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나무 목걸이와 벌새가 그려진 자화상> ©위키피디아

사람들은 말합니다. 망각이야말로 인류 최고의 축복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오직 슬픔을 잊는 데 유용할 뿐 복수에 대해서라면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망각은 복수가 불가능할 때 하는 일종의 회피, 체념적 긍정이라고나 할까요. 자고로 고기는 씹어야 맛있고 복수도 해야지 제맛인 법이죠. 하지만 상대에게 고통을 앙갚음하는 복수는 통쾌하나 왠지 뒷맛이 씁쓸합니다. 그보다 상대를 뛰어넘은 후에 자비를 베풀어 용서 하는 것이 더 멋지겠죠.

그런 면에서 삶과 예술의 거의 모든 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혁명적 미술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는 그녀의 작품만큼 환상적인 복수를 감행했습니다. 바로 그녀의 남편 디에고에게 말이지요.


악마와 식인귀의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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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는 21세 연상의 바람둥이 화가 디에고와 결혼했습니다. 칼로의 가족들은 소문난 난봉꾼 디에고와의 결혼 생활이 정상적으로 이어질 수 있을 지 큰 고심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칼로의 선택은 변함없었습니다. ©위키피디아

 

고통을 예술로 승화했다는 표현은 아마도 그녀를 위해 탄생한 말이 아닐까요. 1907년 여름, 멕시코에서 태어난 프리다는 어린 시절 소아 마비에 걸려 오른쪽 다리가 쇠약해지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독일계였던 아버지 기예르모는 장애에도 굴하지 않고 의사가 되겠다며 당당하게 포부를 밝히는 딸을 멕시코 최고의 명문 중학교에 입학시켰지요. 하지만 그녀의 희망을 집어삼키는 첫 번째 거대한 파도가 그녀를 덮칩니 다. 소아마비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것이었지요.

1925년 9월의 어느 날, 그녀가 타고 있던 버스가 고장 난 전차와 충돌하면서 순간 버스 손잡이 철봉이 그녀의 몸을 관통했습니다. 기다란 쇠막대가 복부와 성기를 뚫고 허벅지를 통해 나왔고 척추와 갈비뼈 그리고 골반이 산산조각 나고 말았지요. 오른쪽 다리 역시 부서졌고 오른 발은 완전히 뭉개져버렸습니다. 의사들은 모두 그녀가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고 했지요. 몇 주가 지나고 기적적으로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몸은 견인기와 석고 깁스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프리다는 근 아홉 달 동안을 꼼짝없이 누워 천장만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그녀는 통증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지루함과 싸우며 깨닫게 됩니다.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오직 그림뿐이라는 사실을. 그녀의 아버 지는 그녀가 금속 코르셋을 끼고 누운 자세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그녀는 천장에 매단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손만 겨우 움직여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녀는 평생 55점이 넘는 자화상을 그렸는데요. 이것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그녀가 제일 잘 아는 주제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으니까요.

프리다는 자신이 예술가로서 재능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1928년 그녀는 자신이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를 찾아갑니다. 왕궁을 위한 벽화 작업을 하고 있던 그는 갑자기 나타난 예쁘장한 얼굴의 소녀가 첫눈에 사랑 스럽다고 느꼈습니다. 그림에 대한 평가를 기다리며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를 유혹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들은 곧 뜨거운 관계가 되었습니다. 멕시코 국민화가였던 디에고는 사랑의 무법자였습니다. 그는 이미 불륜으로 인해 두 번의 이혼을 한 상태였지요. 디에고는 늘 여러 명의 여자와 동시에 연애를 즐겼습니다. 하지만 프리다에게는 특별한 매력이 있었고 두 사람은 공산주의에 대한 열정적 신념을 공유하며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는 다른 여자들을 모두 정리한 후 프리다와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청혼을 받은 프리다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습니다. 1929년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22세밖에 안 된 딸이 43세의 바람둥이와 결혼을 하겠다니 프리다의 부모가 반겼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프리다는 죽을 때까지 의학적 치료를 받아야 하고 디에고는 그 천문학적인 비용을 감당할 만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었죠. 어쩌면 자신들의 딸을 보살 펴줄 수 있는 남자를 만나서 한편으론 다행이다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프리다는 짧은 생애 동안에 무려 서른두 번의 외과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프리다의 아버지는 디에고에게 부탁인지 경고인지 알 수없는 말을 했습니다. “명심하게, 그 애는 악마야.” 디에고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대답했지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디에고는 유명한 허풍쟁이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폭발 전문가이고 멕시코 전통 모자 솜브레로에 폭탄을 숨겨서 독재자 포르피리오 대통령 암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자랑삼아 말하곤 했는데요. 젊은 시절엔 의대생들의 집단 실험에 참여해서 인육을 먹은 적도 있다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그로 인해 ‘식인귀’라는 별명이 붙었지요. 악마와 식인귀의 결혼이라니 제법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하지만 둘의 결혼식을 지켜보며 사람들은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합이라고 놀렸습니다. 프리다의 친구들은 특히나 그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는데요. 평소에도 친구 들은 “디에고는 너무 뚱뚱하고 더럽고 못생겼다”고 대놓고 흉을 봤습니 다. 그럴 때마다 프리다는 침착하게 말했지요.

“디에고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다정하고 지혜로운 남자야.

나는 그를 목욕시키고 깨끗이 씻겨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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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부부는 한 동안 원만한 결혼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잠시였습니다. ©위키피디아

 

 

 

 

 

 

 

 

 

결혼 후, 프리다는 정말로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녀는 140kg에육박하는 남편 디에고를 어린이용 장난감으로 가득 채운 욕조에 앉혀서 직접 씻겨주었습니다. 프리다의 목욕 수발을 받을 때면 디에고는 원기를 회복하는 기분이 들었지요. 프리다는 이것을 일종의 경건한 의식 으로 여겼습니다.


인생은 인류 앞에 놓인 도전

결혼 후 몇 해 동안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집중했습니다. 디에고는 멕시코 토착 문화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프리다는 테우안테펙 지역 여자들의 화려한 의상을 즐겨 입었는데요. 독특한 수와 장식이 달린 블라우스에 긴 벨벳 스커트를 입고 금화로 만든 목걸 이로 치장하는 이 스타일은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지요.

이 시기에 그녀는 그림에서도 손을 놓았습니다.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아이를 갖는 것이었지요. 프리다는 임신에 성공했지만 불행히도 골반에 입은 손상 때문에 유산을 반복했습니다. 디에고는 출산이 그녀의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다는 의사의 권고를 받아들였지만 프리다는 절대 포기할 수 없었지요. 디에고의 아이를 낳는 것은 그녀의 꿈이었습니다. 그녀는 상실감을 이기기 위해 엄청난 개수의 인형들을 모았고 강아지와 거미원숭이를 비롯해 비둘기, 물수리, 칠면조, 앵무새 등 다양한 종류의 새들을 길렀습니다.

프리다가 모성애적 갈망과 싸우는 동안 디에고의 바람기는 봉인이 해제되고 있었습니다. 사실 식인귀라는 그의 별명은 단순히 인육을 먹었다는 괴상한 무용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닥치는 대로 여자들을 잡아먹는다는 뜻을 담고 있었는데요. 디에고는 정조를 지킨다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남자였습니다.

1935년 고삐가 풀린 디에고는 결국 프리다가 뱃속의 아이를 잃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있을때 그녀의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동침을 하기에 이릅니다. 프리다는 참담함을 견디지 못하고 그를 떠났지만 결국 잊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게 되지요. 대신 각자 자유로운 결혼 생활을 하기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프리다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들과도 다양한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녀의 일탈은 디에고에게 복수를 하기 위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디에고를 사로잡는 섹스 중독의 실체를 알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 습니다. 그녀는 작품 활동에도 열정을 불살랐는데요. 선혈이 낭자한, 고통을 표출하는 기존의 거친 스타일에서 벗어나 점차 정제되고 숙련 되기 시작합니다.

프리다가 창조한 낯선 세계는 세계 예술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뉴욕과 파리의 갤러리에 잇달아 초청을 받은 그녀는 가는 곳마다 칭송을 받게 되었지요. 프리다가 떨어져 있는 동안 디에고는 그녀가 자신의 정치적 영웅인 러시아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와 사랑을 나눈 사실을 알고 배신감에 치를 떨었습니다. 디에고는 화를 누르지 못하고 그녀에게 이혼을 요구했고 1939년 그녀가 멕시코에 돌아온 직후 이혼 수속을 밟게 됩니다. 프리다는 예상치 못한 디에고의 이혼 요구로 또다시 충격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가시나무 목걸이와 벌새가 그려진 자화상>에는 그리스도의 가시 면류관처럼 생긴 목걸이가 그녀의 목에 칼처럼 씌워져 있고 벌새 모양의 검은 펜던트가 암울하게 그려져 있는데요. 벌새는 전투에서 죽은 아즈텍 전사의 영혼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치적 동지였던 두 사람은 이혼 후에도 계속 만났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사실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일 정도였지요. 하지만 프리 다는 화가로서의 성공과 함께 재정적인 독립을 꿈꾸게 되었고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프리다의 홀로서기가 점점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잊고 있던 트로츠키가 그녀의 인생에 다시 등장합니다. 1940년 8월 어느 날, 트로츠키가 러시아 비밀경 찰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파리의 공산당 서클을 돌아다니던 프리다는 즉시 경찰에 끌려가 열두 시간이나 심문을 당하게 됩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주니어칼리지의 벽화 작업을 하고 있던 디에고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에게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올 것을 종용했습니다. 의지할 곳이 필요했던 프리다는 짐을 꾸려서 샌프란시스코로 떠났지요.

그해 12월 8일, 두 사람은 이혼한 지 1년 만에 재혼을 했습니다.

프리다는 샌프란시스코의 한 병원에 입원해 기력을 회복했고, 두 번째 결혼식을 앞둔 어느 날 그에게 편지를 씁니다.

“디에고, 내 사랑. 프레스코화를 끝내면 티격태격하지 말고 영원히 함께 오직 서로 사랑하기로 한 것만 기억할 거예요. 그 어느 때보다 당신을 사랑해요.”

프리다에게 드디어 평화가 찾아오는 걸까요? 그럴리가요. 디에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다른 여자의 침대에 뛰어들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그의 바람기는 거의 불치병 수준이었습니다. 게다가 재혼후 그는 프리다에게 자신의 불륜 관계를 숨기기는커녕 대놓고 알렸는 데요.

프리다 역시 그의 여자들에 대한 혐오감과 질투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면 프리다는 디에고가 특히 좋아하는 여자를 가리켜 “커다랗고 못생긴 젖통을 가지고 있다”고 비아냥거렸고 디에고는 “그 여자의 가슴이 그렇게 크지 않다”고 항변했습니다. 프리다는 “그건 당신이 그 여자가 누워 있을 때만 봐서 그렇다”고 쏘아붙였어요. 프리다는 디에고의 바람기를 체념하려고 노력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될리가 없습니다.

그녀는 “나의 인생에서 가장 큰 사고가 두 번 있었는데한 번은 교통사고고 나머지 한 번은 디에고와의 결혼”이라고 말했지요.

 

 표지.jpg 참고 도서 『발칙한 예술가들』(일부 발췌 285~288pp) 

 

추명희 칼럼니스트,《발칙한 예술가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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