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영화 <82년생 김지영>,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소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정유미와 공유의 진심

유슬기 기자 |  2019.10.22
*영화 및 소설 내용 있습니다.

지영82년에 태어난 여아 중 가장 많이 등록된 이름이었다. 지금의 서연같은 이름이다. 2016년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출간될 당시, 소설 속 김지영의 나이는 서른 네 살이었다. 26개월 딸아이를 키우고 있고, 3살 연상의 남편과 수도권의 대단지 아파트 24평 전세로 거주 중이다. 12녀 중 둘째로 태어난 김지영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취업난 속에서 홍보회사에 입사한다. 첫 출근하던 날, 그는 아직 마르지 않은 긴 머리에 샴푸향을 휘날리며 현실과 이상 사이의 어디멘가를 씩씩하게 걷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 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게 감사했고, 자료를 찾아 분석하고 마케팅의 방향을 제시하는 일은 나름의 보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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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불행했던 건 아니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지영은 자신이 가고팠던 기획팀에 합류하지 못한다. 기획팀은 5년 이상 장기프로젝트를 수행해야 하는 팀이었고, 회사는 출산이나 육아로 근무의 연속성을 장담할 수 없는 여직원은 아예 팀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실제로 지영은 결혼 이후 딸 아영을 출산하게 되면서 경력이 단절된다. 지영의 남편 대현은 다정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조차, 명절마다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어른들의 압박에 내가 많이 도울게” “기저귀도 내가 갈게정도의 대안을 제시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두사람은 '2년을 연애하고, 3년을 함께 살며, 빗방울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눈송이처럼 서로를 쓰다듬었고' 자신들을 반씩 닮은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아영이 세상에 태어나고, 대현이 회사에 출근한 뒤의 시간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 지영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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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불행했던 것은 아니다. 꽤 행복한 순간도 많았다. 하지만 출구가 없는 벽에 갇힌 느낌이다. 요일의 구분이 없는 매일의 연속, 아이의 몸무게가 늘어갈수록 느슨하고 헐거워지는 손목과 허리의 근육들, 생기가 사라진 지영의 얼굴과 그렇게 멍하게 베란다에서 해질녘 노을을 바라보는 지영의 등을 카메라는 오래오래 비춘다.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일상적인 구조의 문제    

영화에는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각자에게 정해진 시간에 태어나, 주어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이름을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성별로 몇 째로 어떤 지역에서 어떤 가정에 태어날지도 선택할 수 없다. 지영의 엄마인 미숙은 맏딸로 태어나 오빠들과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청계천에서 미싱을 돌렸다. “그 때는, 그런 시대였다고 미숙은 말한다. 형제자매 중에 공부를 제일 잘했고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어린 지영은 묻는다. “그럼 지금 하면 되잖아”, 미숙은 답한다. “지금은 지영이 엄마 해야지 

지영이 소설이나 영화에서 때로 다른 사람이 되어 그들의 목소리를 내는 건, 빙의이거나 정신질환이라기 보다는 지영의 삶 속에 녹아든 모두의 목소리다. 그의 어머니, 그의 외할머니 그리고 그와 동시대를 사는 여성들의 목소리다. 삼남매 중 둘째인 지영은 평소 자기 목소리를 많이 내는 편이 아니다. 그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은 괜찮아이거나 고마워. 그가 그나마 자기 속 이야기를 할 때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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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연휴, 지영은 시댁에 있다. 이튿날 시댁에서 친정에 온 자신의 딸에게 줄 음식을 내오라는 시어머니에게 지영이 사부인, 저도 제 딸보고 싶습니다라고 말 할 때나, 딸에게 이상증상이 나타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친정 엄마에게 지영이 걱정하지마라, 나름 강단 있게 키웠잖니라고 외할머니의 목소리를 빌어 말할 때 지영의 눈빛은 또렷하고 목소리는 명징하다.

 

여성이 아닌 사람, 김지영이 아닌 모두의 이야기   

조남주 작가는 이제 김지영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살기를 바란다고 했다. 영화를 만든 김도영 감독은 우리가 어떤 곳에서 살아왔고, 살고 있고, 앞으로 살아가야 될까를 고민하는 영화라고 했다. 영화에 출연한 배우 정유미와 공유는 이는 여성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며, 모두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소설이 그랬듯, 영화도 개봉 전부터 논쟁에 휩싸였다. ‘싸우자는 영화가 아닌 건 보면 아는 데도, 보기 전부터 싸우자는 이들이 많다. “60년대도 아니고 80년대 생에게 차별이 어디 있었느냐등의 반응이 나온다. 당사자가 있다고 하는데 우리집엔 없었다고 하면 대화가 산으로 간다. 아니 대화 자체가 어렵다.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사서 유모차를 끌고 나오는 김지영에게 나도 신랑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커피나 먹으며 살고 싶다는 이들이나, 아영의 돌발 행동으로 커피를 쏟은 지영에게 저러니 맘충 소리를 듣지라고 말하는 이들은 생각보다 도처에 있다. 그리곤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 우리끼리 한 말이라며 지영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든다. 지영은 이제 다른 사람이 되지 않아도, 자신의 소리로 물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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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주려고 애쓰세요?”  

소설이 나온 2016년과 영화가 나온 2019년의 결은 또 미세하게 달라졌다. 어떤 면에서는 더 사나워졌고, 어떤 면에서는 함께 나아가고 있다. 지영이 미숙보다는 좀 더 나은 세상에 살았듯, 아영은 지영보다는 좀 더 평평해진 세상 위에서 살 수 있을까. 영화는 1023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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