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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부부가 예술가에게 보내는 편지 (17)

4월의 부드러움과 불완전함을 닮은 배우 장국영 님에게 上

만일 인생이 한 편의 영화라면…

4월에는 의례를 치르듯 당신의 영화를 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두이노의 비가》에서
“누가 승리를 말하는가? 오직 극복만이 전부인 것을”
이라고 쓴 구절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비극이건 희극이건 삶에는 애초 승리가 있을 수 없다는 뜻이겠지요.
극복만이 전부라니!
거의 모든 인생이 해피엔딩이 아닌 것은 그 때문이겠지요.
© <해피 투게더 / 春光乍洩 / Happy Together>(1997)
버드나무잎은 푸르고 길게 뻗은 가지는 낭창낭창한데, 가지를 싸고도는 바람은 부드러운 훈풍입니다. 만개한 흰 꽃은 대낮에 켠 환한 등(燈)인 듯 빛나고, 벌들은 꽃 둘레에서 잉잉거려요. 이 봄날 불행의 총량을 혼자 짊어진 듯 살아야 할 이유는 없겠지요. 감자와 소금과 생강을 파는 장사꾼이건, 빌딩 바닥을 닦는 청소부이건, 창백한 낯빛으로 종일 주가의 등락을 지켜보는 주식 투자자이건 누구라도 봄의 찬란한 빛을 누리기에 적당하겠지요.

우리 운명의 주요 성분이 슬픔이거나 고달픔일지라도 오늘은 흰 꽃 그늘 아래서 봄의 기쁨을 다디단 사탕처럼 입속에서 조금씩 아껴 먹어도 좋겠습니다.

4월에는 의례를 치르듯 장국영(1956~2003), 당신의 영화를 봅니다. 당신이 4월의 주인공인 셈이지요.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두이노의 비가》에서 “누가 승리를 말하는가? 오직 극복만이 전부인 것을”이라고 쓴 구절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비극이건 희극이건 삶에는 애초 승리가 있을 수 없다는 뜻이겠지요. 극복만이 전부라니! 거의 모든 인생이 해피엔딩이 아닌 것은 그 때문이겠지요.

해마다 4월 1일이면 홍콩 만다린오리엔탈호텔 정문에는 우리 곁을 떠난 한 배우를 기리기 위해 백합과 사진 그리고 편지들이 쌓입니다.

2003년 4월 1일, 당대의 배우 겸 가수였던 당신은 늦은 점심으로 등심스테이크를 주문하고 두 시간 뒤 호텔 24층에서 뛰어내렸어요. 사스라는 전염병이 습격한 도시에 봄비가 젖어들던 날이었지요. 당신은 “마음이 피곤하여 더 이상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라는 말을 남기고 허공으로 몸을 날렸지요. 그날이 4월 1일, 만우절이었기 때문일까요? 당신의 죽음은 놀라움과 함께 많은 수수께끼를 남겼어요.

어쩐 일인지 외신으로 날아든 당신의 죽음이 거짓말 같던 그날의 기억이 또렷합니다.

1980년대 후반 한국에는 ‘홍콩영화’라는 장르가 유행했지요. 성룡·주윤발·주성치·유덕화·알란 탐·종초홍·양조위·장만옥·임청하·왕조현·유가령… 같은 당대 스타들의 이름을 꿰어봅니다. 그때 왜 다들 그토록 홍콩영화에 탐닉했을까요? 공중 높이 날고 싶지만 날지 못하는 날개를 가진 우리. 홍콩영화에는 그 시절의 상처와 슬픔, 실수와 좌절의 쓰라림, 서투름과 풋풋함 들이 녹아 있어요. 〈영웅본색〉이나 〈천녀유혼〉 같은 홍콩영화를 보며 젊은 시절을 통과한 세대에게 그 영화들은 젊은 날의 추억을 소환하는 매개물이겠지요.

그 시절의 ‘홍콩누아르’는 한 세대를 아우르는 정서의 패스포트 같은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겐 불안과 우울의 정념을 불러일으키고, 누군가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한 멜랑콜리에 젖겠지요. 〈아비정전〉 이후 당신의 영화들을 챙겨 보긴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홍콩영화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어요.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딱 한 번 지상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
〈아비정전〉(1990) 중 ‘아비’의 대사.


내 기억에 남은 〈패왕별희〉(1993)에서 여장(女裝)을 하고 ‘두지’ 역을 연기한 당신은 평범했지만, 〈아비정전〉에서 러닝셔츠를 걸치고 맘보를 추던 당신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어요. 〈아비정전〉에서 맡은 배역인 ‘아비’와 당신은 하나로 겹쳐집니다. 평생 바람 속에서 지친 날개를 쉬다가 딱 한 번 죽기 위해 지상에 내려앉는 “발 없는 새”처럼 당신은 그렇게 세상과 작별하지요. 장국영, 당신은 그렇게 비극의 별로 떠올랐습니다.

1960년대 홍콩을 배경으로 한 영화 〈아비정전〉에서 부모에게 버려진 아비를 연기하던, 아직 30대로 파릇파릇하던 당신의 표정에는 절절한 외로움과 우수의 그림자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아비(장국영)와 수리진(장만옥)은 동거를 하지만 결혼에 이르지는 못하지요. 아비가 어느 한곳에 정착할 수 없는 남자였기 때문이지요. 아비는 새 애인 루루(유가령)를 만나지만 결국 모두를 등지고 생모를 찾아 필리핀으로 떠납니다. 아비의 생모는 왜 자신의 아들을 버리고 떠났을까요? 왕가위 감독은 영화에서 그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모성의 결핍 속에서 외로워하는 청년 아비는 생모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지요. 아비는 조직폭력배와의 싸움에 휘말려 기차에서 총을 맞아요. 아비는 자기의 비극적이면서도 허망한 최후를 예감이라도 한 듯 숨을 거두기 전에 이런 대사를 내뱉지요.

“내가 정말 궁금했던 게 내 삶의 마지막 장면이었어. 그래서 난 눈을 뜨고 죽을 거야.”

당신이 맡은 배역들에는 우울증을 내면화하고 있는 당신이라는 캐릭터가 투영되었던 것일까요? 아마도 그럴지도 모르지요. 당신은 1956년 9월 12일, 처녀자리를 타고 태어났어요. 10남매 중 막내였지요. 훗날 당신은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조금은 이상한 아이였다. 아이 같지 않았고,

말도 별로 없어서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라고 말했더군요. 부모가 유기한 것은 아니지만 당신은 어린 시절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영국 유학 중에 친척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로 노래를 부르다 음악에 눈을 뜨면서 당신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준비를 하지요.

〈아비정전〉에서 〈동사서독〉(1994)을 거쳐 〈해피 투게더〉(1997)에 이르기까지 당신은 왕가위 감독과 함께 당신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들을 잇달아 찍었어요. 〈해피 투게더〉에서 ‘보영’(장국영)은 동성의 연인 ‘아휘’(양조위)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데, 그것은 보영의 바람둥이 기질 때문이었지요. 두 사람은 이구아수 폭포를 보러 가던 중에 대판 싸우고 헤어졌어요. 보영은 다시 아휘 곁으로 돌아와 그 주변을 맴돌고, 아휘는 결국 보영을 받아줍니다.

당신은 이 영화들에서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싶지만 늘 버림받는 역할을 소화해냈어요.

만일 인생이 한 편의 영화라면 우리는 주인공을 맡아 내레이션을 하겠지요. 누군가 죽으면 덧없음과 아쉬움을 남긴 채 한 편의 영화는 끝나지요. 산다는 건 그런 겁니다.

인생이라는 화면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겠지요. 당신은 〈해피 투게더〉에서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지요.

자, 4월의 영화는 끝났습니다.


아듀, 장국영!
아듀, 우리의 청춘!

장석주
전업 작가. 파주에 살며, 음악과 산책을 좋아한다. 주로 글을 쓰거나 인문학 강연을 한다.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철학자의 사물들》 《이상과 모던뽀이들》 《마흔의 서재》
《일상의 인문학》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 등과, 아내인 박연준 시인과 함께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 보오》를 썼다.
  • 2021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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