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은진 ‘스테디 스테이트’ 대표

남성 셔츠 만드는 젊은 여성 장인

사실 하나, ‘남자에게 수트는 전장의 갑옷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멋을 아는 남자에게 셔츠는 피부와 같다.’ 멋쟁이들에게 피부나 다름없는 드레스 셔츠를 일일이 손으로 만들어주는 여성 디자이너가 있다. 스테디 스테이트(Steady State)의 안은진 대표.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지만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패션스쿨과 이탈리아의 최고급 수트 브랜드 ‘브리오니’ 출신의 장인이다.
스테디 스테이트는 맞춤셔츠 전문 브랜드다. 예약제로 주문 받으며 고객의 치수를 잰 후 고객이 원단과 패턴, 칼라와 커프스 등의 디테일을 고르면 그에 맞게 셔츠를 제작해준다. 수트가 아닌 오직 셔츠만 다뤄서인지 스테디 스테이트 매장에는 그 흔한 마네킹조차 없다. 대신 하늘하늘한 셔츠들과 곳곳에 전시된 각종 칼라, 커프스가 매장을 채우고 있다. 그 가운데 늦여름의 햇살을 받으며 한 머리 긴 청년이 바느질을 하고 있다.

이 장발 청년은 홍보 디렉터 김용현씨다. 직함은 홍보 디렉터지만 셔츠 제작에도 참여한다. 얼핏 보면 가내수공업 같다. 한남동 아틀리에에서 안은진 대표와 김용현씨 두 명이 수작업으로 셔츠를 만들다 보니 대량제작이 힘들다. 생산량은 보통 1주일에 열 벌 정도. 한땀 한땀 정성을 쏟은 결과는 눈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소매나 옆구리 트임을 덧댄 부분의 체크 패턴이 한 치의 엇갈림 없이 일치한다. 이것이 안은진 대표의 자부심이다.

“효율성은 떨어지지만, 정확성과 견고성은 저희가 생명처럼 여기는 부분이에요. 좋은 퀄리티를 꾸준히 유지하고 싶습니다.”

안은진 대표는 이러한 철학을 ‘스테디 스테이트’라는 브랜드명에 담아냈다. 그녀는 셔츠와 부속물을 보여주면서 셔츠 제작에서 신경 쓰는 부분을 자세히 설명했다. 스테디 스테이트의 셔츠는 인치당 18~21땀의 촘촘한 바느질로 제작된다. 소매 트임의 끝은 손바느질로 견고하게 처리하고 단추를 꿰는 방식은 고객이 선택할 수 있다. 어깨에는 수작업으로 셔링을 넣어 슬림한 핏의 셔츠임에도 활동성을 높였다. 고급 셔츠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칼라도 여러 모델이 있다. 입체 패턴으로 짠 칼라는 그냥 봐서는 모르지만 입어보면 목에 착 감긴다. 셔츠는 곳곳이 곡선으로 강조되어 있다.


“모양이 멋진 옷보다는 입었을 때 편한 옷이 좋은 옷이죠. 곡선 디자인은 입었을 때 착용감이 확실히 달라요. 남자 옷은 아무리 근사해도 그 옷을 입은 사람이 편안함을 느낄 때 더 멋있어요. 그런 모습이 매력적이죠. 이탈리아의 여성 셔츠장인 안나 마투오조가 만든 옷을 입은 남자는 여자에게 인기를 얻는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녀처럼 여성의 감성을 남성의 옷에 담아내고 싶어요.”

스테디 스테이트의 고객은 주로 30대 후반에서 50대의 전문직 종사자들. 평소 옷에 관심이 많고 관련 지식도 풍부한 고객들이라 그는 셔츠를 제작하면서도 신이 난다고 한다. 취향이 확실하고 셔츠를 맞추는 이유가 분명한 사람들이어서 작업하기 편하기 때문이다. 셔츠에 라이프스타일, 가치관 등을 반영하기 때문에 주문 받을 때 상담 시간이 길다. 짧게는 30분, 길게는 1시간이 넘어간다. 매장에는 장시간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도록 카페같이 편안한 의자가 놓여 있다. 일부 고객은 자신만의 패턴 제작에 직접 참여하기도 한다. 세 벌 이상 맞춘 고객은 자신의 패턴을 제작할 수 있고, 고객이 원할 경우 스테디 스테이트의 디자인으로 판매하기도 한다. 고객이 디자이너가 되는 셈이다.

멋쟁이 남성들과 남성복을 이야기하는 여자 안은진 대표. 그는 어떻게 남성복을 만들게 됐을까. 그는 어려서부터 멋쟁이 집안에서 자랐다. 예술가였던 할아버지는 언제나 멋들어진 수트를 입었고, 삼촌들도 외국에서 패션업계에 종사했다. 가족 중 멋내기에 가장 서툴던 그의 아버지도 수트를 입으면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 ‘옷이 날개’라는 말은 남자들에게 더 맞는 것 같았다. 수트는 아름다움을 넘어 남자의 격(格)을 드러내는 옷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성장한 그는 자연스럽게 패션계에 입문했고, 한국에서 공부하다가 파리 유학을 결심한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패션스쿨 중 하나인 에스모드 파리(Esmod Paris)에 편입한 후 남성복을 공부했다. 남성복의 세계는 결코 쉽지 않았다. 남성의 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만든 수트는 남학생들의 작품을 따라가지 못했다. 대신 누구보다 열심히 배웠다. 구두 뒷굽이 빠진 것도 모르고 뛰어다니면서.

“선생님이 화가 나서 ‘100벌 그려 와’ 하시면 밤을 새워서 100벌을 그려 갔어요. 정말 열심히 했죠. 성적표에도 출석 점수는 제일 좋았어요(웃음).”

그가 만든 수트는 남들보다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셔츠만큼은 달랐다. 곡선미를 강조한 그의 셔츠는 다른 학생들 셔츠보다 감성적이고 섬세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만든 셔츠를 멋지게 입은 남성을 보면 뿌듯했다. 안 대표의 셔츠에 대한 애착은 이때 시작됐다. 그는 에스모드 파리 졸업 후 프랑스에서 일하다 한국으로 돌아와 이탈리아의 최고급 남성복 브랜드인 브리오니에 입사했다. 자신의 마지막 커리어가 브리오니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던 안 대표에게 예상치 못한, 다소 이른 기회였다. 3년 동안 이탈리아 본사로부터의 수입을 기획하는 바잉 MD로 일하면서 최상급 퀄리티의 옷을 다뤘다. 선배들로부터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좋은 옷을 보는 안목을 키우는 것은 즐거웠다. 그러나 브리오니의 옷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더 많은 남자들에게 멋진 옷을 입히고 싶었다. 그는 꿈의 직장이었던 브리오니를 나왔다. 그리고 올해 5월, 자신만의 셔츠 브랜드 ‘스테디 스테이트’를 만들었다.


스테디 스테이트는 예상보다 일찍 안착했다. 별다른 홍보도 안 했는데 멋쟁이들의 입소문을 타고 점점 고객이 늘었다. 이곳의 셔츠를 입어본 고객은 이탈리아의 유명 셔츠에 뒤지지 않는 수준 높은 맞춤 셔츠가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안은진 대표는 “이제 시작”이라면서 “최고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고 말한다. 젊은 장인의 겸손함일 것이다. 자신이 만든 하얀 셔츠를 단정하게 고쳐 입는 안은진 대표에게 좋은 옷이 무엇이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사람이 먼저가 되는 옷이죠. 옷 자체만 잘난 옷은 애물단지예요. 편하게 앉지도 못하고 비 오면 신경 쓰이잖아요. 옷을 입었을 때 옷만 보여도 안 되죠. 그 사람의 얼굴과 체형, 취향, 직업 등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면서 그를 더욱 빛내주는 옷, 그런 옷이 좋은 옷이에요.”

멋진 옷은 비싼 옷이 아니라 입은 사람을 멋지게 만들어주는 옷이다. 그래서 좋은 옷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더 많은 이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싶다는 안은진 대표는 오늘도 누군가를 빛내줄 셔츠를 만들기 위해 아틀리에에 앉아 바늘과 실을 집는다.

사진 : 김선아
  • 2011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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