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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식마녀’ 박지혜

채식, 얼마나 맛있게요?

글 : 유슬기 기자  / 사진 : 서경리 기자

#비건식_냉장고를부탁해 #여기가채식맛집
#어렵지않아요 #하루하루조금씩

출출한 저녁 냉장고를 연다. 쌈채소를 사면서 같이 사둔 오이고추가 두어 개 남아 있다면 초간단 비빔국수를 만들 수 있다. 먼저 소면을 3분 정도 삶아 찬물에 헹궈두고, 오이고추를 툭툭 잘라 넣은 뒤 간장·설탕·고춧가루·들깻가루·식초·들기름을 넣고 비벼준다. 만드는 과정은 간단하지만 입안엔 꽉 찬 감칠맛이 난다. 오이고추가 아삭아삭 씹히는 소리에 기분도 좋아진다. ‘초식마녀(박지혜)’가 알려주는 레시피는 이렇게 문턱이 낮다. 대단한 결심이나 금욕적인 각오가 필요한 게 아니라 ‘냉장고 한번 열어볼까’ 정도로 시작할 수 있다.

초식마녀는 2만 여 명의 SNS 팔로워, 1만 여 명의 유튜브 구독자를 보유한 ‘비건 인플루언서’다. 본격적으로 비건이 된 게 2019년이니 2년 만에 놀라운 성장을 한 셈이다. 그가 인기를 얻는 이유는 비건이 ‘넘사벽’으로 보이지 않아서다. 그가 공유하는 레시피는 쉽고, 그의 일상은 평화롭다. 지난 1월에는 MBC 〈볼빨간 신선놀음〉에 출연해 ‘채식마라라면’을 선보이며 출연진 모두의 입맛을 사로잡고 ‘채식은 맛없다’는 편견을 훌훌 날려 보냈다.


오늘 조금 더 비건!

“오랜 시간 육식에 대한 불편함이 누적되면서 결국 비건을 하게 됐어요. 영화 〈옥자〉를 본 뒤로는 집에서라도 가급적 육류를 소비하지 않기로 했죠. ‘내 돈 주고는 안 사먹어야지’ 정도의 마음이었습니다. 1년 가까이 배달음식이나 인스턴트, 커피도 거의 먹지 않는 집밥라이프를 이어오다 취직을 하고 나니 식단도, 몸도 엉망이 됐어요. 몇 달 동안 밥만 먹으면 배가 아프고 탈이 나더라고요.”

회사에는 “앞으로 점심은 따로 먹겠다”고 선언한 뒤 매일 도시락을 준비했다. 채식을 하면서 어쩐지 아침에 일찍 눈이 떠졌다. 적게 자도 덜 피곤했다. 그의 책 《오늘 조금 더 비건》에는 그가 회사를 다닐 때 준비했던 도시락만 30여 페이지에 걸쳐 소개돼 있다. 두릅스프링롤이나 루꼴라 두근 김밥, 잣크림파스타 등을 보면 점심을 먹으러 나가려다가도 “와, 한 입만”이라고 외칠 법한 먹음직한 밥상이다.

“2019년 2월부터 완전 채식을 시작했어요. 원래 직업이 일러스트레이터라 레시피 만화를 SNS에 공유하면서 책도 내게 됐어요. 주변의 권유로 유튜브도 시작했고요.”

그의 만화와 유튜브는 둥글둥글하다. 폰트도 그림도 영상도 모난 데가 없다. 유튜브에는 여러 소리가 담긴다. 도마질 소리, 채소를 와삭와삭 씹는 소리, 길을 걸을 때 나는 바람 소리 등이 BGM처럼 깔린다. 자막도 영상 한쪽에 가지런히 자리 잡는다. ‘날 좀 봐요’라고 외치지 않는 문장들은 시청을 방해하지 않는다. 초식 ‘마녀’라고 해서 마라 맛 영상이 나오려나 했는데 ‘초식’ 동물의 평원처럼 잔잔하다.

“예상과 다른 이미지라는 이야기 종종 들어요(웃음). 사실 인간은 채식, 식물식을 한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데 동물 입장에서 말하고 싶어서 ‘초식’이라고 쓰게 됐어요. ‘마녀’는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려고 지은 이름이에요. 저는 얼굴을 드러내고 말하는 데 두려움이 있지만 매일 동물이 겪을 고통을 생각하니 메신저가 되는 일을 미룰 수가 없더라고요. 마녀사냥을 당하더라도 해보자는 의지로 지은 이름인데, 많은 분들이 공감해주셔서 요즘은 ‘마음대로 하는 여자’라고 설명하기도 해요(웃음).”


초식마녀가 만든 맛있는 채식 요리.
마와 낫또로 맛을 낸 마낫또비빔국수(왼쪽), 가지와 두부가 들어간 마라두부덮밥.
비건 시작 두 달 후 찾아온 변화

비건을 시작하고 두 달 만에 확연한 변화가 나타났다. 변비가 사라지고 부기와 체중이 빠졌다. 피부와 머릿결도 부드러워지고 새벽에 자연스레 눈이 떠졌다. 유연성이 없어 되지 않던 요가 동작들도 점점 더 잘되기 시작했다. 더 드라마틱한 건 내적인 변화였다.

“예전의 저는 마음 깊은 곳에서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들의 인생을 좀먹는 존재가 아닐까 의심했어요. 당시에는 돈도 못 벌고, 작가도 못 되고, 맨날 우울해하고, 그러면서도 많이 먹는 스스로를 자학했죠. 지금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엄청난 축복이라고 느껴요. 그대로의 나를 긍정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일단 한번 그런 순간을 마주하고 나면 삶의 모든 순간이 감사하고 소중해지더라고요.”

예전엔 그도 “스트레스 받았으니 치킨 한 마리 먹자”고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음식이 밥상에 올라오기까지 어떤 경로를 거쳤을지 생각한다. 그 모든 과정을 외면하거나 ‘없는 셈 칠 수 없다’는 깨달음은 비건으로 이어진다.

비건은 식습관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자 가치관으로 확대된다. 그의 삶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일단 비건 정체성이 삶의 전반에 영향을 미치자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비건 인플루언서의 삶을 살게 됐다. SNS, 유튜브, 클럽하우스 등을 통해 비건들과 교류하며 관련 콘텐츠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서울을 벗어나 진주에 작업실도 얻었다. 진주는 그가 나고 자란 고향에서 가까운 곳이다. 그의 삶에 단절되고 분절된 부분들도 새롭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열일곱 살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해서 부모님과 오래 떨어져 살았어요. 어른이 돼서 다시 뵌 부모님은 제가 알던, 아니 안다고 생각했던 것과 얼마나 다른 분들인지를 새삼 느껴요.”

가족은 그의 비건 생활을 응원한다. 친정과 시가가 모두 그렇다. 그가 만들어주는 음식을 맛있게 먹고, 그의 콘텐츠를 유심히 본다. 초식마녀를 매개로 그와 가까운 사람들도 조금씩 비건에 다가선다. 무엇보다 그 스스로가 꿈꾸던 삶에 가까워졌다.

“완벽하지 못할까 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10%의 실천이라도 하는 게 나아요. 비건은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일이 아니니까요. 가치관과 일치하는 삶을 살았을 때 느끼는 행복이 있거든요. 그걸 누렸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동물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어떤 음식이나 용품, 생활 방식을 일체 거절하는 비건의 삶을 10이라고 한다면, 비건의 삶은 하루아침에 10으로 건너뛰는 게 아니라 1에서 2로, 2에서 3으로 점진적으로 나아간다. 어제까지 0이었다가 오늘 10으로 도약하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비건’의 삶에 겁을 내는 이유는 이 아득한 도약 때문이다. 이전의 삶과 어떻게 이별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은 애써 모른 척하거나 망설이게 된다. 초식마녀는 ‘오늘 조금 더 비건’이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훌륭한 입문서다. 비건의 삶이 그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보여주는 증인이기도 하다.

“저는 유명한 작가가 될 거라는 망상에 빠져 살았어요.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시대에 남을 명작을 만들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요. 욕망할 때는 체념하게 만들더니 욕심을 버리니까 바라던 것들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인생은 왜 이럴까요(웃음).”

‘비건’이 대표 직함이 된 지금 그는 두 번째 책을 준비 중이다. 세 번째 책도 계약을 마쳤다. “나처럼 나약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도 꾸준히 비건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한다. 2018년 영국왕립협회 자연과학회보에는 “멸종 위기의 초식동물이 복원되면, 지구온난화가 완화된다”는 보고서가 실렸다. 초식하는 비건은, 이렇게 지구를 살린다.


‘초식마녀’의 결심에 영향을 준 영상들



〈옥자, 2017〉
강원도 산골 소녀 ‘미자’에게 옥자는 10년간 함께 자란 둘도 없는 친구이자 소중한 가족이다. 자연 속에서 평화롭게 지내던 어느 날, 글로벌 기업 ‘미란도’가 나타나 갑자기 옥자를 뉴욕으로 끌고 가고, 할아버지의 만류에도 미자는 무작정 옥자를 구하기 위해 돌진한다.




〈도미니언, 2018〉
공장식 축산업의 실체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몰래카메라와 드론을 이용해 축사의 모습을 낱낱이 담았다. 동물은 영혼이 없다고 치부되지만, 사방에서 울리는 그들의 비명은 도리어 인간의 영혼이 없다는 걸 입증한다고 다큐멘터리는 말한다.




〈카우스피러시, 2014〉
축산업이 기후변화에 끼치는 영향을 탐색한 다큐멘터리다. 가축을 기르며 발생하는 온실가스가 다른 모든 교통수단의 배기가스보다 많다는 진실을 담았다. 카우스피러시는 소를 뜻하는 ‘cow’와 음모론을 뜻하는 ‘conspiracy’의 합성어다.


  • 2021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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