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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진
뉴욕 변호사의 엑스팻 생활기
엑스팻(Expat)이란 외국에 장기 체류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엑스팻으로 반평생을 살아온 필자 이철재 변호사가 뉴욕에서의 엑스팻 생활을 풀어나가며 그곳의 일상적 모습 혹은 관광객들이 모르고 지나가는 곳들을 소개한다.
엑스팻이 가슴에 품고 사는 것들 下 할머니의 녹색 엄지손가락, 햇장, 신의주 김치, 약과, 수박, 별, 달, 은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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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6.10

잠에서 깨니 날씨가 많이 따뜻했다. 밖이 집 안보다 더 따뜻한 봄날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다.

창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바삐 한국을 오가느라 김치 없이 산 지가 꽤 되었다. 한국 식료품점 한스(Han’s)로 갔다. 한스의 한 사장님과 그 부인 미시즈 한은 내가 로스쿨 다니던 시절부터 아는 분들이다. 미시즈 한은 내가 음식 만들어 먹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한 사장님은 어느 하루 오랜만에 가게에 나와 있다가 내가 말린 취를 장바구니에 넣는 것을 보고 놀랐다.

조용히 부인에게 다가가 “아니, 철재 씨는 해 놓은 반찬은 안 사고 취나물 말린 것을 사가”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미시즈 한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메줏가루도 사가.”

 

림버거도 울고 갈 할머니의 햇장 

내가 메줏가루를 사갔던 것은 친할머니의 음식이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가난한 막내아들에게 시집와 하숙치며 남편과 자식 다섯 모두 대학 공부 시키느라 고급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 형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하늘이 내린 손맛을 갖고 계셨다.

지금도 나의 어머니는 당신 시어머니의 음식 이야기를 자주 하신다. '있는 것들 슬슬 모아' 어떻게 그렇게 맛있는 밥상을 차리시는지 놀랍다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할머니 댁에 삶은 메주콩 찧던 나무절구가 있었다. 아마 할머니가 16세에 시집오며 가져온 싱가 미싱만큼이나 오래된 물건이 아닐까 한다.

할머니는 메주를 쑬 때 한 움큼 떼어 그것은 벽돌 모양으로 빗지 않고 손바닥만 하게 동그랗게 빚어서 띄우셨다. 봄에 장을 담글 때 동그란 메주는 간장을 담그는데 쓰지 않고, 따로 절구에 빻아 그 가루를 모아 놓았다 거기에 물을 부어 발효를 시키고 소금으로 간을 하여 된장찌개처럼 끓이셨다. 없이 살던 시절 주식량원인 된장이 떨어지고, 그해 담근 된장이 채 익기 전 비상식량이 아니었나 싶다.

간장을 뽑지 않은 날, 메주 가루를 발효시켜 끓인 장이라고 햇장이라고 한다. 청국장 비슷하지만 그보다 오래 숙성을 해서 끓일 때 냄새가 훨씬 더 요란하다. 치즈를 아주 좋아하는 서양인들도 냄새가 너무 강해 잘 먹지 못하는 치즈 중에 림버거(Limburger)라는 것이 있다. 할머니의 햇장 냄새는 림버거도 울고 갈 그런 강력한 고린내였다.

할머니는 가끔 발효시킨 메줏가루에 소금과 고춧가루를 넣고 그냥 반찬으로 내기도 하셨는데 그건 열을 가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냄새가 심하게 나지 않았다. 나는 어려서 햇장을 못 먹었다. 어머니는 그 옆에도 가지 못하셨다. 림버거도 울고 가는 냄새 때문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햇장이 놓인 밥상머리에 앉아 한 숟가락, 두 숟가락 맛을 보다 보니 이제 나도, 어머니도 햇장을 꽤 즐긴다. 문제는 그걸 만들어 주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할머니가 해주시던 햇장이 그리워 한스에서 메줏가루를 사다 한번 해 먹어 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런 것을 영어로 어콰어드 테이스트(Acquired Taste)라고 한다. 처음부터 입맛에 맞는 맛이 아니라 먹다보니 익숙해져 즐기게 된 맛이라는 뜻이다.

메주를 절구에 빤 할머니의 햇장과 달리 메주 분말로 만드니 콩 씹는 맛이 없어 실망스러웠다. 게다가 집에서 냄새가 빠지지 않아 상당히 오래 곤혹스러웠다. 맛은 어콰어드 테이스트가 되지만 냄새는 아직도 버겁다. 그 뒤로 햇장은 그냥 마음속으로 그리워만 하기로 했다. 할머니의 손맛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데 온 동네를 유산균 화장터로 만들며 사이비 햇장을 끓이고 싶지 않다.

 

"거 참 쩌르르 하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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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월에는 시라큐스에 마땅한 봄채소가 아직 없어 김치 담그기가 애매하다. 그냥 배추와 무를 사 가지고 한스를 나왔다. 햇장 하면 친할머니가 떠오르지만, 나의 김치 입맛은 외할머니로부터 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머니가 담그는 김치가 외할머니께 배운 김치이고 나는 그 김치를 먹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나의 외가는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내려온 실향민이다. 평안북도는 날씨가 추워 서울이나 남쪽 지방과 김치 담그는 방식이 상당히 다르다. 특히 김장김치는 겨울이 추워 배추 절이는 것부터 다르다. 오래 절이지 않아 빳빳한 배추에 심심하게 양념을 하고 국물을 많이 해 부어 양념이 배어들게 만든다.

젓갈은 새우젓을 조금 사용하고 그 이외에는 거의 쓰지 않는다. 김장김치에는 양지머리를 삶아 지방을 제거하고 고기와 국물을 소에 넣어 버무린다. 독에 김치를 담고 며칠 후 쇠뼈를 고아서 만든 국물을 식혀서 간을 하고 김치가 들어 있는 독에 붓는다.

추운 신의주 날씨 속에 천천히 김치 속 고기가 발효하면서 탄산이 많이 나온다. 고춧가루를 많이 넣지 않아 백김치 비슷한 색깔에 빳빳하면서도 양념이 잘 밴 고갱이 부위를 한 입 척 베어 먹으면 혀가 김치에 닿는 순간 탄산음료처럼 찡 한다. 평안도 사람들이 김치 맛을 보고 “거 참 쩌르르 하누나” 하면 그것은 그 집 김치에 대한 최대의 찬사다.

신의주 김치를 서울에서 담그면 날씨가 추운 해는 기가 막히게 맛있지만, 겨울이 따뜻한 해에는 맛도 보기 전에 늘어지기 십상이다. 요즘은 김치냉장고가 있어 보관도 쉽고, 추운 겨울날 밖에 나가 김치 가져올 일 없어 좋다. 그래도 독을 땅에 묻어 놓고 추운 날 맨 위에 김치를 치우고 독 속으로 파고 들어가 꺼내다 먹는 신의주 김치 맛과는 확실히 다르다. 시라큐스는 겨울 날씨가 중강진 수준이라 독 묻어두고 겨울에 신의주 식으로 김장을 해 먹으면 맛있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독이 없는 것이 한이다. 

“오메 저놈이 익을까 싶게 젓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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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는 여름에 배추김치를 담그면 배추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서 담그셨다. 여름에도 양념을 그렇게 진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빨리 시어져서 조금씩 담아 먹어야 하는 것이 흠이지만 양념이 진하지 않아 배추의 달콤한 향과 맛이 그대로 느껴졌다. 내가 담그는 김치의 맛은 할머니 김치 맛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늘 내가 김치를 담그면 할머니 스타일의 김치가 된다.

젓갈 맛이 물씬 풍기는 갓김치를 담그고 싶어 우리 아주머니께 여쭤봤더니 “오메 저놈이 익을까 싶게 젓갈을 부으면 된다”고 하셔서 갓은 구하기 힘들고 겨자 잎을 사다가 오메 익을까 싶게 젓갈을 붓고 담근다고 담갔는데 결국 익으니 전라도 김치가 아니라 쩌르르 한 신의주 김치 맛이 났다. 신의주에서는 갓으로 김치를 담그는 법도 없는데 어떻게 갓김치에서 그런 맛이 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노래하는 새, 허밍버드(Humming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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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터스톡

 김치 담근 것 정리하고 마당에 나가 장미에 비료 좀 주고 들어오는데 배고픈 벌새 한 마리가 윙윙거리며 먹을거리를 찾고 있었다. 벌새는 영어로 허밍버드(Hummingbird)이다. 날갯짓 할 때 허밍으로 노래하듯 음음 소리가 나서 붙은 이름이다. 

6월이나 되어야 나타나는데 올해는 빨리 왔다. 저 작은 몸이 쉴 새 없이 날갯짓 하며 남미(南美)에서부터 시라큐스까지 오느라 얼마나 배가 고플까 하는 생각에 후다닥 들어가 허밍버드가 먹는 넥타(Nectar)를 만들어 먹이통에 넣고 밖에 걸어 놨다.

넥타는 별것 아니고 물 4컵을 끓이다 거기에 설탕 1컵을 넣고 시럽을 만들어 식혀서 냉장고에 보관하면서 매일 갈아주면 된다. 먹이통은 빨간 병을 쓴다. 왜냐하면 허밍버드가 빨간색에 이끌리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름이 되면 허밍버드와 반딧불 보는 재미로 산다. 낮에 창가에 앉아 책을 읽다 고개를 들면 허밍버드가 어느 틈에 날아와 넥타를 먹고 있다. 내 손가락 한마디나 될까 할 정도로 작은 새가 어찌나 사나운지 먹이통을 혼자 차지하려고 먹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서로 싸우며 사방을 휘젓고 날아다니기도 한다. 나눠 먹으면 내가 더 줄 텐데.

허밍버드는 새 중에서도 날갯짓 기술이 가장 뛰어난 새로서 먹을 때도 공중에 떠서 먹는다. 어쩌다 먹이통에 앉아 넥타를 마시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내가 주는 음식이 얼마나 맛있으면 아예 지친 날개를 접고 쉬어가며 먹을까?

 

집시의 삶, 가슴에 품고 사는 것들   

땅거미가 질 때쯤이면 집안에 불을 끄고 윤종신의 <이층집 소녀>를 머릿속으로 따라 부르며 반딧불을 기다린다. “저녁 교회 종소리 노을에 퍼지고, 성급한 거리 위에 불빛이 눈을 뜰 때면, 내 기억의 거리에도 켜지는 불빛….” 창밖에서 반딧불들이 깜박깜박 눈을 뜬다. 내 기억의 거리에도 깜박깜박 불이 들어온다.

어느 여름 아버지는 이탈리아 가수 나다(Nada)가 부른 <마음은 집시(Il Cuore e uno Zingaro)>라는 노래에 ‘꽂혀’ 퇴근하고 오시면 저녁 내내 그 노래를 틀고 또 트셨다. 집 안에서 아련하게 나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가족끼리 수박을 앞에 놓고 마당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노라면 그 길던 여름해도 어느덧 넘어가고 별과 달과 은하수 그리고 잊어버릴만하면 한 번씩 지나가는 인공위성이 보였다. 그때는 그랬다.

서울의 공기가 더 맑았는지 아니면 서울의 밤이 그리 밝지 않았는지 이 모든 것들이 보였다. 그리고 시라큐스의 여름밤 반딧불을 보노라면 윤종신의 노래와 나다의 음성이 겹쳐 또 다른 노래가 된다.

첫날은 몸이 피곤해 잘 잤는데 둘째 날은 제트래그라는 현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 2시까지 정신이 또랑또랑했다. 앉았다 누웠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캄캄한 천장을 바라보며 이 엑스팻이 30년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도 한 번도 내려놓지 않고 가슴에 품고 다녔던 것들을 하나씩 헤아려 보았다.

내 아버지의 모습, 어머니의 모습, 외할머니의 녹색 엄지손가락, 햇장, 신의주식 김치, 약과, 수박, 별, 달, 은하수, 인공위성…. 쿨쿨.

마음은 집시? 글쎄, 몸은 집시였을지 몰라도 내 마음만은 집시가 아니었다.

이철재 미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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