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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희의 속 깊은 인터뷰

김경호 MBC 앵커

한 번에 되지 않는 이 땅의 소심쟁이들에게

글 : 김민희 기자  / 사진 : 서경리 기자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 교정에는 바보 목련이 산다. 남들보다 일찍 피었다가 일찍 저버리는 목련. 목련 세계에도 저마다의 속도가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왜 이곳 캠퍼스의 대학생들은 일찍 피어나는 목련을 ‘천재 목련’이 아니라 ‘바보 목련’이라 불렀을까.

고려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한 김경호 MBC 주말 〈뉴스데스크〉 앵커의 에세이 《한 번에 되지 않는 사람》은 바보 목련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말한다. 이 광속의 시대에 남들보다 빨리 핀다고 더 오래 피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속도로만 보자면 자신은 낙오자지만, 각자의 인생에서 빛나는 시간은 제각기 다르다고.

김경호 앵커가 털어놓는 이야기는 이래도 될까, 싶을 만큼 진솔하다. 방송국의 꽃이자 얼굴로 불리는 뉴스 앵커 자리에 오기까지의 자신을 민낯으로 내보인다. 그가 걸어온 길은 삐걱거림의 연속이었다. 대학 입시는 재수, 아르바이트 면접은 툭 하면 떨어졌고, 방송국 시험은 일곱 번 낙방했으며, 앵커 자리도 오디션 삼세판을 거쳐 43세에 앉을 수 있었다. 게다가 자신을 ‘소심쟁이’라고 소개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의 이야기는 이 땅의 청춘들에게 희망의 찬가로 읽힌다. 애쓰고 애써도 나아가지 않는, 제자리 트랩에 갇힌 것 같은 절망감을 느끼는 이들은 그의 이야기에서 적잖은 위로를 받는다. 누구나 저마다의 속도가 있고, 저마다의 스타일이 있으며, 조명이 꺼진 곳에서 묵묵히 할 일 하다 보면 언젠가 자기만의 빛깔로 환하게 빛날 수 있다는 위로. 그리고 그 조명은 한 번에 잘된 사람보다 더 밝고 오래 비출 수 있다는 위로.

그가 건네는 위로는 힘이 세다. 책 출간 경험이 없는 작가의 첫 책임에도 호응이 뜨겁다. 출간 한 달 만에 3쇄 7000부를 찍었고, 뒤로 갈수록 판매에 속도가 붙는 모양새다.

김경호 앵커는 걸그룹 브레이브걸스의 역주행 신화가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뻤다고 했다. 브레이브걸스와 김경호 앵커는 닮은 점이 많다. 둘의 성공담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의 자리에서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쨍하고 해 뜰 날이 온다는 존재의 증명이다. 그가 브레이브걸스의 역주행 신화에서 힘을 얻었듯, 자신만의 속도로 노력 중인 수많은 이들이 김경호 앵커의 삶에서 용기를 얻는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 본사 인터뷰 룸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세상 모든 보통의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힘 있는 위로”라는 띠지 문구가 인상적이었어요.
책에서 딱 한 문장만 남긴다면, 무엇을 남기고 싶어요?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기다리는 시간은 결코 버리는 시간이 아니다’라는 문장.”


그저 기다리기만 한다고 무언가가 되는 건 아닐 텐데요.

“그렇죠. 노력을 하면서 기다려야죠. ‘존버’라는 말에서 ‘버틴다’는 건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무언가를 해나가는 건 물에서 노를 젓는 것과 같아요. 멀리서 보면 그 사람은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쉬지 않고 노를 젓고 있거든요. 손을 놓아버리면 그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떠밀려가요. 그 사람이 어느 순간 힘을 내서 노를 힘껏 저으면 치고 올라갈 거예요. 저는 노력하고 기다리는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지금 노를 젓고 있다. 멈춰 있는 게 아니라,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럼에도 노를 놓아버리고 싶은 적은 없었어요?

“어휴~ 있었죠. 항상 놓고 싶었어요. 언제까지 노를 저어야 하나, 하는 자조 섞인 한탄도 했고요. 저는 ‘여기까지만 노력해보자’고 끝을 정해놓고 하는 편인데요, 공교롭게도 무언가가 될 때는 꼭 그 마지노선까지 가야만 되더라고요.”


낙방 경험이 많지요. 지금에 와서야 뭔가를 이루기 위한 자양분으로 소화해낼 수 있지만, 그 당시의 시간을 견디는 건 만만찮은 일이었겠습니다.

“저보다 훨씬 더한 삶의 무게를 지고 사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제가 고생한 것처럼 말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누군가가 ‘너 어떻게 버텼어?’라고 묻는다면 ‘나를 믿고 기다렸다’고 답해요. 기다림에 필요한 건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에요. 주변 분들은 기다려주는데도 정작 내가 나를 기다려주지 못할 때가 많잖아요.”



독자들이 왜 이 책을 좋아해주는 것 같아요?

“독자 리뷰의 90%는 ‘제목이 내 얘기 같다’는 거였어요. 제목만으로 위로를 받았다는 분도 많았고요. 어떤 분은 이 책을 읽고 숨을 쉴 수 있게 됐다는 표현도 하셨습니다. ‘나만 한 번에 안 되는지 알았는데, 이런 사람이 또 있구나. 이 세상에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하는 위로를 받는 것 같아요. 스스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안 하면 좋겠어요. 한 번에 되지 않는 사람은 한 번에 되는 사람보다 더 성숙해지고 내공도 깊어지거든요. 때문에 언젠가 됐을 때는 쉽게 이룬 사람은 절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게 돼요.”


한 번에 되지 않는 사람은 궁극적으로는 더 많은 걸 가지게 되는 사람이군요.

“이건 제 이야기이기도 하고, 제 주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해요.”


바보 목련 이야기와도 통하네요.
고려대 학생들은 빨리 피는 목련을 왜 천재 목련이 아니라 바보 목련이라고 했을까요?


“제가 학창 시절인 20년 전의 경험이라 지금은 그 목련이 없을 수 있잖아요. 그래서 최근 고려대 국문과 신지영 교수님에게 여쭤봤어요. 그 목련이 아직도 있는지, 여전히 바보 목련으로 불리는지. 그런데 지금은 바보 목련을 넘어서 미친 목련이라는 말까지 있다는 거예요. 여전히 그 목련은 대학생들에게 천재 목련으로 비치진 않는 거죠. 빨리 피는 목련이 앞서가는 존재로 보이지 않고 잘못된 존재로 비친다는 건, 현실에서는 빨리 가고 앞서가고 싶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이게 옳은 게 아니라는 생각도 있는 것 같아요. 다른 대학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대요. 빨리 피는 철쭉을 ‘바보 철쭉’이라고 부른다고 해요.”


‘한 번에 되지 않는 사람’은 뭔가가 ‘된’ 사람만 쓸 수 있는 말입니다만.

“맞아요. 원래는 두 문장의 제목이었어요. 제목 뒤에 한 문장이 숨어 있어요. ‘결국엔 되는 사람’이라는. 제목만으로 위안을 받았다는 분들은 제목의 함의를 읽은 분들이에요.”


모든 게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는 않을 텐데요,
하다 하다가 결국 포기해버린 순간은 없었어요?


“너무 많죠. 가장 최근에 쓴 브런치 글 제목이 ‘포기하는 게 아니라 보류하는 겁니다’였어요. 끝을 보지 못하고 중단한 것들이 많아요. 영어회화, 일본어회화, 피아노, 글쓰기 연습 등. 뮤지컬작가는 10년 가까이 현재진행형이고요.”


10년간 뮤지컬작가라는 부캐로 살았군요.
작품도 꽤 많이 쓴 걸로 알아요.


“이 이야기로도 책 한 권 쓸 수 있어요(웃음). 제가 만약 뮤지컬작가로 성공했다면 부캐라는 표현을 안 했겠죠. 뮤지컬작가는 잘돼야 다음 스텝이 있는데, 잘 안 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해요. 공모전, 당선, 끝, 다시 공모전의 무한 반복이죠. 그런데 도전하는 시간 자체가 너무 행복했어요. 작품을 쓸 때, 작곡가나 연출가를 만날 때, 내 작품을 무대에 올릴 때 매 과정마다 느끼는 행복감이 엄청나요. 그런데 이 행복감은 시작할 때는 몰라요. 시작할 때는 이뤘을 때의 순간만 상상하는데, 과정에는 전혀 생각지 못한 행복한 순간이 많아요.”


뉴스 앵커와 기자라는 자리도 만만치 않은데요,
뮤지컬작가와 병행하자면 고되진 않아요?


“사람들이 많이들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보세요. 본캐인 직업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부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에요. 둘의 에너지가 달라요. 부캐로 살다 보면 본캐에서는 상상도 못 할 에너지가 나와요. 또 하나, 부캐가 있으면 본캐를 소홀히 할 거라고 여기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부캐를 가지면 거기에서 에너지가 샘솟기 때문에 즐거워져서 본캐를 더 잘하게 되거든요. 오히려 부캐가 없으면 본캐에 매몰되어서 현실에서의 자아실현에 목매게 되어버려요. 부캐가 있으면 본캐를 통한 자아실현에 목매지 않기 때문에 본캐 일을 즐기게 되고, 결과적으로 일이 더 잘 풀려요.”


‘이 정도면 성공했어’라는 생각이 들어요?

“성공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진 않아요. 성공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이상 나머지는 다 실패가 되잖아요. 실패와 성공 사이에는 무수한 단계가 있는데 말이죠. 만약 ‘네가 이뤘느냐’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수 있어요. 뉴스 앵커는 제 꿈 목록 중 하나였고, 그 꿈을 이뤘으니까요. 주말 앵커를 하려고 스튜디오에 딱 앉으면 ‘아, 감사합니다’라는 생각을 늘 해요.”


뭐가 감사한가요.

“이 순간, 여기에 존재한다는 자체가 너무 감사해요. 살면서 우리는 정말 많은 것들에 감사의 마음을 갖잖아요. 말하지 않으면 그냥 흘러가는 것들이 감사하다고 말하는 순간 딱 눈에 들어와요.”


일종의 주문이군요.
책에도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넘치던데요.
원래 긍정적인 편인가요.


“살면서 제 나름의 힘든 점을 극복하며 갖게 된, 생존을 위한 방법 중 하나예요. 힘든 순간에 생존하려면 내가 가진 것들에 감사해야 한다는 무의식이 발동한 것 같아요. 20년 가까이 기자와 앵커를 하면서 잊히지 않는 취재 경험이 있어요. 삶이 얼마 남지 않은 말기암 환자들이 있는 호스피스 병동을 취재할 때였어요. 그분들은 변 한 번 시원하게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해요. 우리에겐 당연한 일상이 누군가에겐 간절한 소원이 되는 거죠. 내가 사는 일상에서 감사를 더 많이 느끼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깊이 하게 됐어요. 며칠 전에는 제가 진행하는 앵커로그 취재를 위해 6·25 참전용사들을 만났어요. 치열한 전장에서 살아남은 한 분 한 분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 한 번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됐어요.”


공감능력이 뛰어나군요!

“한 번에 되지 않는 사람일수록 공감능력이 뛰어난 것 같아요. 회사에서도 딱 보기에도 똑똑하고 하는 것마다 한 번에 잘되는 사람들은 공감능력이 약한 편이에요. 이미 잘났으니까. 한 후배가 ‘저는 선배처럼 그런 글을 도저히 쓸 수가 없어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어떻게 그렇게 쓰세요?’ 묻더라고요. 그는 이미 인간관계가 너무 훌륭한 친구거든요. 본능적으로 어떤 분야에 타고난 사람은 그 분야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어요. 저는 낯도 많이 가리고, 인간관계를 잘하는 편이 아니어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과 잘 지내고, 조직에서 사랑받을까?’를 많이 고민하고, 그런 친구들을 계속 관찰했어요. 그러면서 공감능력이 점점 강화된 것 같아요.”



시선이 밖으로 향해 있으면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내 자신이 무너져 내리기 쉬운데요.

“여러 번 무너졌죠. 여기저기에서 상처받으며 시행착오를 겪다가 알게 됐어요. 타인을 향해 귀가 활짝 열려 있되, 중심을 지켜야 한다는 걸. 중심이 흔들리면 내가 무너져버리고 말아요.”


넉넉하지 않아서 더 행복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중·고등학교 때까지는 넉넉지 않은 환경이 오히려 제 삶의 원동력이었어요. 제 꿈이 엄마를 좋은 집에 살게 해드리는 거였거든요. 당시에는 그런 환경이 싫었지만, 지나고 보니 가난이 준 선물들이 많아요. 어릴 때 소원이 뜨거운 물이 나오는 집에서 사는 거였어요. 그래서 뜨거운 물로 샤워할 때마다 감사를 느껴요. 소원이 이뤄진 거잖아요. 일부러 가난한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가난에 처했다면, 만족이나 행복의 기대치가 낮아서 만족의 기회가 많아요.”


근래 느낀 사소한 행복의 순간, 언제였어요?

“얼마 전 부서회의 시간이었어요. 똑똑한 친구들이 기막힌 아이디어를 냈는데 감사하더라고요. ‘와~ 내가 이렇게 똑똑한 사람들과 일할 수 있어서 참 행복하다’ 하고 느꼈죠.”


김 앵커의 브런치 페이지 문구가 “가시 돋친 세상에서 혼자 상처받고, 혼자 용서하는 모든 소심쟁이들을 응원합니다”예요.
스스로도 소심쟁이임을 감추지 않는데요, 어떻게 대중 앞에 서는 앵커가 되려 했나요.


“앵커는 소심함과는 관계없어요. 앵커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모범답안은 없어요. 각자 자신의 스타일대로 앵커가 될 수 있어요. 저는 앵커란 가장 앞에서 시청자와 소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앵커가 되면서 세운 원칙이 ‘절대 로봇 같은 앵커가 되지 않겠다’는 거였죠. 시청자가 분노하는 지점에서 함께 분노하고, 시청자가 슬퍼하는 일에 대해 함께 슬퍼하려 합니다. 그런 점에서 소심한 사람이 오히려 앵커에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한 후배가 김 앵커를 ‘미래형 앵커’로 표현했다죠?

“우리가 딱 떠올리는 앵커의 전형이 있잖아요. 깎아놓은 듯한 외모와 냉철한 분위기 같은. 저는 그런 스타일과 거리가 있으니까요(웃음). 그 후배가 제게 이런 엽서를 써줬어요.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선배가 지니고 태어나신 온기와 공감능력이 시청자들에게 스며들 거라 믿습니다’라고요. 1년 전 유튜브에서 〈마이리틀뉴스데스크〉라는 코너를 진행하면서 시청자들과 소통했고, 함께 앵커로 발탁된 강다솜 아나운서 또한 유튜브에서 〈14F(일사에프)〉라는 코너를 운영했어요. 둘 다 소통하는 콘텐츠를 만들었는데, 이 시점에 필요한 앵커상에 부합한 것 같아요. 그래서 세상에는 정답이 없다는 거예요. 세상은 빨리 바뀌고 있고, 바뀐 세상이 무엇을 요구할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지금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앞으로도 오지 않는 건 아니에요. 내 길을 가다 보면 언젠가 나의 길이 열릴 수 있어요.”


김경호 앵커를 보면서 엉뚱하게도 우리나라 교육 현실이 겹쳤다. 남들보다 빨리 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원치 않는 선행학습으로 고통받고 있는가. 짧게 보면 이들이 빨리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긴긴 인생길에서도 과연 그렇게 보일까? 김 앵커는 인터뷰 말미에 배와 비행기 이야기를 했다.

“사람에겐 각자의 속도가 있어요. 차마다, 차종마다, 이동수단마다 속도가 다 다르잖아요. 비행기를 타면 목적지에 빨리 갈 수 있지만, 배를 타면 훨씬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어요. 높은 곳에서 빠르게 스칠 땐 볼 수 없는 것들이 낮은 곳에서 천천히 보면 더 많이 보입니다. 내 속도를 믿고 간다면, 결국엔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봐요.”
  • 2021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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