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우-뉴트로

익선동 ‘식물’과 을지로 ‘잔’의 디렉터 루이스 박

시간을 기억하는 공간

글 : 유슬기 기자  / 사진 : 장은주 영상미디어 기자

발길을 끄는 골목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만드는 게 공간 디렉터의 힘이다. 익선동의 ‘오늘’을 있게 한 카페 ‘식물’을 설계한 이와, 을지로의 ‘내일’을 여는 카페 ‘잔’의 디렉터가 같은 사람이라니 흥미로웠다. 공간 디렉터 루이스 박(박재형)은 “시간이 담긴 공간의 숨결을 그대로 살려놓는 것”이 뉴트로의 힘이라고 말했다.
직장인의 삶을 살던 한 남자는 30대에 유학을 떠난다. ‘언젠가는 유학을 가고 싶다’ ‘언젠가는 패션 관련 일을 하고 싶다’는 오랜 소망의 실천이었다. 영국에는 패션 스타일링과 사진을 복수 전공할 수 있는 학교가 있었다. 런던에서 공부하며 배운 건, ‘패션 스타일 포토그래피’였다. 그런데 돌아보니 그때 그가 배운 건 ‘나 자신’이다. 스타일링을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고 했다. 수업의 첫 주제도 ‘나를 표현하는 일’이었다. 동심원은 자기로부터 시작해 세상으로 퍼져나간다.

“영국에서는 초등학교였던 아파트에 살았어요. 집 이름도 ‘더 스쿨하우스’였고요. 교문도, 운동장도 다 그대로였죠. 저는 교실처럼 나무로 된 바닥 위에 살았어요. 아침에 눈을 뜨면서 행복하다고 느꼈어요.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던가 싶었죠.”

1층에 내려가면 당시의 사진도 그대로 있었다. 학교를 다니던 학생들의 모습이 찍힌 흑백 사진이 색이 바랜 채 벽에 걸려 있었다. 학교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집으로 사용한 공간에는 복도마다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운동장의 나무도 자르지 않아 아름드리나무로 훌쩍 자라 있었다. ‘공간이 주는 행복감’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여러 조건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냥, ‘여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만한 순간이 있더라고요.”

사람과 사람뿐 아니라 사람과 공간에도 인연이 있었다. 사람과 공간도 서로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는 걸 경험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시간의 두께와 추억의 더께가 쌓인 공간들이 속절없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익선동의 시간을 먹고 자라는 카페, ‘식물’


1920년 일제강점기, 종로구 익선동에 재개발의 삽질이 시작됐다. 일제는 이곳을 일본식 신시가지로 개발하기 위해 기존의 집을 무너뜨리려 했다. 독립운동 후원가였던 정세권은 이 땅을 모두 사들여 근대식 한옥을 지었다. 양반을 위한 고급 한옥이 아닌, 서민을 위한 소박한 한옥이었다. 익선동에 처음 자리를 잡아 익선동 터줏대감이 된 카페 ‘식물’에는 그의 이름을 딴 ‘정세권 칵테일’이 있다.

“한옥 안에 들어가 보면, 벽지도 몇 번을 덧바른 흔적이 있어요. 못을 박은 자리와 뽑은 흔적도 그대로고요. 식물을 만들 때도 ‘나다운 게 뭔지, 내가 좋아하는 공간이 어떤 모습인지’를 먼저 고민했어요. 어릴 적부터 하늘, 바람, 식물을 좋아했어요. 저를 표현하는 세 가지 단어가 있다면 뭘까 떠올려봤더니 이거더라고요. 시간을 먹고 자란다는 점에서 한옥도 식물 같았어요.”

2004년 익선동에는 또 한 번 재개발 바람이 불었다. 건물주들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사이, 보수되지 않은 한옥은 거리에 방치됐다. 지붕 위의 낡은 기왓장들도 그대로 남았다. 콘크리트 건물에 둘러쌓인 110채의 목조 건물. 버려진 섬 같던 익선동이 루이스 박의 눈에는 보물섬으로 보였다.

“이곳을 어떻게 재생할 것인가. 누군가는 다 허물고 새로 지으려 했을 수도 있죠. 저는 이곳에 숨을 불어넣고 싶었어요.”

이 숨을 발전시킨 공간이 을지로에 문을 연 카페 겸 와인바 ‘잔’이다. ‘인간과 사물이 인연이 되고, 공간을 만나 새로이 태어난다’, 을지로 ‘잔’에 새겨진 문장이다. 익선동이 활기를 띠고, 새로운 감성에 목마른 이들이 찾아오는 ‘핫플레이스’가 되자 루이스 박은 자리를 옮겼다. 그가 뒤이어 눈여겨본 곳은 을지로다. 서울 중구 을지로는 공구, 조명, 인쇄소들이 골목골목 들어서 있다. ‘설계도만 주면 탱크도 만든다’는 말이 허풍만은 아니었던 곳이다. 청계천이 생기고, 공구상들이 옮겨가면서 쇠락한 분위기가 만연했던 이곳에도 꽃이 피었다. 경리단길, 송리단길, 연남동, 익선동처럼 젊은 예술가들이 찾아들었다. 저렴한 월세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찾던 터였다. 잔 역시, 을지로3가의 후미진 골목에 자리 잡았다. 간판도 제대로 달지 않아 일부러 찾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좁은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갤러리와 와인바를 겸한 카페 잔이 ‘짠’하고 나타난다.


공간의 공기, 그 위의 이야기

을지로에 위치한 카페 ‘잔’의 내부 모습. 건물의 외형은 그대로 살리고, 소품으로 내부를 채웠다.
‘잔’에서 사용하는 잔은 모두 루이스 박 대표가 모은 것들이다.
“여기 모아둔 잔들은 유학 시절부터 모은 거예요. 손님들이 직접 잔을 골라서 음료를 마실 수 있죠. 제가 생각하는 좋은 공간은, 이 공간을 만든 사람이 궁금해지는 곳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왔다가도 카페 안의 소품, 분위기, 인테리어를 보면서 ‘누가 만들었을까’ 궁금해하는 곳이죠.”

맛있는 차 한잔하러 들어왔던 이들도 카페 안의 빈티지한 분위기에 젖어든다. 하나도 같지 않은 테이블과 의자들, 전등갓으로 쓰인 소품은 모자고, 벽지처럼 발라진 종이도 작품이다. 공들여 바라보면, 무엇 하나 똑같은 것이 없다.

“원래 이 공간이 갖고 있던 분위기를 그대로 가지고 왔어요. 벽이나 계단, 옥상은 손대지 않았죠. 공간의 예전 역사와 공기를 그대로 보여주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덧바르면 흥미로운 공간이 되죠.”

을지로도 이제는 ‘힙지로’라고 불린다. 을지로 사이사이에 전시, 갤러리 공간들이 문을 열었다. 원래 있었던 것처럼 본래의 모습을 훼손하지 않고 자연스레 끼어들었다. 그 공간을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하다. 루이스 박은 이런 인기가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익선동이 인기를 얻으면서 처음의 분위기가 아닌 다른 경제 논리가 생겨나는 걸 봅니다. 그럼 이곳 역시 다른 거리들과 비슷해지면서 또 잊힐 거예요.”

그가 마을 운동을 병행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공간이 똑같아지면, 소비하고 떠나가는 먹자골목이 되기 쉽다. 한 번의 인연이 소중한 인연으로 이어지려면 공간의 공기를 잘 간직해야 한다. 그는 공간을 디렉팅할 때도 잘된 무언가를 흉내 내지 않는다. 자기만의 이야기와 색을 찾는다.

“제가 생각하는 뉴트로는, 히스토리예요. 그 이야기를 보존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죠. 복제가 아닌 재생입니다.”
  • 2019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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