로’였다. 노벨상위원회에서는 상대성 이론을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는 상대성 이론을 수용하기 힘들어하는 과학자들의 반발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0년대 이후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주도하는 막스 보른, 닐스 보어, 하이젠베르크와 같은 과학자들과 많은 교류를 가졌다. 닐스 보어는 자신의 원자 모델에서 전자의 위치가 유령처럼 도약한다는 이론을 펼쳤고, 하이젠베르크는 전자와 같은 입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알아내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표했다. 아인슈타인은 ‘물리의 법칙이 무작위 확률과 우연의 지배를 받는다.’는 양자역학의 논리에 대해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표현으로 거부감을 표시했다.

 1930년대 아인슈타인은 평화주의자로 활동하며 히틀러와 나치 정권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신임 총리로 정권을 잡았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가족과 측근들을 데리고 벨기에의 임시 거처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독일에 있는 그의 집과 별장이 여러 번 수색을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독일로 돌아가면 큰 화를 당할 것이 분명했기에 그는 미국 망명을 택했다.

 1933년 10월 환대를 받으며 미국에 도착한 그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The Institute for Advanced Study)의 연구자가 되었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는 순수 과학 연구를 위한 사설 연구기관으로, 연구자는 연봉을 받지만 아무런 연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호텔 같은 곳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죽을 때까지 고등연구원의 지위를 유지했다. 1936년 12월에 아내 엘자가 병으로 사망했고, 그는 1940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1945년 8월 일본에 핵폭탄이 투하된 후 신문들은 E=mc²을 표지에 싣고 원자폭탄의 아버지라는 식으로 자극적인 기사를 올렸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원자탄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았고, 핵분열에 대한 실험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단지 ‘독일이 원자탄 개발을 할 수도 있어서 우려된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백악관에 보낸 적이 있었을 뿐이다.

 1945년 아인슈타인은 고등연구소에서 은퇴했고, 1946년에는 핵무기 통제를 위한 핵과학자 비상회의 의장을 맡았다. 1948년에는 그의 첫 아내였던 마리치가 뇌졸중으로 숨을 거두었다.

 1955년 아인슈타인은 흉통으로 프린스턴 병원(Princeton Hospital)에 입원했는데, 4월 18일 새벽 동맥 파열로 일흔 여섯의 나이에 사망했다. 부검을 통해 밝혀진 그의 뇌 무게는 1230 그램으로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부검을 담당한 병리학자 토머스 하비(Thomas Stoltz Harvey, 1912~2007)는 유족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아인슈타인의 뇌와 안구를 적출하여 은밀한 장소에 숨겼다. 이 사실을 기자들이 알게 되자, 하비는 인류를 위해 과학적 목적으로만 쓰겠다고 아이슈타인의 아들 한스(Hans Einstein)에게 간청하여 동의를 얻어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뇌를 70조각으로 나누어 일부는 자신이 엄선한 몇 명의 의사에게 보냈고, 안구는 안과의사에게 주었다. 나머지 뇌 조각은 수십 년 동안 안전금고에 숨겨두었는데, 2007년 하비가 죽은 후 그의 상속인이 국립보건박물관에 기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규진 경성고 과학교사 《너무 재밌어서 잠못드는 지구의 과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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