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하지요.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그림도 그렇습니다. 멀리서 보면 아득하게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거칠고 짧은 물살 같은 붓질에 물감들이 수소와 산소 분자처럼 붙어서 일렁이고 있습니다.

모네 역시 우아하고 잘생긴 외모와는 상반되는 거친 생각과 불안한 내면의 소유자였지요. 모네가 그토록 천착한 ‘빛과 대기의 외피’ 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특별한 시선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말하는 게 아닐까요. 이를테면 분위기, 후회나 그리움 같은 감정 그리고 불행에 대한 예감 같은 것들.


꿈결 같은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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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는 빛이 곧 색체라고 믿었습니다. 평생 그의 작품 활동을 통해 이러한 의식을 표현했고요. 그의 <인상, 해돋이>(1872)는 인상파의 대표 걸작으로 손꼽힙니다. ©위키피디아

빛의 사냥꾼, 인상주의의 창시자 중 한 명인 그는 ‘빛은 곧 색채’라는 인상주의 원칙을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신봉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그림이란 어느 순간이 주는 인상의 기록과 다름없었지요. 그는 ‘인상’이라는 용어 자체를 좋아했습니다. 당시 미술원의 화가들은 대상을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고유의 색채 그대로 그리되 인간의 눈에 감지될 때 색채 변화를 일으키는 빛의 효과 따위는 무시하라고 가르치고 있었습니 다. 하지만 모네는 이런 관습에서 벗어나 시시각각 보이는 그대로를 정확하게 그리고 싶었지요. 그는 르누아르, 피사로와 같은 친구들과 함께 독립 전시회를 열 계획을 세웠습니다.

드디어 1874년 첫 번째 아방가 르드 전시회를 앞두고 담당자가 일출을 그린 작품의 제목을 물었을 때 그는 “그냥 인상이라고 부르는 건 어때요?”라고 툭 던졌고 그렇게 작품 제목은 <인상: 해돋이>로 정해졌습니다.

기존 통념을 전복한 미술계의 투사들에게는 예상대로 혹독한 비평이 쏟아졌고 비평가들은 모네의 그림 제목에 착안하여 이 그룹을 인상 파라 명명하게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미술 사조의 탄생치고는 참 무성의하고 애잔하지요.

당시 유명 평론가 루이는 모네의 작품을 두고 “그리다 만 벽지도 이 그림보다는 완성도가 높을 것”이 라는 막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또 어떤 평론가는 르누아르가 안개를 너무 선명하게 그렸다는 이유로 “꿈과 현실도 구분 못 하는 불쌍한 장님 천치들”이라며 조롱을 했는데요. 이때 모네는 이 안개 타령에 본때를 보여줄 각오를 다지게 됩니다.

당시 같은 기간에 열린 주류 전시 회에는 매일 1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입장을 하고 있었던 반면 모네와 친구들의 전시회에는 첫날 175명, 마지막 날엔 54명이 전부였습니다. 그들이 받았을 상처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1877년 모네는 생라자르 기차역을 그리기로 합니다. 막 출발하려는 기차의 증기기관에서 내뿜는 수증기와 자욱한 연기를 통해 어떻게 현실이 꿈결처럼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줄 심산이었지요. 그는 역 탐방후 루앙행 기차가 정시 출발한 30분 후가 가장 빛깔이 아름답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기차역 측에서 일개 화가를 위해 일정을 조정할 리가 없었 지요. 안타깝지만 여기서 포기해야 하는 걸까요? 자의식이 강한 모네는 연기력도 남달랐습니다.

화창한 어느 날, 모네는 자신이 가진 옷 중에서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웨스턴 철도 회사의 사무실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러곤 마치 대단히 성공한 화가인양 제안을 했습 니다. 기차역의 풍경을 담은 대작을 구상 중인데 생라자르 역과 근처의 노드 역 중 어느 곳이 나을지 고민이 된다고 말이죠.

잠시 후 마법처럼 순식간에 모든 기차가 멈추고 기차역이 깨끗하게 정리되었습니다. 생라자르 역이 역사에 남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역장은 혹시라도 그가 맘이 바뀌어 노드 역으로 떠날까봐 긴장한 채 그의 모든 요구사항을 들어주었지요.

모네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세팅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의 위엄 있는 태도에 압도당한 직원들은 눈앞의이 화가가 살롱전에서 낙선을 밥 먹듯이 하는 무명의 화가라는 사실을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고 해요. 후일 이 사건을 전해 들은 르누아르는 “세상에! 나는 골목길의 조그만 가게 앞에서도 그림을 그릴 엄두가 나지 않던데!”라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탄생한 <생라자르 역>은 마치 생생한 꿈인 듯, 꿈같은 현실인 듯 알 수 없는 매력적인 풍경을 보여줍니다. 기차가 뿜어 올리는 연기가 뭉게구름처럼 퍼지며유리로 만든 채광창으로 쏟아지는 햇살과 어우러져 뿌옇게 흐려진 광경이라니. 다시는 인상파의 그림을 구매하지 않기로 작정했던 미술상 들의 마음을 바꾸기에 충분했습니다.


죽어가는 아내를 그리다

프랑스의 항구 도시 르아브르에서 태어난 모네는 어려서부터 독창 적인 풍자만화 그리기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17세에 학교를 그만둘 무렵부터 이미 사람의 특징을 한순간에 잡아내는 캐리커처로 상당한 수입을 올렸는데요. 생활비 충당은 물론이고 남은 돈으로 창작 여행을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는 19세에 파리로 가서 2년간 미술 공부를 하다가 군대에 소집됩니다. 알제리 주둔지에서 복무하다가 장티푸스에 걸리는 바람에 1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게 되지요. 다시 파리로 돌아온 그는 샤를 글레르 밑에서 전통적인 그림 기법을 배웠어요. 그런데 이미 야외 에서 자연을 직접 보고 그리는 옥외 그림에 빠져 있었기에 전혀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파리에서 미술 공부를 하던 시절부터 모네는 잘생긴 외모에 레이스 소매를 소화할 만큼 뛰어난 패션 감각으로 뭇 여성들을 사로잡았는 데요. 어쩐 일인지 그는 쇄도하는 유혹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여성 취향이 독특하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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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는 카미유에게서 모델 그 이상의 영감을 받았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차오른 사랑들이 그의 화폭을 채웠던 것이겠지요. <초록빛 드레스 입은 카미유>(1866) ©위키피디아

 

1865년, 25세의 철벽남 모네가 드디어 평생의 연인 카미유 동시외(Camille Doncieux, 1847~1879)를 만납니다. 직업모델이었던 그녀에게 첫눈에빠져버린 그는 그녀에게 오직 자신만의 모델이 되어줄 것을 요구했고 바로 동거에 들어갔습니다.

2년 후 카미유가 혼전임신까지 하자, 전통 회화가 아니라 새로운 화법을 추구하는 그가 못마땅했던 모네의 아버 지는 결국 폭발해버립니다. 그동안 보내주던 생활비를 끊고 당장 고향 집으로 돌아오라고 종용했지만 그는 끝까지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들 장까지 태어나자 모네는 어쩔 수 없이 친구들에게 정기적으로 돈을 빌려야 했고 카미유 역시 세탁부 일을 해가며 고단한 삶을 꾸려가야 했습니다. 집세가 밀려 6개월 동안 그린 작품을 빼앗기는가 하면 밥을 굶는 일도 예사였는데요. 

모네는 굴하지 않고 줄기차게 출품을 했지만 보수적인 미술협회의 거부는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1869년 살롱전 에서도 낙선하자 그는 너무나 절망한 나머지 센 강에 몸을 던지고 말지 요. 다행히 바로 정신을 차리고 헤엄쳐서 나오긴 했지만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다니! 당시 그가 얼마나 참담한 심정이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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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는 카미유와 어렵게 결혼했습니다. 언제나 카미유가 있는 풍경은 모네에게 큰 영감이 되었고요. <해변의 카미유>(1870)는 신혼여행의 추억을 그린 작품입니다. ©위키피디아

끔찍할 정도로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후에 모네는 그래도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있어 그때가 행복했다고 회상을 했습니다. 당시에 그린 카미유와 아들을 담은 풍경화를 보면 그녀에 대한 사랑은 물론 그림 전체에 아득하게 퍼져 있는 행복한 공기가 손에 잡힐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소박한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모네의 그림이 팔리기 시작하면서 형편이 나아졌지만 어쩐 일인지 카미유의 얼굴은 점점 시들어갔어요. 파리 근교의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갔지만 카미유는 풍족한 생활을 누리지도 못하고 병석에만 누워 있다가 1879년 9월 32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둘째 아들을 낳은 지 고작 1년도 채 안 된 시점이었지요.

지금에 와서는 당시 카미유의 병을 자궁경부암으로 추정 하고 있는데요. 당시의 의학기술로는 어차피 치료가 힘들었겠지만 모네는 가난 때문에 그녀가 죽었다는 죄책감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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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빛과 색채에 미쳐 있었던 모네. 그는 카미유의 장례식 날에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점점 변해가는 얼굴빛을 포착하고는 그 자리에서 이젤을 펼치고 화폭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절친한 친구 르누아르는 무슨 짓이냐며 당장 멈추라고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는데요.

모네는 “내가 지금까지 그녀에게 해준 것이라곤 오직 그녀를 그림 속에 담아준 것뿐이었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그려주고 싶네”라며 눈물을 훔치며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 <죽어 있는 카미유>의 우측 하단에는 다른 작품들과는 다른 사인이 새겨져 있는데요. 클로드 모네 이름 끝에 깃발처럼 혹은 꼭 붙잡은 풍선처럼 하트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검은색 하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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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도서 『발칙한 예술가들』(일부 발췌) 

 

추명희 칼럼니스트,《발칙한 예술가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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