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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슬의 커피코피해피 #18

빌딩 숲속을 벗어난다면

글 : 강이슬 

300명 가까이 되는 아홉 살짜리 아이들이 가을 햇볕 아래서 벌게진 얼굴로 율동을 하느라 운동장에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바야흐로 가을운동회 총연습이었다. 내 무릎께까지 오는 검은 스피커 네 대에선 조용필의 명곡 ‘여행을 떠나요’가 꽝꽝 흘러나오고 있었다.

먼동이 트는 이른 아침에
도시의 소음 수많은 사람
빌딩 숲속을 벗어나 봐요
메아리 소리가 들려오는
계곡 속의 흐르는 물 찾아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요.


선생님의 몸짓을 따라잡느라 분주한 친구들 틈에서 나는 박자를 놓치며 허둥거리기 바빴다. 가사의 의미가 궁금해서 도무지 율동에 집중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한바탕 연습이 끝나고 잠시 쉬는 틈에 내 앞에 앉은 애의 어깨를 툭툭 치며 물었다.

“야, 빌딩숲이 뭐냐?”

“빌딩숲?”

“응. 가수 아저씨가 벗어나자고 하는 빌딩숲.”

“몰라.”


근데 빌딩이 뭔데?

나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선생님에게 가서 빌딩숲이 뭐냐고 물었다. 선생님은 빌딩이 마치 숲 같은 곳이라며 서울을 예로 들어 짧게 설명했다.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친구에게 선생님의 말을 전했다. 친구가 물었다.

“빌딩이 뭔데?”

숲은 알았지만 정작 빌딩이 뭔지 몰랐던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잠시 당황했다. 짧은 고민 끝에 친구가 그럴싸한 논리를 펼쳤다.

“‘빌딩 숲속을 벗어나 봐요’ 할 때 ‘빌딩’ 부분 율동이 손으로 지붕 모양을 만드는 거잖어. 서울에선 집을 빌딩이라고 부르는 거 아니냐?”

“오! 서울 사람들은 지붕 위에 나무를 심는갑다. 긍게 ‘빌딩숲’인가?”

“근디 왜 지붕 위에 나무를 심지?”

“서울은 집이 하도 많응게 나무 심을 땅이 모질란갑지.”

쉬는 시간이 끝나고 다시 꽝꽝 울려 퍼지는 조용필 노래에 맞춰 몸을 흔들며 지붕 위에 뿔처럼 솟은 나무들을 상상했다. 빌딩숲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자는 노래로 춤을 추게 했지만 학교에서 정한 소풍지는 늘 전주, 대전, 용인 등 도시였으므로 우리는 도시의 소음과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빌딩숲을 향해 여행을 떠났다. 소풍 가는 버스 안에서 내 상상과 너무도 다른 진짜 빌딩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내 순진함에 놀라 헛웃음을 지었던 것 같기도 하다.


절대로 잊지 못한다는 시골의 삶


어느덧 도시 생활 12년 차. 이제는 그 노래를 들으면 “푸른 언덕에 황금빛 태양이 축제를 여는” 내 고향 생각이 난다. 삼촌이 집 뒷마당에서 따다 주신 파리똥 열매의 붉은빛, 아빠가 튀겨주신 아카시아꽃의 파삭함, 할머니가 쓰레기를 태울 때 동생과 몰래 구워 먹었던 설익은 고구마, 낮은 담벼락 철근마다 앉아 있던 고추잠자리. 그런 기억들이 일시에 살아나 마음이 허둥거린다.

폴 오스터의 소설 《달의 궁전》에서 주인공이 도시 공원에서 자연을 느끼며 행복을 만끽하는 노인 에핑에게 어째서 시골에서 살지 않느냐고 묻자 에핑은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그걸 해봤고 지금은 그게 모두 내 머릿속에 있어. (중략) 일단 그러고 나면 평생 동안 그걸 절대로 잊지 못해. 나는 어디로도 갈 필요가 없어.”

“절대로 잊지 못”한다는 말엔 동의하지만 “어디로도 갈 필요가 없”다는 말엔 동의하지 못하겠다. 에핑은 도시인이고 나는 도시인이 아니라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만 길게 도시로 떠나온 사람일 뿐이라서 이곳에서 어쩔 수 없는 방랑자의 허함을 숨기며 산다. 때문에 ‘여행을 떠나요’에 나만의 진짜 제목을 지어준다면 아마도 그 역인 ‘집으로 가요’가 되지 않을까.

먼동이 트는 이른 아침에
도시의 소음 수많은 사람
빌딩 숲속을 벗어나 봐요
메아리 소리가 들려오는
계곡 속의 흐르는 물 찾아 그곳으로
집으로 가요.


글쓴이 강이슬은 〈SNL 코리아〉 〈인생술집〉 〈놀라운 토요일〉 등 TV 프로그램에서 근면하게 일하며 소소하게 버는 방송작가다.
제6회 카카오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안 느끼한 산문집》으로 대상을 받고 출판 계약을 하며 난생처음 갑이 된 데 이어 《새드엔딩은 없다》까지 출간했다.
술과 개와 밤을 좋아하고 욕을 잘하지만 착하다. 어제도 오늘도 가난했고 내일도 가난하겠지만 가난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가지고 있다.
  • 2021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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