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s pick

magazine 인기기사

topp 인기기사

daily 인기기사

강이슬의 커피코피해피 #19

길을 잃은 대신 얻은 것들

글 : 강이슬 

나는 남들에게 인정받는 지독한 길치, 방향치이다. 매일 가는 길도 자주 헷갈린다. 엊그제는 하루가 멀다 하고 가는 시장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길을 잃는 바람에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운동화와 장바구니를 적시며 골목을 헤맸다. 집으로 돌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빗소리보다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길을 잃을 때마다 거의 저절로 튀어나오는 노래다. 물론 god는 인생을 길에 빗대어 쓴 가사겠지만 적어도 나에겐 길치를 위한 노래로 불린다.


걸으려고 걸은 게 아닌데…

뭐든지 하면 할수록 는다던데, 길을 잘 찾는 사람들은 길을 찾는 데 도가 텄을까. 나는 하도 길을 잃었더니 길 잃는 데에 도가 튼 것 같다. 길을 잃는 솜씨가 점점 늘어서 이제는 길을 잃어도 그저 태연하다. 아니다, 사실 계획적으로 길을 잃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는다. 어차피 이럴 걸 알고 있었던 사람의 여유다.

약속이 생기면 길 잃을 시간까지 넉넉히 잡아 집을 나선다. 운 좋게 길을 잃지 않은 날엔 남은 시간을 때우려 걷고, 역시나 길을 잃은 날엔 이럴 때를 대비해 안배해둔 시간만큼 걷는다. 길치인 나에게 ‘걷다’라는 동사는 자동사보다 피동사로서 더 와 닿는다. 걸으려고 걷는 게 아니라 상황이 나를 걷게 하기 때문이다.

하여튼 얼떨결에 자주 걷다 보니 본의 아니게 잘 걷는 사람이 되었다. 여기에서 잘 걷는다는 의미는 체력적으로 오래 걸을 수 있음을 뜻하는 게 아니다. 나는 걸으면서 중요한 일, 그러니까 나에게 필히 득이 될 일을 한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닌데 그러느라 길을 잃는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아무튼 나는 걷는 동안 눈으로 귀로 많은 것을 주워 담는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 동요를 함께 흥얼거리는 모녀, 한 손에 담뱃갑을 들고 흡연하기 마땅한 장소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사람, 헤드폰을 끼고 자신만 들을 수 있는 음악에 맞춰 크게 몸을 흔드는 사람, 어떤 이유에선지 얼굴을 붉히며 싸우는 연인, 풀숲에서 땅을 파고 똥을 누는 고양이, 노포 안에서 삐거덕거리며 돌아가는 낡은 선풍기. 그런 일상의 장면들 중 좀처럼 스쳐 지나가지 않고 머릿속에 박히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나를 공상으로 때로는 잊고 있던 기억으로 끌고 간다.

떠오른 공상이나 기억을 걷는 박자에 맞춰 마음속에서 퉁퉁 굴리며 살을 붙인다. 얼마간 걷다 보면 그저 찰나에 불과했던 장면들은 얼기설기 얽혀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쌓인 이야기들 중 글이 되는 것들이 있다. 걷는 동안 글감을 얻을 확률은 10퍼센트 미만이지만 내가 쓴 글들 중 90퍼센트는 걷는 동안 발견한 것들이다. 나는 시간과 공을 들여 뭔가를 쓸 때 가장 큰 행복과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런데 ‘씀’이라는 것은 걷기가 낳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으니 나는 길을 잃은 대신에 삶을 얻은 것 아닐까.


길에서 발견한 글로 쓰고 싶은 순간들

작년 이맘때, 저녁 약속이 있던 날이었다. 식당에 먼저 도착한 나에게 친구가 길을 묻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그는 자신 주변에 있는 큰 건물들을 말하며 이제 어떻게 가면 되느냐고 물었다. 나는 건물은 모르겠고 전봇대 앞에 버려진 아동용 세발자전거를 찾으면 마중 나가겠노라고 말했다. 친구는 피식 웃더니 지도를 보고 찾아오겠다고 대답했다. 잠시 후 식당에서 만난 친구는 인사를 하기도 전에 핀잔부터 늘어놓았다.

“아이고 이슬아, 네가 왜 길치인지 알겠다. 주변 좀 보고 다녀라. 누가 길을 그런 식으로 설명하냐?”

그러면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지하철역부터 식당까지 오는 길에 또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담벼락에 피어 있던 노골적으로 붉은 장미꽃과 점잖은 레스토랑 벽에 스프레이페인트로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외설적인 문장, 벽돌빌라 2층 창문턱에 앉아 바깥을 구경하던 고양이, 버스 정류장에 붙어 있는 장기 매매 광고로 의심되는 스티커를 말했다. 친구는 감탄인지 한숨인지 모를 숨을 턱 쉬더니 “네가 그래서 글을 쓸 수 있나 보다”라고 말하며 혀를 내둘렀다. 나는 멋쩍게 웃었지만 한편으론 공감했다. 그날도 길을 걷다가 쓰고 싶은 순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글쓴이 강이슬은 〈SNL 코리아〉 〈인생술집〉 〈놀라운 토요일〉 등 TV 프로그램에서 근면하게 일하며 소소하게 버는 방송작가다.
제6회 카카오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안 느끼한 산문집》으로 대상을 받고 출판 계약을 하며 난생처음 갑이 된 데 이어 《새드엔딩은 없다》까지 출간했다.
술과 개와 밤을 좋아하고 욕을 잘하지만 착하다. 어제도 오늘도 가난했고 내일도 가난하겠지만 가난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가지고 있다.
  • 2021년 07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
이름      비밀번호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75(독자팀)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위원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