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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진
뉴욕 변호사의 엑스팻 생활기
엑스팻(Expat)이란 외국에 장기 체류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엑스팻으로 반평생을 살아온 필자 이철재 변호사가 뉴욕에서의 엑스팻 생활을 풀어나가며 그곳의 일상적 모습 혹은 관광객들이 모르고 지나가는 곳들을 소개한다.
센트럴 뉴욕에 봄 오는 소리上 “This, too, shall pass”,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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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려서 가위에 눌리는 일이 잦았다. 멀리서 괴물이 전속력으로 달려오는데 나는 슬로 모션으로 움직인다. 숨을 쉴 수 없어 가슴은 턱턱 막히고, 발걸음 한 번 떼는 것이 모래주머니를 지고 걷듯 힘이 든다. 더운 여름날 낮잠이라도 잘라치면 어김없이 자다 말고 숨이 막혀 애쓰다 땀이 흥건하게 젖어 벌떡 일어나곤 했다. 어른들은 키 크려고 그런다고 하셨다. 그런데 키 다 크고 좀 더 컸으면 하던 시절에도 계속 가위에 눌렸다. 이제는 가위 눌리는 일이 없지만, 아직도 낮잠은 잘 자지 않는다.

한창 가위 눌리던 시절에 한 가지 터득한 것이 있다. 눈을 뜨려고 해도 뜰 수 없고, 숨이 막힐 때 속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센다. 고통스러워도 조금 참고 하나, 둘 세기 시작하면 꼭 셋이나 넷쯤 가서 숨을 확 몰아쉬며 잠에서 깬다. 그때 벌떡 일어나 앉아 한숨 돌리면 다시 자도 가위에 눌리지 않는다.

영어에 “This, too, shall pass”라는 말이 있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라는 뜻이다. 가위 눌렸을 때 하나, 둘 헤아리는 심정이 바로 “This, too, shall pass”이다. 

 

텍사스의 뜨거운 맛 vs 시라큐스의 혹독한 추위

나는 텍사스주의 휴스턴 교외에서 학교를 다녔다. 휴스턴은 더운 것은 이루 말할 수도 없고, 거기에 더해 습하기까지 하다. 내가 휴스턴에 처음 도착한 날은 8월 16일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더운 한여름이다. 그래도 첫날은 저녁 늦게 도착해 마중 나온 외삼촌 차를 타고 곧장 삼촌댁으로 갔기 때문에 별 느낌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문을 열고 밖에 나갔다 헉 하며 들어왔다. 아침 9시쯤 되었는데 땅에서 뜨거운 증기가 솟아오르는 것 같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후다닥 들어오는 나를 보고 외숙모께서 “오자마자 텍사스의 뜨거운 맛을 봤구나”라며 웃으셨다.

그곳은 1월에도 가끔 며칠씩 30도 가까이 올라가는 날이 있다. 3월이면 한국의 초여름 날씨가 된다. 5월에 학기가 끝나 기숙사 방을 비우려 짐을 나르다 보면 옷이 비를 흠뻑 맞은 듯 땀에 젖고, 여름에는 오후 2시 정도만 되면 토네이도 주의보가 하루건너 한 번씩 발령된다. 11월 중순쯤 되면 긴소매 옷에 겉옷을 걸치지 않고 다니는 ‘딱 살기 좋은 시절’이 시작된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때도 좀 따뜻한 해는 반바지 입고 쇼핑 나온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텍사스에서는 여름이 지나갈 때까지 “This, too, shall pass” 하며 살았다. 시라큐스로 온 뒤로는 매년 겨울 염불 외우듯 “This, too, shall pass” 하며 지낸다.

다른 모든 조건은 배제하고 텍사스의 더위와 시라큐스의 추위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텍사스의 더위를 택하겠다. 내가 워낙 여름을 좋아해서 그런지 더위는 좀 더 수월하게 견디고 에어컨도 잘 켜지 않고 산다. 하지만 텍사스의 기후는 여러모로 단조롭다. 시라큐스는 더운 계절과 더 더운 계절로 나뉘는 텍사스와 달리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다. 봄이 되어 겨울 동안 움츠렸던 자연이 피어나는 것을 하나하나 기다렸다 곱씹으며 바라보노라면 삶이 얼마나 강력한 에너지인지를 매년 일깨워 준다.

텍사스에서 대학 다닐 때 친구들은 아직도 나와 연락을 할 때마다 “시라큐스 그 추운 고장에서 어떻게 사냐? 그러지 말고 텍사스로 다시 이사 와”라고 한다. 시라큐스에 사는 사람들은 “그 더운 텍사스에서 어떻게 살았니?”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두 곳에서 모두 잘 먹고 잘 살았다. 사람의 적응 능력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This, too, shall pass”를 외우고 있으면 텍사스의 더위도 한풀 꺾이고, 센트럴 뉴욕에도 봄이 찾아온다.

 

센트럴 뉴욕에 봄 오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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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터스톡

센트럴 뉴욕의 봄의 전령은 뭐니 뭐니 해도 새이다. 특히 1년 내내 이 추운 고장에 붙박이로 사는 텃새 카디널(Cardinal, 홍관조라고도 함)이다. 카디널의 수컷은 온 몸이 새빨갛다. 유럽인들이 처음 신대륙 미국에 도착했을 때 처음 보는 빨간 새를 보고 신기해하면서도 뭐라 불러야 할지 몰랐다. 처음에는 그냥 ‘붉은새(Redbird)’라고 불렀다. 그러다 새의 붉은 색이 가톨릭교회의 고위 성직 계급인 추기경들이 입는 빨간색 옷과 같은 색이라고 추기경을 뜻하는 카디널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참고로 카디널은 영어 발음이고 불어로는 철자는 같고 발음만 조금 다르다. 스페인어는 Cardenal, 라틴어는 Cardinali, 이탈리아어는 Cardinale 등으로 대동소이하다.

겨울에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였을 때 새빨간 카디널이 날아와 눈 덮인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모습을 볼 때면 내가 재주만 있으면 한 폭의 그림으로 남기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카디널을 보려고 겨울에는 나무에 새 모이통을 달아 놓고 거기에 해바라기 씨를 사다 넣는다. 카디널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다. 카디널은 핀치(Finch)의 일종이다. 핀치 종류의 새들은 통통한 원뿔 모양의 부리를 갖고 있어 씨를 까먹는 데 좋다. 눈 덮인 모이통에 앉아 씨를 잔뜩 머금고 오물오물 하며 껍데기를 이리저리 총알 쏘듯 날려 보내고 알맹이만 삼키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눈 오는 날 집안에 갇혀 할 일 없을 때 좋은 소일거리이다.

카디널은 잘생긴 새가 심지어 목소리까지 좋아 짝짓기 철에는 변화무쌍한 노래를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부른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자랑하는 새들을 영어로 송버드(Songbirds, 명금鳴禽)라고 부른다. 이들은 매년 봄부터 초가을까지 최소 한 차례, 혹은 두 차례까지 짝짓기를 하고 이 기간 동안 열심히 노래를 부르지만, 짝짓기 철이 끝나고, 새끼들이 모두 떠난 뒤에는 노래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겨울이 되면 먹이거리 찾기도 힘든데 에너지 소모 하며 노래를 불러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겨우내 잠잠하던 카디널이 한 2월쯤 되면 가끔 한 번씩 삑삑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눈이 아직 하얗게 쌓여 있지만 그 소리를 들으면 큰 위로가 된다. ‘아, 겨울이 떠날 차비를 하나보다’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봄을 부르는 여신, 스노우드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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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말이나 3월초가 되면 눈은 계속 오지만 내린 눈이 금방 녹아 잘 쌓이지 않는다. 해가 높이 뜨기 때문이다. 정원을 가꿀 때 가장 기쁜 순간은 내가 심고, 가꿨던 식물들이 추운 겨울을 이기고 다시 싹을 틔우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눈이 녹기 시작하면 후줄근한 잔디밭 여기저기 스노우드롭(Snowdrop)이 피어 있다. 어찌 보면 가녀린 동양란처럼 생긴, 알뿌리 식물인 스노우드롭은 눈에 파묻힌 상태에서 잎이 나고 꽃이 핀다. 그리고 눈이 녹으며 그 안에서 하얀 꽃이 핀 채로 봄을 부르는 여신처럼 나타난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가 유럽으로 출장을 가신 적이 있다. 아버지가 스위스에서 보낸 그림엽서는 하얀 에델바이스가 눈 속에 피어 있는 사진이었다. 나는 매년 눈이 녹으며 수줍게 고개를 드는 스노우드롭을 볼 때면 그 그림엽서를 떠올린다. 꽃이 흰색이라는 것 빼고 에델바이스와 스노우드롭은 별로 비슷하게 생기지도 않았고, 학명도 완전히 다르지만 눈 속에 핀다는 공통점이 나의 기억을 자극하는 것 같다.

스노우드롭이 여기저기 고운 자태를 드러내고 서 있으면 뒤이어 헬레보레(Hellebore)와 튤립, 히아신스 등이 핀다. 

 

창문 틈으로 스며들어 오는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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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주택가들은 사슴과 전쟁을 벌이는 곳이 많다. 늑대나 퓨마 등 천적이 사라진 도시에 사슴들이 마음 놓고 번식을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고속도로에서 달리는 차와 부딪혀 사슴과 사람이 모두 다치기도 하고, 주변의 녹지대를 싹쓸이 하는 것도 모자라 개인 주택의 화단이나 농가의 밭을 폐허로 만든다. 우리 동네도 사슴 때문에 무엇 하나 마음 놓고 심을 수가 없다. 한번은 아침에 일어났더니 사슴 일곱 마리가 뒷마당에서 서성대고 있어 냄비를 주걱으로 두드리며 뛰어나가 모두 쫓아버렸다.

이런 상황이니 사슴이 좋아하는 튤립이나 장미로 화단을 꾸몄다가는 꽃이 피는 족족 참수형을 면하기 어렵다. 헬레보레는 독초라 사슴들이 먹지 않는다. 그래서 사슴이 가장 좋아하는 튤립이나 장미는 헬레보레 뒤에 숨겨서 몇 개만 심고 헬레보레를 잔뜩 심었다. 

어떤 때 인간이 계절에 맞춰 절기를 정한 것인지, 아니면 자연이 우리의 절기에 맞춰 돌아가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텍사스에 살 때는 유난히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해도 11월 마지막 목요일 추수감사절이 되면 신기하게 날씨가 쌀쌀해졌다. 쌀쌀해졌다는 것이 얇은 재킷이나 스웨터를 입는 정도의 날씨이지만, 11월에 반팔 옷을 입고 다니다 그 정도면 쌀쌀해진 것이다.

시라큐스는 늦추위가 기승을 부리다가도 부활절 휴일이 시작되려면 날이 풀리고 봄기운이 완연하다. 플릿우드맥(Fleetwood Mac)이라는 그룹이 부른 노래 중에서 나는 〈Songbird〉라는 노래를 매우 좋아한다. 그 가사의 한 대목이 “And the songbirds are singing, like they know the score”이다. “송버드들은 노래를 한다, 마치 그들이 악보를 다 알고 있는 것처럼”이라는 뜻이다.

부활절이 다가오면 카디널의 노래 소리도 볼륨이 점점 올라가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풀타임으로 지저귀기 시작한다. 게다가 로빈(Robin) 등 철새들이 돌아와 합세를 해 합창을 한다. 마치 악보를 적어 놓고 화음을 맞춰 합창을 하듯 부르는 새벽 새들의 노래는 아직 날씨가 쌀쌀해 꼭꼭 닫아 건 창문 틈으로 스며들어 와 온 집안에 봄을 흩뿌린다.

올해 부활절에도 어김없이 봄이 찾아왔다. 주초에 매 한 쌍이 우리 집 하늘 위에서 짝짓기를 하더니 무슨 이유인지 수컷이 계속 뒷마당 나무에 앉아 보초를 서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끝없이 종알거리던 송버드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숨어서 반나절을 보냈다. 부활절 일요일 아침에는 새벽에 개를 데리고 나갔더니 동이 트기 시작하는 동네가 안개에 쌓여 포근한 날씨에 집 앞 길에 서 있는 벚꽃이 만개하고 그 위를 송버드들이 바삐 날아다니며 노래를 불러댔다. 안개 속에 뿌옇게 빛나는 가로등과 벚꽃이 인상파 그림의 한 장면 같아 전화기를 가지고 나와 사진을 찍었다. 새소리도 같이 찍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글·사진 이철재 미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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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Howard Hong   ( 2019-05-28 ) 찬성 : 0 반대 : 0
6월 17일에 Lake Powell, Antilop Valley, Grand Canyon Northrim 으로 여행갑니다. 이야기, 사진교환 등등 나누실분 기대합니다. 타주, 한국 또는 다른나라에 사시는 어느분이든 환영합니다.
 countrycanyon@gmail.com
 California에서
 Howard Hong
 
  Howard Hong   ( 2019-05-28 ) 찬성 : 0 반대 : 0
이선영님
 남자인가요 여자인가요?
 그것이 궁금하네요
 캘리포니아에서
  Sunyoung Lee   ( 2019-05-22 ) 찬성 : 3 반대 : 0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 버팔로에 살고 있고, 이 글에 쓰신 동네인 Houston으로 7월에 이사를 갑니다. 저번 겨울, 이번 겨울은 유난하게도 너무나 겨울이 길어서 많이 지쳐버렸는데, 따뜻한 (더운?) 동네로 가게 되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버팔로에서의 마지막 아름다운 봄을 즐기고 갈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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