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시작해 바다로 끝나는...

 

박찬욱 감독은 ‘배운 변태’라더니, 역시. 신작 〈헤어질 결심〉은 완벽을 기하는 집요한 고민이 도드라지는 영화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치밀한 구성은 ‘디테일’이란 표현만으로는 설명하기 부족하다. 영화는 안개에서 출발한다. 평소 이봉조 작곡가의 노래 ‘안개’ 팬이라고 밝힌 그는 영화 전반에 안개를 흩뿌렸다. 주인공 서래(탕웨이 역)가 남편 죽음의 용의자인지, 피의자인지부터 그가 입은 원피스 색이 청색인지 녹색인지 혼란에 빠뜨리는데 이는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메시지가 된다.

또 산에서 시작해 바다로 끝나는 영화 구조를 벽지에 대입해 산인지 파도 치는 바다인지 구분되지 않도록 패턴화하며 보는 재미까지 더했다. 하지만 흐릿한 안개 속에서도 사건이 가리키는 증거와 인물이 품은 감정을 그대로 따라가다 보면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광적인 완벽주의자인 박찬욱 감독의 성격이 오롯이 반영된 결과다.

영화는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흔한 소재를 다루지만 뻔한 로맨스로 보이지 않는 건 상대를 향한 관심이 의심과 결심 사이를 오가게 만드는 수사극 설정 때문이다. 굳이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입을 맞추지 않아도 둘 사이의 농밀하고 풍부한 감정이 배어 나온다. 배우들의 표현력 이전에 무엇 하나 허투루 담지 않고 치밀하게 계산된 설계가 있어 가능한 일이다. 특히 영화가 끝을 향해 달려가며 맞춰지는 정교함이란. 《뉴욕타임스》는 “박찬욱 감독이 절정에 오른 느낌”이라고 평가했다.

영화는 수사극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속은 로맨스로 가득 차 있다. 수사에 시선을 뺏기면 두 배우의 감정을 온전히 따라가지 못한다. ‘범인이 누구일까?’보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할까?’에, ‘이 증거는 저 사람을 범인으로 가리키는 건가?’보다 ‘저건 나를 생각한다는 뜻인가?’에 의미를 둬야 한다. 의심을 거두고 사랑에 빠진 순간을 떠올리며 영화에 몸을 맡겨야 영화 속 깊이 침잠할 수 있다.

박찬욱 감독은 그동안 독창적인 이야기 구성, 매혹적인 미장센, 파격과 금기를 넘나드는 강렬한 소재와 표현,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 등을 대담하게 구현하며 세계를 매료시켜왔다.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아가씨〉 등이 화려한 미장센, 폭력과 선정적인 장면으로 파도처럼 밀려드는 작품이었다면, 〈헤어질 결심〉은 물에서 잉크가 퍼지듯 서서히 물드는 부류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미장센이나 유머는 놓치지 않았다.

전작들과 완전히 다른 표현 방식을 결심한 박찬욱 감독은 〈헤어질 결심〉으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거머쥐었다. 〈올드보이〉 〈박쥐〉 이후 세 번째 수상의 영예. ‘칸느박’의 존재감은 여전했다.

〈헤어질 결심〉 박찬욱 감독 1편에 이어서...

 

영화 전체가 산에서 시작해 바다로 끝나는 구조입니다. 산과 바다를 연상케 하는 벽지도 등장하는데 어떤 의미를 담은 건가요?

“높은 산에서 시작해 바다 구덩이에 묻히는, 하강하는 구조를 담고 싶었습니다. 산과 바다는 하나의 우주, 하나의 세계를 의미하는 자연이죠. 벽지 패턴은 많은 공을 들여 만들었습니다. 보기에 따라 산일 수도, 파도 치는 바다일 수도 있고, 청색인 동시에 녹색으로 보이죠. 이 영화에서 안개가 흐릿한 가운데 불분명한 무언가를 추구했듯 말입니다. 서래가 용의자 같기도, 피의자 같기도 하면서 불쌍한 아내인 것도 같고 살인자 같기도 한 것처럼 모든 게 애매한 상태로 보입니다. 그런 중에도 똑바로 보려고 노력하는 해준을 표현하는 장치 중 하나였습니다. 절차 중심적이고 고지식하고 규칙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이런 벽지를 선택할 것 같았거든요.”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미묘하고 우아하고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려고 했다”고 했는데 특히 어떤 지점에 잘 묻어났다고 보나요?

“이포에서 해준이가 서래를 심문할 때.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다른 곳은 편집으로 압축했는데 이 장면은 많이 안 건드렸어요. ‘왜 그런 남자하고 결혼했습니까’ ‘다른 남자와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요’ ‘나라면 이렇게 말할 것 같은데요, 참 공교롭네. 송서래 씨는 뭐라고 할 것 같아요?’ ‘참 불쌍한 여자네’ 이런 대사 뒤 정크푸드가 눈앞에 놓이는데, 미묘하고 우아하고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장면입니다.”

 

해준이 잠복근무하며 서래를 관찰하는 장면에서 마치 옆에서 보는 것처럼 촬영한 게 인상적입니다.

“해준이 쌍안경으로 서래를 보고 있다가 커튼에 가려 얼굴이 보일락 말락 해지니까 애가 타죠. 쌍안경을 대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다가 잘 안 보이니 그 안에 들어간 꼴이 된 겁니다. 어떻게 보면 스토커 같고 누군가 불편함을 느낄 수 있어 조심스럽게 다뤄야 했습니다. 해준은 직업적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라 서래가 할머니를 간병하고 새, 물고기를 잘 돌봐주는 면에 매료되죠. 서래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을 갖고 있지 않을지 몰라도 높은 숙련도와 전문성에 반하는 거예요. 그런 모습을 기꺼이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었을 겁니다.”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어요.”

서래(탕웨이)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이 있다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

해준(박해일)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해준

 

“난 해준 씨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어 이포에 갔나 봐요.”

서래

영화를 보고 나면 ‘마침내’라는 대사가 머리에 맴돕니다. 영화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대사이기도 하고 제목의 ‘결심’과도 이어지는 느낌이 들고요.

“똑같은 ‘마침내’라도 어느 순간 쓰느냐에 따라 드디어, 결국, 기어코 등 여러가지로 대체할 수 있지 않습니까. 저는 무엇보다 올 것이 왔다는 운명적인 느낌을 주고자 했습니다. 운명이 정해져 있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니라 살다 보면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때가 오는데요. 그런 심정에 저항하고 싶기도, 곱씹어보고 싶기도 한 단어였습니다.”

 

영화 속 미술과 음악에 확고한 취향과 인장을 남기는 걸로 유명하죠. 이번 영화에서도 박찬욱 특유의 인장이 확실히 존재하면서도 선명도에서는 전작보다 살짝 옅어진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에도, 지금도 의도한 건 아닙니다. 저는 인장을 남기는 데 완전히 무관심한데요, 그렇게 보인다면 제 능력의 한계일 거예요. 저는 이야기에 가장 조응하는 스타일이 무엇인지에만 집중합니다. 물론 세 가지 한계는 존재하겠죠. 첫째, 스토리 자체를 제가 만들고 선택한 거라 취향이 결정돼 있을 겁니다. 둘째, 능력의 한계예요. 상당히 다른 이야기인데도 표현하는 방법에서 비슷한 게 반복된다면 제가 ‘영화는 무릇 이래야 한다’라고 여기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해 생기는 일이겠죠. 셋째, 실제로는 꽤 다른데도 박찬욱이란 이름 때문에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요.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는 정말 다른 영화예요. 감독 이름을 지우고 100년 뒤 관객에게 보여주면 일관된 스타일이라고 보진 않을 것 같습니다.”

 

서강대 정문에 “한국 영화계의 거장, 박찬욱 동문(철학82) 칸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을 축하합니다”라는 문구와 사진이 걸린 현수막을 보셨는지요? 대학 시절 영화감독을 꿈꾸며 영화 동아리를 만들기도 했다고 들었는데, 영화인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나요?

“사진으로 봤습니다. 사람들이 놀리려고 보내준 통에 여러 컷 갖고 있고요. 쑥스러워서 제발 보내지 말라고 하는데도 재밌나 봅니다. 스마트폰으로도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시대잖아요. 돈이 없다, 도와줄 사람이 없다, 숙련 스태프가 없다 이러쿵저러쿵 핑계가 통하지 않죠. 뭐든 찍으라고 말하고 싶네요. 1분, 2분짜리부터 시작해서 편집하고 음악도 넣고 하나씩 해나가길 바랍니다.”

 

해준은 말한다.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이 있다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라고. 거센 파도 같은 이야기로 관객을 덮쳐온 박찬욱 감독은 잔잔하게 퍼지는 잉크처럼 서서히 관객을 매료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그가 보여준 어른들의 지독한 사랑의 농도는 점차 짙어져 울렁이게 만든다. 파도와 잉크 사이를 흐트러짐 없이 오갈 수 있는 감독이 얼마나 될까. 박찬욱 감독이나 이룰 수 있는 세계다. 역시는 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