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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부부가 예술가에게 보내는 편지 (16)

눈물의 시인 박용래 선생께 上

유순한 이들의 슬픔의 빛

“《먼 바다》는 내가 가장 아껴 읽는 시집 중 하나입니다.
평생 산출한 것을 다 모은 ‘전집’이라지만 고작 300쪽에도 못 미치는 책이지요. (중략) 호박잎에 모이는 빗소리 같던 용래 성님의 시.
여문 호박씨 같고 해바라기씨 같은 옹골찬 겨레말로 꾹꾹 눌러 쓴 당신의 짧고 견결한 시를 읽을 때마다 정량을 초과하는 노스탤지어 때문에 자주 울컥하곤 했지요.”
용래 성님

1984년에 처음 출간한 박용래(朴龍來) 시전집(詩全集) 《먼 바다》는 내가 가장 아껴 읽는 시집 중 하나입니다. 평생 산출한 것을 다 모은 ‘전집’이라지만 고작 300쪽에도 못 미치는 책이지요. 한 세대 위의 어른인 당신을 내 고장 사투리로 ‘성님’이라고 부를 때 다소 불경스런 느낌이 없지는 않다만 나는 굳이 그 호칭을 고집하겠습니다.

용래 성님, 당신은 1925년 음력 정월 14일, 충청남도 논산군 강경읍에서 유생(儒生)이자 소지주인 밀양 박씨 가문의 늦둥이로 태어났어요. 위로 형님이 셋 그리고 당신이 ‘홍래 누님’이라고 부른 누이가 하나. 홍래 누님은 연로한 부모 대신 어린 당신을 지극한 마음으로 돌봤지요. 소설가 이문구는 당신이 “하나뿐인 누이를 누구보다도 옴살로 따랐다”라고 썼더군요. 당신보다 늦게 논산에서 태어난 나는 그 가느다란 인연에 기대어 당신을 다정하게 부르고 싶은 것이지요.

아아, 고향! 누구에게나 고향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행복한 기억의 원형이지요.

“머리가 마늘쪽같이 생긴 고향의 소녀와/한여름을 알몸으로 사는 고향의 소년과/같이 낯이 설어도 사랑스러운 들길이 있다//
그 길에 아지랑이가 피듯 태양이 타듯/제비가 날듯 길을 따라 물이 흐르듯 그렇게/그렇게//천연히//울타리 밖에도 화초를 심는 마을이 있다/오래오래 잔광이 부신 마을이 있다/밤이면 더 많이 별이 뜨는 마을이 있다.”
- 〈울타리 밖〉


울타리 밖에도 화초를 심는 고향은 그곳을 떠난 뒤에야 발견되고 그 의미가 더 또렷해지는 장소지요. 성님의 시는 한결같이 “어머니 젊었을 때 눈썹 그리며 아끼던 달”처럼 슬프고 아름답고 그리운 고향을 그렸어요. 성님, 우리는 언제 그 고향에 돌아가 그 초록 들길을 다시 걸어볼 수 있을까요?

오동꽃 우러르면 함부로 노한 일 뉘우쳐진다.
잊었던 무덤 생각난다.
검정 치마, 흰 저고리, 옆 가르마, 젊어 죽은 홍래 누이 생각도 난다.
- 〈담장〉


이 시에 나오는 홍래 누이가 초산의 산고(産苦)를 이기지 못하고 불귀의 객으로 세상을 떠난 뒤 당신은 말수가 부쩍 줄었지요. 누이를 잃은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명랑 쾌활하던 기질은 우울한 내향성으로 바뀌었지요. 강둑의 버들꽃 같은 누이를 잃고 응어리진 슬픔을 탕약 달이듯 달여 매운 시구 몇 개를 빚었지요. 용래 성님의 뮤즈인 ‘젊어 죽은 홍래 누이’ 같은 존재가 내겐 없다는 게 끝내 쓸쓸하고 분했지요.

당신의 시에는 한때 번성했다가 멸망해버린 옛 나라 백제의 후예들, 잘난 것도 못난 것도 없는 죄 없이 유순한 사람들이 내면에 품었을 정한과 슬픔이 면면히 녹아 흐르지요. 옥양목빛 햇빛이 내리는 들녘 한가운데 홀로 서서 “나는 슬프냐, 나는 슬프냐”라고 혼잣말로 묻는 성님의 마른 목소리가 내 귓가에 쟁쟁 울리는 듯합니다.

“눌더러 물어볼까 나는 슬프냐 장닭 꼬리 널리는 하얀 바람 봄길 여기사 부여(扶餘), 고향이란다 나는 정말 슬프냐.”
- 〈고향〉


당신 시집을 열면 댑싸리, 모과, 능금, 이끼, 달개비, 민들레, 엉겅퀴, 괭이풀, 목화다래, 상수리, 수수이삭, 미루나무, 원두막, 바자울, 쇠죽가마, 잉앗대, 횃대, 멍석, 모깃불, 성황당, 옹배기, 볏모개, 이팥, 새알콩, 시래기죽, 아욱죽, 목침, 베잠방이, 얼레빗, 실타래, 옥양목, 까마귀, 동박새, 반딧불, 베짱이, 소금쟁이, 물방개, 버들붕어, 메기, 쏘가리 같은 겨레말들이 무시로 출몰하지요. 이 겨레말 중 일부는 옛 풍물이 그렇듯 자취를 감추어서 젊은 세대에게 낯선 울림을 울리겠지요. 당신은 진주보다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이 겨레말들을 갈고닦아 시어로 썼지요. 스무 살 문학 청년이던 나는 중부 곡창지대 노릇을 하는 논산 내포평야 그 너른 들녘, 놀뫼와 나루, 채운산 따위의 지명들이 환기하는 정서에 젖은 채 당신의 시를 참 열심히도 읽었더랬죠. 호박잎에 모이는 빗소리 같던 용래 성님의 시. 여문 호박씨 같고 해바라기씨 같은 옹골찬 겨레말로 꾹꾹 눌러 쓴 당신의 짧고 견결한 시를 읽을 때마다 정량을 초과하는 노스탤지어 때문에 자주 울컥하곤 했지요.

“탱자울에 스치는 새떼/기왓골에 마른 풀/놋대야의 진눈깨비/일찍 횃대에 오른 레그호온/이웃집 아이 불러들이는 소리/해 지기 전 불 켠 울안.”
- 〈울안〉


〈울안〉 같은 시는 내 무의식에 깊이 잠긴 토속 정서와 노스탤지어를 깨우곤 합니다. 겉으로는 없는 장소에로의 귀환, 불가능한 장소로의 돌아감에서 발생하는 아련한 슬픔이지만 속내로는 소멸된 시간을 향한 그리움이 노스탤지어의 본질 아니던가요. 실향자들이 고향에 돌아가는 것에 실패하는 이유는 그것이 더 이상 찾을 길 없는 사라진 시간으로의 귀환이기 때문이지요.

용래 성님, 당신은 일제강점기인 1943년 지역 명문인 강경상업학교를 전교 수석으로 졸업하고 조선은행(지금 한국은행)에 특채되었어요.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블라디보스토크행 조선은행권 현금 수송열차에 입회인으로 무장경호원과 함께 탑승해 두만강을 건넌 당신 이야기는 전설로 떠돌지요. “원산역을 지날 때 눈발이 비치더니, 청진을 지나니께 정신없이 쏟아지는디, 아― 그런 눈은 처음이었어”라고, 당신은 북방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무시무시하게 쏟아붓던 눈발에 감탄을 내뱉곤 했습니다. 해방 뒤 인구 5만의 중부도시인 대전에 뿌리를 내린 당신은 도립병원 간호원이던 아내를 만나 아이 넷을 두었지요. 가장으로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중학교 준교사 자격증을 취득해 보문중학교, 한밭중학교, 대전북중학교 등에서 국어교사로 후학들을 가르쳤고요. 하지만 이내 그만두고 아내를 대신해서 집안 살림을 도맡아 아이들을 기르고 서정시 몇 줄 끼적이는 한량으로 돌아갔어요.

용래 성님, 당신은 이 땅의 빼어난 서정시인이기에 앞서 조촐한 인격으로 존경받는 고향 성님이고, 아이를 포대기에 업고 돌아다녀 ‘애보개’라는 놀림마저도 기꺼워하던 다정한 아버지였지요. “골담초숲에서나 구름 위에 태어났어도 좋았을 무능한 아버지의 울새들” 같은 딸 넷과 늦둥이 아들 하나를 올곧게 길러낸 성님. 생전에 “판소리나 한마당 멋들어지게 뽑을 줄 아는 콩새”이고 싶다던 당신은 1980년 7월,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집 안에서 누워 지내다가 11월 21일 오후에 심장마비로 모스러진 섬돌 같은 삶을 마감했어요. 다소 허망한 죽음이었지요.

용래 성님, 왜 그리 서둘러 세상을 떠났나요? 오늘은 당신과 무릎을 맞대고 개다리소반 위에 탁주 주전자를 놓고 주거니 받거니 밤새 마시고 대취하고 싶습니다.

장석주
전업 작가. 파주에 살며, 음악과 산책을 좋아한다. 주로 글을 쓰거나 인문학 강연을 한다.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철학자의 사물들》 《이상과 모던뽀이들》 《마흔의 서재》 《일상의 인문학》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 등과, 아내인 박연준 시인과 함께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 보오》를 썼다.
  • 2021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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