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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발 예찬

일러스트레이터 이다

천천히 걸어야 보이는 것들

글 : 유슬기 기자  / 사진 : 서경리 기자  / 그림 : 이다 

해외에 갈 수 없으니 동네를, 자동차가 없으니 두 발로, 길을 걸었다. 손에는 스케치북 하나와 필기구를, 가방에는 돗자리와 주전부리를 넣었다. 일러스트레이터 이다(2da・본명 정한별)가 꾸준히 ‘그림 그리며 사는’ 비결 중 하나는 걷기다. 그가 수집한 아주 작은 풍경들은 그에게 커다란 영감이 되고 근사한 작품이 됐다.

#덕업일치 #저질체력도오케이 #무일푼도오케이 #핸드메이드그림 #풋메이드감성
그림을 그리며 사는 게 꿈이었다. 어릴 적에는 “그런 꿈 꾸면 살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림은 장래희망 대신 취미칸에 적었다. 현재 그는 주변의 우려와는 달리 어엿이 그림을 그리며 살고 있다. 하지만 안다. 그림과 꿈, 좋아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이 둘을 연결 짓기 위해 20대와 30대를 얼마나 부단히 고단하게 보내야 했는지.


경상북도 포항에서 태어난 작가는 “사람이 크려면 서울로 가야 한다. 뭘 이루지 못해도 서울 가서 살아라”는 부모의 지원에 스무 살, 대학에 진학하면서 서울로 왔다. 성적에 맞춰 온 학과의 공부는 적성에 맞지 않았고, 대신 수업시간에 누런 크라프트지로 된 노트에 그림을 그렸다. 습작들을 홈페이지 ‘이다플레이’에 올렸는데, 그의 이야기는 문화계에서 일약 화제가 됐다. 누드화로 그려진 그림일기는, 체면치레를 벗은 속살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스물둘 여대생의 이야기는 2003년 《이다의 허접질》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이른 나이에 유명해지면 먹고살 걱정은 없을 줄 알았는데, 대외적인 유명세와 먹고사니즘은 별개였다. ‘그림 그리면서 살겠다’는 꿈을 향해 그는 운동화 끈을 야무지게 묶었다. 비정규직 미술 노동자의 눈물겨운 자력갱생기. 그가 지나온 길에 무임승차는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발도장을 찍으며 걸어왔다. 실제로 그는 걷는다. 매일 걷는다.


사라지기 전에, 없어지기 전에, 거기 있을 때에


이다 작가는 《이다의 허접질》뿐 아니라 《무삭제판 이다 플레이(2008)》 《내 손으로 발리(2014)》 《이다의 작게 걷기(2015)》 《끄적끄적 길드로잉(2015)》 등을 펴냈다. 현재는 ‘매일마감’이라는 구독 서비스도 진행 중이다. 여행 친구이자 하우스메이트인 모호연과 함께 ‘소사프로젝트’라는 인디출판사를 운영 중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모든 작업을 통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적당히 굶어죽지 않고 오랜 시간을 들여 예술가로 완성되는 삶을 살길” 바란다.

그의 책은 카메라도, 키보드도 없이 오직 핸드메이드로 만들어진다. 그의 손에는 카메라 대신 스케치북이, 노트북 대신 연필이 들려 있다. 봄의 통영과 여름의 서울, 가을의 경주와 겨울의 아산을 담은 책 《이다의 작게 걷기》에는 적은 예산과 저질 체력으로도 얼마든지 리얼한 여행을 즐길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겼다. 그의 고향 포항시 남구 영일군 중산리도 공장이 들어서며 사라졌다. 그는 ‘떠나보내는 그림’을 그리며 바라보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후, 새로운 것에 밀려 사라져가는 낡은 것들에 애정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손으로 쓴 간판, 절연테이프를 잘라서 만든 경고문 같은 것이나 플라스틱에 스티로폼을 칭칭 묶어서 만든 의자 같은 거요. 요즘은 오래된 빌라나 다세대 주택의 각기 다른 형태에도 관심이 많이 생겨서 이런 것을 자수로 놓아보는 작업도 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그는 손과 발을 바지런히 움직인다. 그의 책에는 낡은 두 의자에 빨랫줄을 걸어 만든 바리게이트, 색감이 예쁜 쓰레기 불법투기 경고문, 이제는 망해버린 작은 분식집 위로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들이 담겨 있다. 그가 걸을 때 가져가는 것은 ‘사소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 ‘돗자리를 깔기 가장 좋은 곳을 찾는 안목’ ‘맛없는 밥에 분노할 결기’ 정도다. 대신 ‘짧은 시간에 가능한 많은 것을 보려는 마음’ ‘제대로 보기 전에 일단 사진부터 찍으려는 태도’ ‘최대한 효율적으로 여행하기 위한 투철한 계획’은 가져가지 않는다. 천천히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운 풍경들을 채집할 수 있다.

“자동차를 탔을 때의 풍경, 버스를 탔을 때의 풍경 그리고 걸을 때의 풍경은 모두 다른 것 같아요. 특히 저는 발로 걷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언제든 재밌는 것을 마주치면 멈춰 서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사진을 찍는 것보다 그림 그리는 것을 더 선호하는 이유는 그림을 그릴 때 걸리는 시간이 더 길어서일 거예요. 그림을 그리는 그 자체도 재미있지만 그림을 그리기 위해 대상을 자세히, 오래도록 지켜보는 것이 즐겁습니다. 결국 천천히 깊게 보는 수단이 걸으면서 그리는 그림, 길드로잉이네요.”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바빠서, 돈이 없어서, 마음이 괴로워서 떠나지 못했던 그는 ‘가난뱅이 근성을 최대한 활용해 사소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재능’을 열심히 갈고 닦았다.


사소한 데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소하지 않은 재능


여행지에서 그림을 그리던 그는, 이제 일상을 여행처럼 산다. 한때는 생활고로, 지금은 코로나로 여행을 갈 수는 없지만 여행자의 시선은 간직할 수 있다.

“저는 원래 외국 여행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그런데 늘 해외로 여행을 갈 수 있는 형편은 아니어서 여행을 못 할 때는 내 주변을 여행하듯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외국에 나갔을 때 모든 것이 신기하던 경험을 되살려 평소에 지나치던 것도 마치 내가 외국인인 양 처음 보는 것처럼 유심히 걸으며 보려고 했어요. 그랬더니 의외로 주변에 너무 신기하고 재밌는 것들이 많더라고요. 걸어 다니다 보니 예전보다 건강도 좋아지고, 어둡던 마음도 많이 밝아진 것을 느꼈습니다.”

바빠서 틈이 없을 때는 일부러 틈을 낸다. 아니, 바쁠수록 걷는다. 걷고 나면 뻑뻑해진 몸과 마음에 다시 활기가 돈다.


“제가 ‘일간 매일마감’이라는 메일링 서비스를 하고 있는데요, 일주일에 다섯 번 마감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아침부터 작업을 시작해 오후 네다섯 시 정도가 되면 눈 주변이 아프고 머리가 멍해요. 그럴 때 작업을 다 마치지 않았어도 ‘에잇 나가자’ 하면서 나갑니다. 동네 뒷산을 무작정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나뭇잎도 줍고, 까치도 구경하고 그래요. 집에서 쉬면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SNS를 보거나 영상을 보거나, 여하튼 뭘 계속하거든요. 걸을 때만 유일하게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게 돼요. 그러다 보면 아프던 머리가 신기하게도 아프지 않고, 답답하던 가슴도 좀 트이는 기분이 들어요. 요즘은 걷는 것이 저한테 숨통을 틔워주는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걷기의 장점은 또 있다. 하루의 루틴이 확실해졌다. 실제 프리랜서들이 아침에 일어나 정해진 일과대로 행동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매일의 마감과 걷기가 규칙을 만들었다. 무엇보다 매일매일 어쨌든 한 일이 있으니 “난 오늘 쓰레기가 아니었어!” 하는 보람이 생겨 좋다고 한다. 루틴 덕분에 기억의 폴더에 저장되는 추억은 덤이다. 그가 영구 소장하고 싶은 이미지는 늦은 봄의 봉산이다.

“봉산은 은평구에 있는 작은 동네 산인데요, 제가 자주 가는 곳입니다. 겨울부터 매일 갔는데 5월이 되어 모든 나무에 새로운 잎이 다 달렸을 때의 풍경은 잊을 수가 없어요. 산 정상 부근에서 옆에 있는 산등성이를 보는데 초록색의 종류가 어쩌면 그렇게 많은지요. 차가운 느낌이 나는 초록, 진한 초록, 노랑이 섞인 초록 등 정말 수천 가지 초록색의 파티였어요. 그 풍경만은 그림으로 옮긴다고 해도 실제로 보는 것보다 아름답지 않을 거라 느꼈습니다. 내년에 그 풍경을 또 보는 것을 기다릴 정도로요.”


너도 걷다 보면 알게 될 거야


다시 찾아올 봄을 기다리는 그의 하루는 매일이 비슷하다. 아침에 일어나 먼저 ‘모닝페이지’를 쓴다. 매일 아무것이나 세 페이지를 손으로 쓴다. 다 쓰면 베란다로 나가 식물을 살피고 물을 준다. 그리고 오트밀을 끓여 아침을 먹고 바로 그날의 가장 중요한 작업부터 시작한다. 주로 작업 콘티를 짜거나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일이다. 점심을 준비해서 먹고 게임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휴식을 취한 다음에는 2시 정도부터 다시 작업이다. 주로 ‘매일마감’을 편집하거나 그림 채색을 한다. 오후 대여섯 시쯤 되면 매우 피로해지는데 이때 나가서 한 시간 정도 걷거나 사람이 없는 곳에서 앉았다가 온다. 산등성이에 있는 바위 같은 곳에 앉아 한참을 머물 때도 있다.

하루는 비슷한데 풍경은 오묘하게 달라진다. 그렇게 봄이 오면 산수유로 시작해 개나리의 노랑이 활짝 터지고, 목련이 주렁주렁 맺은 후에 온 산에 분홍 진달래가 뒤덮이는 모습과 벚꽃이 분분히 떨어지는 엔딩까지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비정규직 예술 노동자의 삶도 괜찮다. 언제든 이런 풍경을 물끄러미 지켜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동네 산에 누워 파란 하늘을 수놓은 연분홍 진달래를 보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혹시 누군가의 행복을 도둑질하는 건 아니겠지, 자연을 보며 누리는 행복은 누가 먼저 가진다고 줄어드는 게 아니겠지.’

다행히 답은 ‘아니다’. 그가 가진 행복은 타인을 불행하게 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의 이야기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었지만, 그게 누구에게도 위화감을 주거나 열등감을 주지 않았다. 불행에 정직했던 20대에도 이다 작가는 오히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안도를 줬다. 20년이 지난 지금, 여기에 다정함이 더해졌다. ‘어른아이’라 불리던 그는 이제 ‘아이어른’이 되어 헐벗은 마음을 채워준다.

그의 이름 ‘이다’는 기다, 아니다를 말할 때 ‘안이다’에서 따왔다고 한다. 부정과 긍정을 모두 담을 수 있는 이름을 갖고 싶었다. 예술은 저 멀리에 있지 않고 행복은 포토샵 처리된 SNS에 있지 않다. 여기, 내가 발로 디딘 땅 위에 있다. 여전히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다시 오지 않을 지금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그는 ‘걷는 예술가’, ‘이다’.
  • 2021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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