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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부부가 예술가에게 보내는 편지 (17)

4월의 부드러움과 불완전함을 닮은 배우 장국영 님에게 下

나의 열두 살과 스물네 살 사이의 세계

저는 사람의 눈에서 영혼이 흘러나온다는 걸 당신의 눈을 보고 믿었습니다.
외모지상주의자는 아니지만 당신 얼굴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겠어요.
당신 얼굴은 좀 놀라운 데가 있거든요. 단순히 잘생겼다고만 할 수 없는 무엇! 맞아요.
당신은 꼭 ‘사월’처럼 생겼어요.
사월의 해사함, 사월의 부드러움, 사월의 번짐, 피어남,
유약함, 빛남, 불완전함, 슬픔….
© <해피 투게더 / 春光乍洩 / Happy Together>(1997)
레슬리.

당신의 영어 이름을 부르는데, 왼쪽 가슴 아래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집니다. 슬픔이 몸에 막 도착했을 때, 물리적으로 느껴지는 몸의 통증. 이런 걸 뭐라 불러야 할까요?

몇 년 전 남편이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 있었어요. 좋은 날씨였어요. 차창 틈으로 바람이 들어오고 바쁜 일은 없었지요. 꽃, 나무, 사람들을 구경하며 드라이브를 하는 중이었어요. 어쩌다 당신 이야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렇게 말한 걸 기억해요.

“장국영이 죽었을 때, 내 어린 시절도 같이 죽었다는 걸 알았어. 지나갔구나 결국. 어린 나도, 어린 시간들도….”

열두 살 때부터 당신을 좋아했어요.

스물네 살 때 당신이 죽었지요.

두 문장으로 쓰고 나니 슬퍼지네요. 열두 살 때부터 꽤 오랫동안 당신이 나온 사진, 영화 브로마이드, 음반, 비디오테이프 등을 열심히 모았습니다. 당신은 제가 처음으로 열렬히 사랑했던 스타였어요. 이후에도 당신만큼 좋아했던 스타는 없었지요.

학교가 끝나면 사촌언니와 둘이서 당신이 출연한 영화를 보았습니다. 비디오대여점에서 비디오테이프(그때는 모두 영화를 그렇게 보았지요!)를 빌려와 어느 날은 두 편, 세 편도 보았지요. 얼마나 재미있었던지! 어른들은 바빴고, 우리는 시간이 많았기에 비디오를 자주 빌려다 보았어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홍콩영화의 전성기였잖아요. 지금의 한류처럼 홍콩 연예인들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지요. 주윤발, 유덕화, 알란 탐의 인기도 대단했지만 저와 사촌언니의 원픽은 언제나 당신이었습니다. 〈아비정전〉 〈영웅본색〉 〈패왕별희〉 〈해피 투게더〉 〈동사서독〉 〈천녀유혼〉 〈백발마녀전〉 〈야반가성〉 〈종횡사해〉 〈성월동화〉 〈연지구〉 〈금지옥엽〉 〈가유희사〉….

그 많은 영화들! 제가 처음으로 당신에게 반한 건 〈장국영의 H2O〉라는 영화 때문이었어요. 청바지에 티셔츠를 차려입은 앳된 당신이 미소 짓는 모습, 거기에 반하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요.

그때 본 영화 중 어려운 작품들도 있었어요.

특히 〈패왕별희〉는 중국 현대사를 다루고 있어 난해한 부분이 있고, 러닝타임도 길었는데 한눈팔지 않고 끝까지 본 기억이 있네요.

레슬리, 저는 사람의 눈에서 영혼이 흘러나온다는 걸 당신 눈을 보고 믿었습니다. 외모지상주의자는 아니지만 당신 얼굴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겠어요. 당신 얼굴은 좀 놀라운 데가 있거든요. 단순히 잘생겼다고만 할 수 없는 무엇! 맞아요. 당신은 꼭 ‘사월’처럼 생겼어요. 사월의 해사함, 사월의 부드러움, 사월의 번짐, 피어남, 유약함, 빛남, 불완전함, 슬픔…. 사월이 품은 많은 것이 당신 얼굴에 있어요. 그래서 당신은 사월에 떠났나요?

편지를 쓰다 어릴 때 좋아했던 당신의 노래를 찾아 들어보았습니다. ‘위니종정(爲你鍾情)’. (당신은 동명의 카페를 운영한 적도 있죠?)

그땐 가사의 뜻도 모른 채 음색이 그윽하고 애달파 좋아했는데요. 누가 해석해놓은 가사를 30년이나 지나서 보니, 먹먹해집니다.

“당신을 사랑해. 내 모든 걸 바칠 테니, 이 사랑을 소중히 간직해 주세요.”

이 노래가 한 사람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인 줄 늦게 알았지만, 무슨 상관인가요. 저는 이미 당신의 목소리로 많은 부분을 이해했는 걸요. 저는 이 노래를 ‘장국영의 고별 콘서트 실황’을 보다 알게 되었어요. 당시에 비디오테이프를 소장하고 있어 스무 번은 넘게 보았을 거예요. 은퇴를 선언하는 콘서트라서 슬픈 분위기가 있었지요. 마지막에 당신이 눈물을 보이고는, 관객에게 등을 돌려 걸어가는 장면에선 매번 울었어요. 끝난 줄 알았는데 한참 만에 다시 나온 당신이 검은 망토를 두른 채 부른 노래가 ‘위니종정’이었어요. 젖은 눈, 처연하고 그윽한 목소리…. 당신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꼭 한번 이 노래를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위니종정’을 부르는 당신을 한번 보면 좋겠다고요.

한동안 어느 자리에서 당신 이야기가 나오면 이렇게 말했어요.

“아름다운 배우였지. 참 좋아했는데.”

거짓말은 아니지만 진실도 아니었지요.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던 까닭은 생각보다 제 마음이 크기도 했고,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워낙 많았기에 새삼스럽게 보일 거라 생각해서이기도 했어요. 상자에 당신 사진을 모으는 일에 몰두하던 열두 살 아이가 어른이 되는 동안 어떤 시간이 흐른 걸까요. 어린 시절 사랑한 스타는 아이의 시절이자 세상을 이루게 되잖아요. 한때 당신이 제 세상이었어요.

레슬리, 언젠가 자신과 가장 닮은 캐릭터로 〈아비정전〉의 ‘아비’를 꼽은 적 있지요? 영화 뒷부분에서 꼭 쥔 주먹을 흔들며 우거진 숲길을 성큼성큼 걸어가는 아비의 뒷모습이 나오잖아요. 그 장면을 정말 좋아해요. ‘슬픔으로 잔뜩 화가 난’ 아비의 등, 배경음악으로 ‘Always in my heart’가 흐르고요. 사랑이 없어서 끝나는 게 아니라고, 돌아선 당신 등이 말하는 것 같았어요.

2003년 4월 1일, 세상에 등을 돌린 당신 모습도 아비의 뒷모습과 다르지 않았을 거라 생각해요. 주먹을 꼭 쥐고 얼굴을 보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뒤도 보지 않고 떠났을 거라고 상상해요. 당신이 홀로 외로웠을 거라고 생각하면 슬퍼집니다. 목구멍에 커다란 복숭아 씨앗이 걸린 것처럼 힘드네요.

레슬리, 당신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있죠?
“Will you remember me?”

〈아비정전〉에 흐르던 음악의 제목을 빌려 말할게요.
Always in my heart.

오래 그리울 거예요.

박연준
파주에 살며, 일주일에 세 번 발레를 배운다. 창문, 숲, 기러기를 좋아한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베누스 푸디카》 《밤, 비, 뱀》이 있고, 산문집 《소란》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등을 썼다.
  • 2021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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