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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슬의 커피코피해피#17

도시락 싸는 기쁨

글 : 강이슬 

한 달에 두 번. 격주 금요일마다 나의 출근길이 리드미컬해진다. 음, 좋게 말해서 리드미컬이지 사실 좀 시끄럽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배낭 안에서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 엄마를 졸라서 산 철필통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났었다. 샤프랑 뚱뚱한 지우개랑 몽당연필이 철필통에 잘그랑잘그랑 부딪는 소리. 그때는 그 소리를 더 즐기려고 콧노래를 부르며 폴짝폴짝 신나게 걷곤 했는데 지금은 30대, 오만 것을 눈치 보느라 차마 그럴 수가 없다. 하여튼 그 소리는 철필통이 아니라 수저통에서 나는 소리다. 일회용품을 줄이려고 수저통을 들고 다니는데 보통 때는 사무실에 두고 쓰지만 스튜디오로 바로 출근하는 날엔 가방 속에 챙긴다.


대량 주문 도시락엔 비건 메뉴가 없다!

촬영장에선 점심과 저녁, 두 번의 끼니를 먹는다. 스태프를 위해 대량으로 주문한 도시락 중엔 비건 메뉴가 없다. 그러므로 촬영 날마다 두 끼의 도시락, 수저통, 텀블러를 챙기느라 내 가방은 무겁다. (가방만 보면 일하러 가는 사람이 아니라 먹으러 가는 사람 같다. 그래도 뭐, 다 먹고살자고 일하는 것 아니겠는가.)

촬영 당일에는 도시락을 쌀 시간이 없어 주로 전날 밤에 도시락을 꾸린다. 촬영 준비를 마치고 밤늦게 집에 와서 도시락을 싸느라 분주한 내 모습을 보고 함께 사는 박과 동생은 혀를 내두른다.

“오늘 밤에 파티 있는 거 아니지? 정말 대단하다.”

그도 그럴 것이 밥심으로 사는지라 도시락이 좀 거한 편이다. 도시락 싸는 데만 기본 한 시간이 걸린다. 1년 가까이 이런(?) 생활을 하다 보니 부지런하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데 고백하자면 나는 늘 게으른 편에 속했다. 엄마는 빠릿빠릿하고 부지런한 자신의 뱃속에서 나온 내가 게을러도 너무 게을러서 29년 동안 매번 놀랐다. 엄마는 매사 느긋하고 천하태평하게 늘어지길 좋아하는 나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매일 밤마다 내 미래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하늘이시여, 큰딸 이슬이를 늘어지게 하는 게으름의 사탄을 물리쳐주시고 부디 사람 구실 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아멘.”

세상에, 그런 내가 부지런하다는 말을 다 들을 줄이야. 그런데 부정할 수가 없다. 채식을 시작한 후로 정말 부지런해진 건 맞으니까.



아무도 해치지 않는 식단

도시락 싸는 일이 번거롭긴 하지만 귀찮지는 않다. 시장에 철마다 달리 깔리는 예쁜 빛깔의 채소를 고르는 일이 재미있고, 볶느냐 삶느냐 찌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채소의 향과 식감이 재미있고, 맛있는 도시락을 싸고 나면 다음 날 도시락을 먹는 시간이 기대된다. 물론 그래도 사람인지라 피곤하고 귀찮을 때가 있다. 그럴 땐 내가 조금 귀찮은 대가로 지켜온 생명들을 생각한다. 아무도 해치지 않는 식단. 아무도 아프지 않은 식단. 아무도 슬프지 않은 식단. 생명을 지키는 대가가 약간의 번거로움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값싼 대가가 아니겠는가.

앞으로도 2주에 한 번씩 내 가방은 덜그럭거릴 것이다. 그 소리를 칭찬 삼아 들으며 무거운 가방을 메고 가벼운 마음으로 스튜디오에 출근해야지. 점심, 저녁을 누구보다 든든하게 챙겨 먹고 기쁜 마음으로 돈을 벌어 해치지 않는 식탁을 부지런히 차릴 것이다.

글쓴이 강이슬은 〈SNL 코리아〉 〈인생술집〉 〈놀라운 토요일〉 등 TV 프로그램에서 근면하게 일하며 소소하게 버는 방송작가다.
제6회 카카오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안 느끼한 산문집》으로 대상을 받고 출판 계약을 하며 난생처음 갑이 된 데 이어 《새드엔딩은 없다》까지 출간했다.
술과 개와 밤을 좋아하고 욕을 잘하지만 착하다. 어제도 오늘도 가난했고 내일도 가난하겠지만 가난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가지고 있다.
  • 2021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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