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작품을 가전제품 디자인에 접목시킨 정길수 LG전자 DA디자인연구소 책임연구원

‘상상의 여지’가 있는 가전제품 만들어요

2000년부터 매년 시장점유율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LG 휘센 에어컨. 시장을 선도하는 제품인 만큼 새로운 것을 보여 줘야 한다는 부담도 크다. 올해 내놓은 비장의 카드는 ‘아티스트와의 만남’이다. ‘꽃의 화가’ 하상림, 유리조각가 이상민, 조형예술가 김지아나, 설치작가 함연주, 색채 예술가 수지 크라머 등의 작품이 에어컨과 만났다.

휘센이 선택한 아티스트들의 작품은 장식적이라기보다 실험적이다. 그래서 더 긴 울림을 남긴다. 가전제품에 접목시킬 때 작품 그대로를 패턴으로 만드는 게 불가능해 어떤 소재와 디자인으로 작품세계를 제품에 구현할지 끊임없는 연구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렇게 나온 제품들이 소비자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일반 에어컨보다 훨씬 비싼 ‘프리미엄 존’ 제품인데도 스탠드형 에어컨 매출의 50%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는 것. 작가의 에디션처럼 한정판매할 예정이었는데, 주문이 쏟아져 생산량을 늘렸다고 한다.

‘아티스트와의 만남’을 주도한 LG전자 DA디자인연구소의 정길수 기획그룹 책임연구원을 역삼동 DA디자인연구소에서 만났다. 디자인이 가전제품의 핵심 경쟁력으로 떠오른 시대. 특허기술 이상으로 디자인이 기업의 중요한 지적재산권이 되고 있다. 역삼동 GS타워 디자인연구소에 들어가면서 신분증과 바꾼 전자 출입카드는 기자가 움직이는 동선을 모두 기록한다고 했다. 예약해 놓은 층 외에는 자유롭게 오르내릴 수도 없었다.

2009년 제품 디자인이 한창 마무리 작업 중이라 ‘對外秘’를 지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 함께 자리한 홍보팀 과장은 인터뷰 시작 전 정길수 책임연구원에게 “아직 출시하지 않은 제품의 디자인에 대해서는 한마디 힌트도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재차 당부했다.

디자인연구소에는 디자이너들이 끊임없이 자극을 받으면서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돕는 장치들이 구석구석 숨어 있었다. 출입구에 설치된 모니터에서는 유럽의 인테리어 박람회 등 최신 트렌드를 볼 수 있는 화면이 돌아가면서 나오고 있었고, 작업실에는 세계 곳곳에서 수집해 온 디자인 상품들이 조르륵 놓여 있었다. 정길수 책임연구원은 “가전제품을 디자인하지만 인테리어와 가구, 패션, 자동차의 최신 트렌드까지 꿰뚫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해 그 해 유행을 선도하는 패션이 인테리어와 가구, 자동차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분석하는 게 가전제품 디자인의 트렌드를 내다보는 데 도움이 된다고. 10년은 쓸 가전제품을 디자인하는 일이라 더 멀리 내다보는 시야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오래 쓰는 제품을 디자인하는 만큼 시시때때로 느낌이 달라지면서 싫증이 나지 않는 게 추구하는 방향. 그래서 일찍이 예술과의 접목을 생각해 왔다고 말한다.

“작가의 꿈과 철학을 담고 있는 예술작품은 보는 사람 각각에게 상상의 여지를 남깁니다. 예술작품의 그런 특질을 가전제품과 접목시키면 디자인을 한 차원 업그레이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요.”

그가 처음 찾아낸 작가는 하상림. 하상림이 그리는 꽃은 구체적으로 어떤 꽃인지 명명할 수 없는 추상적인 꽃으로, 색도 배제되어 있다. 단색 화면에 잿빛 꽃들이 떠다니는 것 같은 작품. 이 꽃은 양과 음, 존재와 무,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 등 여러 가지 은유를 담고 있다. 2005년 하상림의 작품을 본 정길수 책임연구원은 단번에 ‘우리가 찾던 이미지’라는 감이 왔다고 한다.

고흐 하상림ㆍ이상민 씨의 원작.

크리스털을 한 알 한 알 박아 수공예하듯 만든 에어컨

“가전제품 디자인에 접목할 작품을 찾을 때 몇 가지 기준이 있었어요. 상상의 여지가 있어야 한다, 직설적인 표현이 아니어서 항상 새롭게 보여야 한다, 모던하면서 심플하고 스마트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상림 작가의 작품이 그랬지요.”

패턴을 빽빽하게 채워 넣기보다 여백의 미를 살리는 요즘 디자인 트렌드와도 맞았다. 하상림 씨를 만난 정길수 책임연구원은 “순수예술이 갤러리나 컬렉터의 전유물은 아니지 않는가? 당신 작품을 대중이 사용하는 물건에 접목해 보자”고 설득했다. 하상림 씨는 “일단 해 보시죠. 그러나 결과물이 마음에 안 들면 작품 쓰는 걸 허락할 수 없어요”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리 물질만능 사회라지만 예술가에게 돈은 판단 기준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 만든 창조물에 대한 애착과 사랑이 대단했죠. 제 자신에 대해서도 다시 돌아보며 디자인을 시작하던 첫 마음을 되살리는 계기가 됐습니다.”

빛의 화가 고흐, 꽃의 화가 하상림, 유리조각가 이상민 씨 작품을 접목시킨 에어컨.
정길수 책임연구원이 가전제품 디자인을 시작한 것은 1992년 4월.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후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에 입사하면서부터 줄곧 가전제품 디자인을 했다.

“처음에는 제가 디자인한 제품을 파는 곳에 가서 고객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엿듣곤 했습니다. 신혼부부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물건을 사러 와서 ‘저거 예쁘다’, ‘쓰기 편하겠다’고 말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이 일고 행복했지요. ‘별로다’라는 소리를 들으면 몇날 며칠을 고민했고요.”

하상림의 꽃은 2006년 아트디오스 냉장고에 처음 등장해 인기를 끌면서 세탁기, 오븐, 김치냉장고, 공기청정기와 에어컨 등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 와인, 골드, 화이트 등 다양한 바탕색에 꽃을 얹어 인테리어 분위기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정길수 책임연구원이 유리조각가 이상민 씨가 물의 파동을 유리로 조각한 작품을 본 게 2006년. 예술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투명하게 반짝이는 소재가 요즘 트렌드와 맞겠다는 생각에 눈이 번쩍 뜨였다. 처음에는 진짜 유리를 사용하려 했지만 너무 무거워 찾아낸 게 특수 아크릴이었다. 불순물이 적어 유리와 비슷한 투명도를 지닌 소재. 이상민 씨의 작품을 3D로 스캔해 아크릴에 원형 그대로 가공했다. 아크릴 조각 뒷면에 조명이 12가지로 바뀌어 가며 비치는 게 특징. 이 제품은 한정 생산할 생각으로, 500만 원 중반대의 높은 가격에 내놓았는데 반응이 좋아 물량을 늘렸다.

에어컨을 디자인한 디자이너들과.
조형 예술가 김지아나 씨 작품은 2007년 초 팀원들과 갤러리 투어를 하면서 발견했다. 볼 형태의 세라믹이 한 벽면을 꽉 채우고 있었는데, 회오리가 몰아치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었지만 요즘 트렌드에 맞는 크리스털 소재를 사용하면 가전제품으로 ‘번안’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직접 디자인에까지 참여한 제품. 세라믹볼 대신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로 작품 이미지를 살리면서 바탕은 보석과 가장 잘 어울리는 와인으로 선택했다. 회화작품에서 붓으로 터치를 쌓아 가듯 다양한 톤의 레드를 겹겹이 칠해 지중해 회벽 느낌의 텍스처를 살린 게 특징. 대량생산이 기본인 가전제품에서 수공예적인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크리스털에 조명이 비치면서 영롱하게 빛나는 제품이다. 함연주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모아 작품을 만드는 작가. 우연히 텔레비전 아침방송에서 그 작가의 작품을 보고 ‘생명의 씨앗’ 이미지가 좋아 디자인에 활용했다고 한다.

거실에 세워 두는 스탠드형 에어컨의 경우 집안 인테리어에서 중심 역할을 한다. 여기에 예술작품이 접목되면서 소비자들이 가전제품도 작품의 하나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 정길수 책임연구원은 “이제 가전제품이 감성적 가치까지 전달하는 시대로 가고 있다”고 말한다.

사진 : 장성용
  • 2008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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