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s pick

magazine 인기기사

topp 인기기사

daily 인기기사

강이슬의 커피코피해피#16

방송작가로 산다는 것

글 : 강이슬 

얼마 전 방송작가협회에 가입했다. 예능 구성작가의 경우 협회 가입 조건으로 60개월 이상의 경력이 필요하다. 사실 60개월의 경력은 방송이 송출된 시기만 따진 것으로, 방송이 송출되기 직전까지 일한 시간 즉 ‘기획기간’은 협회에서 인정하는 경력에 포함되지 않는다. 나는 방송작가로 일한 지 7년 만에 가입했는데, 보통 9년에서 10년 차에 가입하는 것에 비하면 나름 빠른 편이다.

막내 때는 협회에 가입하는 날이 오지 않을 미래처럼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tvN에서 방송작가 일을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케이블 방송에서 일한 경력이 지상파의 절반으로 계산됐다. 그러니까 2개월을 일해도 1개월의 경력만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다행히 지금은 제도가 바뀌었다).


여의도 방송작가협회 건물에 간 날

항상 레귤러 프로그램에서 일한다는 보장도 없었기에 더 절망스러웠다. 8회, 12회짜리 프로그램이 많아지면서 레귤러 방송이 귀해진 탓이었다. 보통 12회짜리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데 3개월 정도가 걸린다. 케이블 채널에서 3개월 기획하고 3개월 방송하는 식이라면 협회에서 인정하는 60개월의 경력을 채우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어림잡아도 최소 15년이었다. 그마저도 기획했던 프로그램이 하나도 엎어지지 않는 운 좋은 상황을 가정했을 때 이야기지만.

동기 작가들과 꼭 15년 이상 버텨서 방송작가협회에 함께 들어가자고 의지를 다졌다. 방송작가협회에 들면 어떤 혜택을 받는지 잘 모르면서도 그랬던 이유는 일반 회사처럼 승진제도가 없는 환경이었기에 협회 가입 자체가 마치 어떤 감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운이 좋았던 덕에 꾸준히 레귤러 프로그램에서 일했고 막내 때 예상했던 시간을 절반이나 앞당겨 협회에 가입했다. 가입 원서를 내기 위해 처음으로 여의도에 있는 방송작가협회 건물에 갔던 날, 그동안 일했던 기억들이 파도처럼 두서없이 밀려왔다. 가입 원서에 적힌 내 경력들을 손으로 따라 짚으며 인정받지 못해 적히지 못한 기획기간을 추도했다.

그동안의 작가 경력을 반추했을 때 스스로가 가장 방송작가답게 느껴졌던 시간은 단연코 기획기간이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우리 이제 어떤 방송을 만들까?’라는 질문 하나에 매달리는 시간. 좋다고 생각해 몇 날 며칠 밤잠을 줄이고 발전시킨 아이템은 윗선에서 까이기 십상이었고 그럼 몇 번이고 다시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을 파헤치며 아이템을 찾아야 했다.


구름을 손에 쥐는 황홀한 순간

작가들은 본래 받아야 하는 월급보다 20~50% 적은 돈을 받으면서도 하루 온종일 사무실에 앉아 뜨겁게 회의를 했다. 그러다 마침내 가닥이 잡히면 여기저기에서 방대한 양의 자료를 끌어모아 더 가열한 회의로 아이템을 구체화했다. 회의실 한쪽 구석에 페이퍼가 쌓여갈수록 피로도도 높아졌지만 설명할 수 없는 흥분과 기대로 피곤을 잊고 일했다. 기획기간 내내 뼈가 닳도록 준비한 아이템이 언제 갑자기 엎어질지 몰라 마음 졸이다가 마침내 프로그램 제목이 결정되고 첫 방 날짜가 확정되면 이젠 진짜로 방송이 되는구나,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기획이란 뜬구름을 잡으려고 최선을 다해 사방으로 두 팔을 허우적대는 헛짓거리를 하다가 진짜로 구름을 쥐게 되는 일 같다.’

지금 일하고 있는 tvN 〈놀라운 토요일〉의 기획을 마쳤을 때 일기장에 적은 글이다. 열 몇 명의 제작진이 회의실에 자발적으로 갇혀 분식으로 끼니를 때우며 회의에 회의를 거듭해 만든 그 프로그램은 이번 달 벌써 3주년을 맞이한다. 꼭 세 돌을 맞는 자식처럼 기특하고 애틋하다. 방송작가협회에서 인정하는 경력의 반 이상을 〈놀토〉에서 쌓은 터라 더 특별한지도 모르겠다. 비록 기획기간은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기획기간을 가장 뜨거웠던 순간으로 무척 생생하게 기억한다. 구름을 손에 쥐는 황홀한 순간을 까먹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테니까.

글쓴이 강이슬은 〈SNL 코리아〉 〈인생술집〉 〈놀라운 토요일〉 등 TV 프로그램에서 근면하게 일하며 소소하게 버는 방송작가다.
제6회 카카오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안 느끼한 산문집》으로 대상을 받고 출판 계약을 하며 난생처음 갑이 된 데 이어 《새드엔딩은 없다》까지 출간했다.
술과 개와 밤을 좋아하고 욕을 잘하지만 착하다. 어제도 오늘도 가난했고 내일도 가난하겠지만 가난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가지고 있다.
  • 2021년 04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
이름      비밀번호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75(독자팀)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위원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