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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이 만난 우리 시대 미술가] 화가 이세현

한국적인 삶이 담긴 풍경을 그리다

이세현
1967년 통영 출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대학원 졸업, 영국 첼시 미술 디자인대학 석사 졸업. 1997년부터 런던 유니온 갤러리, 헤어우드 하우스, 뉴욕 니콜라스 로빈슨 갤러리 등에서 10여 회 개인전을 가졌다. 베이징의 핀 갤러리, 대전시립미술관, 인도 더 길드 갤러리, 제주도립미술관, 학고재 갤러리, 부산비엔날레, 상하이 민생미술관, 베이징 아트 사이드 갤러리, 독일 보쿰 미술관, 이스탄불의 산트랄이스탄불 뮤지엄, 취리히 아트 시즌 갤러리, 서울시립미술관, 뉴욕 노이버거 뮤지엄, 이탈리아 아레초 현대미술 갤러리, 비엔나 엥겔호른 갤러리 등의 주요 단체전에 참가했다. 그의 작품은 국내외 주요 단체에 소장되어 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이틀 뒤, 화가 이세현은 베니스로 출발했다.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전 〈Pass Picture〉에 그의 작품 〈Between Red〉 시리즈가 출품되었기 때문이다. 직전인 5월 27일까지는 뉴욕의 니콜라스 로빈슨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6월 30일까지 베이징의 대형 갤러리인 핀 갤러리에서 중국·인도·한국의 유명 작가들과 함께 단체전을 갖는 등 바쁜 일정이 이어지고 있었다. 파주에 있는 작업실에는 이제 막 새로 시작한 작업들만 있었다. 이 작품들도 완성되면 하반기에 있을 여러 전시를 위해 해외로 나갈 예정이다. 햇살 좋은 일요일 한껏 여유 있는 시간에 편하게 인터뷰가 이어졌다. 그는 자주 한옥과 주변의 풀과 나무들에 대해서 말했다. 한국의 풍경을 그리는 작가답게 우리 주변을 바라보는 눈길이 정겹다.

화가 이세현을 널리 알린 것은 〈Between Red〉라는 이름이 붙은 붉은색 산수화다. 붉은색 한 가지로만 그린 이 작품들을 발표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런던에서 유학을 마칠 무렵인 2006년이었다. 이 작품들로 그는 취리히・런던・포츠머스・밀라노 등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마크 퀸 등 해외 유명 작가들의 개인전이 열린 영국 리즈의 헤어우드 하우스에서 2009년 한국 작가로서는 최초로 개인전이 열렸다. 작가로서 모든 것이 술술 풀리고 있었기 때문에 2009년 말 그가 귀국하고자 했을 때 만류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 미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그를 한국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그는 “글로벌 시대에는 민족적인 것을 더욱 탐구하고 당대의 우리 삶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성찰은 오늘의 이세현을 있게 만든 가장 큰 동력이고 우리가 그에게 기대를 걸어도 좋은 이유 중 하나다.

이세현의 붉은 산수화는 군복무 시절 야간투시경으로 바라본 DMZ 풍경에서 시작되었다. 야간투시경은 군사적인 이유 때문에 오히려 자연이 완벽하게 보존된 DMZ의 풍경을 붉은색으로 보여주었다. 그 풍경은 “아름다우면서도 서글펐다.” 이 시각적인 체험을 이세현은 화폭에 옮겼다. 강렬한 붉은색은 분단현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아름다움과 슬픔이라는 상반된 감정, 자연과 역사(분단현실)가 하나의 고리를 만들면서 그의 그림 속에 공존한다. 또한 한국화의 원리와 서양화의 원리라는 두 가지 요소가 그의 작품을 매력적인 긴장감으로 채워준다. 개별 풍경들은 서양식 원근법에 입각해서 그려 손에 잡힐 듯 입체적이지만 그 전개는 한국의 전통 회화처럼 평면적이고 비원근법적인 나열과 중첩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까이서 보면 하나하나의 풍경이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붉은색과 흰색 여백의 구성을 덩어리로 느낄 수 있다. 붉은색 풍경의 편린들을 그린 회화적인 원숙함과 이것들을 배치하는 디자인적인 구성감각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것도 그의 작품의 매력이다. 풍경의 배치에 담긴 숨은 리듬감을 느껴보는 것도 즐거운 감상법이다.

Between red-100, Oil on Linen, 300×300cm, 2009.
정치적인 측면에서만 그의 작품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풍경화는 기본적으로 ‘유토피아에 대한 동경’을 담고 있는 장르다. 개별 풍경을 콜라주하듯이 그리다 보니 여러 풍경이 고립된 섬처럼 표현되기도 하지만 많은 섬이 등장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세현은 예향 통영 출신이다. 아름다운 다도해 풍경을 실컷 보고 자랐다. 아름다운 고향에 대한 기억 속에는 슬픔이 또한 깃들어 있다. 작업실에는 어머니의 빛바랜 사진이 여전히 남아 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슬픈 풍경을 만든다. 어머니의 생전 소원은 세계여행이었는데, 유언대로 화장하여 동산, 생가, 해안선 등을 따라 뿌려드렸다. 몇 년 뒤 유학을 떠나기 전 그곳에 다시 갔더니 어머니의 흔적이 담겨 있던 풍경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졌다. 어머니의 무덤을 함부로 한 청개구리가 된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 아름다운 풍경의 소실과 소중한 기억의 소실은 그렇게 하나로 연결되었다. 최근의 그림에는 바닷가의 허름한 횟집, 가로등이 켜져 있는 정겨운 골목길 풍경이 자주 등장한다. 난개발로 사라져간 원래 풍경을 그는 그림 속에서 보존하고자 한다.

Between Red-85, Oil on Linen, 300×400cm, 2009.
이세현의 붉은 산수화에 대한 아이디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그가 영국에 유학을 가면서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예고에서 교편을 잡았던 그는 서른아홉 늦은 나이에 유학길에 오른다. 딱 2년간만 원 없이 작업해보자고 생각했다.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다는, 작업으로 진검승부를 하겠다는 절박한 마음이었다. 입학 초기 외국 교수들 앞에서 그간 해온 작품들을 외국 이론을 빌려서 설명하면서 그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의 40년 삶을 결정지었으며, 정서의 깊은 곳에 쌓여있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영국 유학은 학위취득보다 자신의 발견이라는 측면에서 더 중요한 시간이었다.

Between Red-78, Oil on Linen, 200×60cm, 2008.
“런던에서 나를 만들고 나를 있게 한 풍경을 떠올렸다. 이 고민은 문화적 차이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서양의 것이 동양의 것보다 더 우월한 것은 아니다. 다만 서로 다른 것일 뿐이다. 그리고 차이의 핵심은 자연이다. 주어진 자연에 적응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것이 문화다. 차이의 근원인 자연의 모색은 풍경화로 이어졌다. 겉으로 보이는 풍경도 중요하지만, 풍경 안에서 벌어지는 일, 그 정치적 이데올로기 사건 때문에 벌어지는 일도 보여주고 싶다.”

Between Red-101, Oil on Linen, 300×300cm, 2010.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산수화를 그린 겸재 정선이 최고의 컨템퍼러리 작가라고 주장하는 그는 “자기 문화, 자기 역사에 대한 인식 없이 작품을 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차별화된 자기 문화를 배경으로 당당해져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한국적인 것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은 이세현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이다. 한국 작가인 이세현, 그는 한국에서 한국적인 삶을 담아내기 위해 한국 풍경을 수집하기에 여념이 없다. 얼마 전에도 사진 촬영차 여수에 다녀왔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보는 풍경이 아니라 자연에 뛰어들어 몸으로 체감하는 풍경이 그에게는 늘 소중하다. “한국의 풍경은 아기자기하고 어여쁘다. 친근하면서도 자그마한 섬들과 돌산이 만들어내는 풍광은 예쁘기 그지없다. 우리의 삶과 함께 녹아 있는 이 풍경이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여행을 하다가 공장・모텔들이 시골 풍경을 점유하고 있는 몰개성한 장면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풍경을 사라지게 만들기도 하고 새롭게 만들기도 하는 모든 것이 인간의 일이다. 그리고 풍경을 매개로 인간사가 그의 그림 속에 녹아들고 있다. 붉은색 산수화 이후의 새로운 그림에 대한 구상과 전시 일정으로 그의 행보는 바쁘기만 하다.

사진 : 김선아
  • 2011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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