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79년 10월 27일 아침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날은 중학생이었던 나의 작은 우주가 혼돈 속으로 빠져든 날이었다.

아버지는 미국 출장 중이었다. 학교에 가려고 준비를 하는데 아버지가 근무하던 병원의 앰뷸런스 기사 아저씨가 우리 집 벨을 눌렀다. 우리 동네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집에는 무시로 드나들던 아저씨였다. 우리의 등교 준비를 서두르던 어머니가 현관에서 아저씨를 맞았다. 놀라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나도 현관으로 나갔다. 어머니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셨대.”

그 당시는 인터넷이 물론 없었다. 텔레비전 아침 방송도 없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저녁 6시부터 밤 12시경까지 방송을 하고 그 다음날 저녁 6시까지 모든 텔레비전 방송국이 송출을 중단했다. 간밤에 일어난 일을 아는 방법은 조간신문을 보거나 라디오 뉴스를 듣는 것뿐이었다.

대통령 유고 소식은 당연히 우리에게는 아닌 밤중의 홍두깨 같은 소리였다. 현관에 어머니, 나, 기사 아저씨가 서 있을 때 전화가 울리고 어머니는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였다. 이미 미국에도 뉴스가 나갔다. 그다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잠시 뒤 도착한 조간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박정희 대통령 유고’라는 제목이 실렸던 것 같다. 청와대 바로 아래 궁정동에 있던 ‘안가’에서 사건이 일어났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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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서거를 알리는 조선일보 호외.

독재정권 하에서는 흉흉한 소문들이 많이 돈다. 여름이 되면 크리스마스 때 북한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겨울이 되면 6월에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1년 내내 전쟁 소문이 돌았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에 어머니가 커다란 개 인형을 사 주셨다. 나는 매일 밤 그걸 머리맡에 놓고 자면서 ‘자는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피난을 가더라도 이걸 잊지 말고 꼭 끌어안고 가야지’라고 마음먹고 잠을 잤다.

아직도 기억나는 덕산 제과라는 회사가 만든 왕돌이라는 불량식품은 포장지에 북한 간첩들의 암호가 들어 있다는 소문이 돌아 과자 이름을 금돌이로 바꿨지만 결국 사라졌다. 대통령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것도 그런 소문 중 하나일 거야’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미국에서 뉴스를 보고 전화를 하고, 조간신문을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평상시처럼 수업을 하려고 했지만 아무리 애들 앞이라도 무거운 분위기를 숨길 수는 없었다. 당시에는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가 있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통행금지를 두 시간 연장해서 밤 10시부터 실시했다.

술집들은 9일간의 국장 기간 아예 문을 닫은 집들도 있었다. 밤 8시만 되어도 서울 시내는 텅텅 비었다. 박정희 대통령 살아생전 그와 극한 대립을 했던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곧바로 오판하지 말라는 경고 메시지를 북한에게 날렸다.

장례식 날은 임시 휴교였다. 텔레비전으로 중계방송을 봤다. 광화문 거리는 인산인해였다. 전국에서 애도 인파가 몰려들었는지 당시 서울에서는 보기 힘들던 갓을 쓴 사람까지 보였다. 운구차가 광화문 거리로 내려오자 할머니들이 아예 길바닥에 주저앉아 땅을 치며 곡을 했다. 1979년 10월 27일 아침까지 나는 대통령은 죽지 않는 줄 알았다. 아니 죽을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태어나 그날까지 본 유일한 대통령이었던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1979년 10월 27일 아침은 내가 알고 지냈던 10여 년 짧은 세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던 2020년 12월 연말연시를 어머니와 보내기 위해 귀국했다. 2주간의 격리가 끝나고 나 혼자 서울성곽을 구간별로 차근차근 돌아보기로 했다. 서울성곽 여섯 개 구간 중 가장 힘들다는 백악 구간을 오르던 날 지하철 경복궁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궁정동을 지나며 생각했다.

'1979년 10월 27일 아침 나의 우주가 혼돈 속으로 빠져들 때 바로 그 몇 시간 전 눈앞에서 사람이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그 냄새를 맡고, 그 피로 옷이 흠뻑 젖었던 심수봉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무 생각도 못 했을 것 같기도 하다. 우리 가요사에 길이 남을 싱어송 라이터(Singer-Song Writer) 심수봉이 그 음악적 재능을 맘껏 펼쳐보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좌절과 시련이 있을지 그때 그녀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생의 마지막 날까지 듣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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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봉을 이야기하는데 <그때 그 사람>을 빼놓을 수 없다. 그녀를 스타로 만들어준 노래이고, 그녀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긴 노래이다. 《대학가요제》에서 피아노를 치며 ‘뚜룻 뚜룻 뚜루루’ 하며 노래를 시작할 때까지는 좋았다. 어라? 그 뒤부터 나오는 노래가 그 당시 용어로 뽕짝 즉 트롯이었다.

트롯은 젊은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노래는 이런 부류의 사람만이 듣는 것’이라는 편견의 벽을 깨면 심수봉이 본선에 진출한 것이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 영상을 찾아보면 긴장한 듯 평소보다 노래를 잘 부르지 못했지만, 하얀 호루겔 피아노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부르던 그녀의 노래는 영혼을 후비는 마력을 갖고 있었다. 《대학가요제》 본선에서는 낙방했지만 <그때 그 사람>을 녹음해 발매하며 데뷔하게 된다.

소문에 의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그 노래를 좋아해 음반을 사들여 돌렸기 때문에 음반 판매고가 올라갔다고 했다.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생의 마지막 날까지 듣던 노래이니 좋아했던 것은 맞는 말인 것 같다. 단 그 노래는 대통령 도움 없이도 방송만 조금 타면 크게 히트할 좋은 노래였다.

요즘 들어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을 들을 때면 ’박 대통령은 그 노래의 어떤 점이 끌려 좋아했을까‘라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외로운 병실에서’ 하는 대목에서 총에 맞아 사경을 헤매던 아내를 생각했을까? 1974년 8월 15일 죽어가는 아내를 병원에 남겨두고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지하철 개통식으로 가야 했다. 그가 결국 임종을 지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육영수 여사 사후 5년여 그가 삶의 의욕이 없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오래 살 이름, 심수봉

<그때 그 사람>이 히트하면서 이름을 본명 심민경에서 심수봉으로 바꿨다. 어머니가 역술인에게 물어서 유명해지고 오래 살 이름이라고 받아 왔다고 했다. 처음 들을 때는 그 이름이 촌스러워서 싫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오래 살 그 이름 덕에 그날 그 자리에서 그녀가 목숨을 보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항간에는 그녀가 못생겼다고 박정희 대통령이 병풍 뒤에서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1993년 그녀가 《주병진 쇼》에 출연해 이 소문이 가짜임을 분명히 했다. 그녀는 “아무리 못생겼다고 사람을 불러놓고 병풍 뒤에서 노래를 부르라고 하는 인심이 한국에 어디 있어요?”라고 했다.

<그때 그 사람>과 비슷한 시기에 방송에 종종 나오던 노래 두 곡이 있다.

하나는 <여자이니까>이다. 숭례문시장 남산 쪽 출구로 나가면 단암빌딩이라는 고층 건물이 있다. 외국 대사관들이 많이 입주해 있는 사무실 빌딩인데 1970년대에는 도큐 호텔이라고 서울에서 알아주는 호텔 중 하나였다. 심수봉은 《대학가요제》 출전 이전부터 이곳 나이트클럽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유명한’ 무명 가수였다. 나훈아는 그녀의 노래를 듣자마자 매료되어 그 자리에서 음반 취입을 주선하기도 했다.

음반은 무산되어 나오지 못했지만, 그때 녹음하려고 했던 <여자이니까>는 <그때 그 사람>과 함께 떴다. 이 노래는 최홍기 작사, 작곡으로 되어 있다. 나훈아의 본명이다. 그녀의 노래가 얼마나 훌륭했으면 나훈아가 곡까지 써주며 데뷔를 주선했다.

또 하나의 노래는 <축제 이야기>이다. 내 기억에 국제 가요제에 출품했던 곡이다. 세 곡의 노래 중 내가 제일 좋아했던 노래인데 유감스럽게도 방송에 그리 자주 나오지는 않았다. 당대 최고의 아이돌 스타였던 전영록이 함께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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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심수봉은 《순자의 가을》이라는 드라마의 자작곡 주제가를 불렀다. 하필 ‘여사님’의 이름이 순자였다. 당연히 이 노래는 금지곡이 되었다. 1983년 방미가 <올 가을엔 사랑할 거야>라는 제목으로 다시 불렀는데 당시 인터뷰에서 심수봉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아가며 불렀다고 한다. 노래를 들어보면 왜 야단을 맞았는지 알 것 같다.

녹음에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은 앞에 나오는 심수봉의 백코러스이다. 후에 심수봉이 같은 제목으로 재취입했다. 같은 노래도 심수봉이 부르면 이렇게 맛이 난다는 것을 느꼈다.

<순자의 가을>이 금지곡이 된 것은 그녀가 당할 고통의 서막에 불과했다. 단지 그때 그녀였다는 이유로 심수봉은 정신병원에 감금되기도 하고 방송 출연 정지를 당하기도 한다. 정신적으로 방황하던 시절 그녀는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하는 아픔도 겪었다.

방송 출연 금지를 당해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낸 끝에 해금되며 내놓은 곡이 1984년에 나온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이다. 경쾌한 리듬을 타고 흘러나오는 흐느끼는 여자의 이야기가 심수봉의 콧소리와 절묘하게 어울린다. 오랜만에 돌아온 심수봉은 이 노래로 단번에 스타의 자리를 되찾았다. 큰 히트였다. 심수봉뿐 아니라 이듬해 여름 나의 미국 유학 송별회 모임에서 소주병에 숟가락 꽂은 것을 마이크 삼아 콧소리까지 섞어 이 노래를 부른 나도 스타가 되었다.

 

날지도 못하는 새야 무얼 보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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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예능 '놀러와'에 출연해 파란만장했던 노래 인생을 풀어 놓는 심수봉. 방송 화면 캡처

‘이제 심수봉이 맘껏 음악 활동을 하나 보다’ 하던 것도 잠시였다. 그녀가 발표한 <무궁화>가 또 금지곡이 되었다. 심수봉은 제작비도 건지지 못해 또다시 큰 타격을 받았다. 나는 이 노래를 텔레비전의 군부대 위문 프로그램에서 처음 들었다. 음산한 콧소리로 망자의 혼이 찾아온 듯 부르던 그녀의 노래 때문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군인 장병들도 열광했다. 이 노래가 박정희 대통령을 회상하는 노래라는 소문이 돌았다. 노래를 들은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한창 자신이 부각되어야 할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이 다시 살아온 듯 섬뜩했을 것이다. 심수봉 자신은 딱히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노래는 아니라고 한다.

대중가요의 가사는 대중들에게 보편적으로 다가가야 하기에 꼭 한 가지 사건을 꼬집어 가사를 쓰지는 않았다. 조사 나온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누누이 설명했지만, 그런 설명이 먹히는 세상이 아니었다. 그들이 가서 완전히 다르게 보고를 하는 바람에 이 노래는 금지곡이 되었다. 최고 권력자가 제왕이 되는 것의 반 이상은 선동하며 미쳐 날뛰는 과잉 충성자의 책임이다. 

나는 <무궁화>를 요즘도 즐겨 듣는다. 2절의 시작 ‘날지도 못하는 새야 무얼 보았니. 인간의 영화가 덧없다 머물지 말고 날아라’라는 구절이 좋다. 문뜩문뜩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이 사실이다. 심수봉이 펴낸 자서전 『사랑밖엔 난 몰라』의 10·26 장면을 세 번 정도 읽었다.

심수봉이 총에 맞고 피가 흘러나오는 박정희 대통령을 품에 안았을 때 ‘종이처럼 가벼웠다’는 말을 했다. 난 <무궁화>의 2절 첫 구절을 들을 때마다 심수봉의 그 말을 생각한다. 18년간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낸 그였지만 마지막 가는 길 어린 가수가 품에 안았을 때 종이처럼 가벼웠다. 인간의 영화가 덧없다. 

 

* 심수봉 下편에서 계속...

 

이철재 미국 변호사, 《뉴욕 오디세이》 《나도 바흐를 즐길 수 있을까》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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