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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부부가 예술가에게 보내는 편지 (15)

당신의 삶은 ‘인간 실격’ 자체였지만…다자이 오사무께 下

목이 쉬거나 힘이 빠져도

“다자이 선생님, 엄살쟁이는 엄살쟁이를 한눈에 알아보는 법.
선생님은 ‘엄살계의 대부’가 아니던가요?
엄살계의 대부답게 소란스러운 인생을 살다 가셨습니다.
여러 번의 자살 미수, 생활고, 지인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울며불며 쓴 편지들, 괴로움에 대한 토로, 슬픔, 괴로움, 허덕임….
그러나 저는 당신이 쓴 문장 앞에서, 늘 당신 편이 되고 말아요.”
올겨울 추위는 유난했습니다. 지난주엔 태풍만큼 강한 바람이 불어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곤욕이었습니다. 몇 걸음 걷다 보이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숨고, 다시 몇 걸음 못 가 건물로 피신하기를 반복했습니다. 추위에 약한 저로서는 추위야말로 평생의 적이라 말하면 당신은 코웃음 치실까요? 제가 엄살이 많은 편이란 건 인정합니다. 덥고, 춥고, 무섭고, 아프고, 슬프고, 화나고, 괴롭고, 좋고, 싫은 것 앞에 ‘너무’를 붙이며 호들갑을 떠는 일이 많긴 하거든요.

저희 남편은 제 엄살에 학을 떼더군요.

때문에 제가 하는 걱정들, (이런저런) 통증, 신경 쓰거나 두려워하는 일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답니다. 누군가에겐 별일이 다른 누군가에겐 유난한 일이 되기 일쑤인 세상에서 살다 보면 억울하기도 해서, 이렇게 항변한 적도 있지요.

“아니, 모든 게 다 괜찮을 것 같으면 내가 글은 왜 쓰고 시는 어떻게 쓰겠어?”

다자이 선생님, 엄살쟁이는 엄살쟁이를 한눈에 알아보는 법. 선생님은 ‘엄살계의 대부’가 아니던가요?

당신은 엄살계의 대부답게 소란스러운 인생을 살다 가셨습니다. 여러 번의 자살 미수, 생활고, 지인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울며불며 쓴 편지들, 괴로움에 대한 토로, 슬픔, 괴로움, 허덕임…. 그러나 저는 당신이 쓴 다음과 같은 문장 앞에서, 늘 당신 편이 되고 말아요.

“행복은 하루 늦게 온다.
무서운 건 부채질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
비 내리는 항구.
누가 그러더군요. 저의 나쁜 점은 ‘현재보다 과장되게 비명을 지르는 것’이라고. 고뇌가 깊을수록 존귀하다는 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전, 몸치장한 적은 있지만, 현재의 비참함을 과장해서 이러쿵저러쿵 한 적은 없습니다. 자존심을 위해 글을 쓴 적은 없습니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행복하게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
다자이 오사무, 《다자이 오사무 서한집》, ITTA, 187쪽.


엄살이란 오지 않은 사태를 예감하는 능력입니다. 이곳으로 오고 있는 슬픔과 고통, 위험을 미리 겪고 벌벌 떠는 일입니다. 엄살이란 감정이입의 극치를 경험하는 일, 미래를 미리 겪는 일,

내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 오감이 아니라 십이감쯤 발달해 예민한 더듬이로 평생을 사는 일이지요! 바람에 흔들리는 사시나무 이파리들, 한 잎 한 잎의 영혼을 느끼는 일입니다. 엄살에 일가견이 있는 자로서 저는 당신이 말한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루 늦게 오는 행복이여. 부채질에 넘어가지 않는 무서운 사람이여. 자극에 대한 역치가 높은 사람들이여! 한탄할 만하지요. 어떤 예술가가 피 한 방울에서 장미를,

눈물 한 방울에서 바다를 찾는다 한들 그걸 유난하다고만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요.

‘과장과 비약’까지가 우리 일이니까요.

한때 일본 문학에 심취했던 적이 있습니다. 대학 2, 3학년 때였을 거예요. 도서관에 들어서면 행복했습니다. 고요하고 풍성한 식탁이 제 앞에 차려져 있다고 상상했습니다. 저는 늘 허기졌어요. 양서를 양껏 읽고 장성하고 싶었지요. 앞서 태어난 훌륭한 작가들이 꼭 저를 위해서 이 많은 책들을 써놓은 것 같았지요.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 작가들이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많이 유학을 갔다고 알고 있는데, 그 시기 우리 작가들이 어떤 작품을 읽고 영향을 받았을까 궁금했습니다.

일본 현대 문학을 뒤지며 ‘제 작가’를 발굴하는 작업에 몰두했지요. (이런 작업으로 취향이란 게 생기지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 오에 겐자부로, 무라카미 하루키까지 즐거이 읽었지요.

물론 다자이 오사무, 당신을 발굴한 일은 의미 있는 일 중 하나였지요.

미시마 유키오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지요? “다자이가 고민하는 일은 냉수마찰이나 맨손 체조 몇 번이면 사라질 일”이라고요. 당신은 그에 대해 “나도 냉수마찰이나 맨손 체조를 안 해본 건 아니”라며 대거리하는 글을 쓰기도 했고요.

두 사람의 다른 성미, 다른 태도, 글로 티격을 벌이는 상황이 재밌었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예전에 저는 미시마 유키오의 문학을 더 좋아했어요. 당신이 쓰는 글보다 뭔가 무게가 있어 뵈고 폼이 난다 생각했던 것 같아요. 웬일인지 나이가 들수록 당신의 글이 더 좋아지지만요. 소설은 ‘사는 데 서투른 인간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다루는 분야 아닌가요. 작가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쓸쓸한 자들의 목소리를 진실하게 담아 보여주는 일’이라면 그걸 제일 잘한 건 당신입니다.

요새 저는 한 문학잡지에 소설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종종 두려움을 느껴요. 외부의 시선, 소설의 완성도, 플롯의 탄탄함…. 이런 걸 따져 생각하면 도무지 글의 진도가 나가지 않더군요. 그럴 때 선생님의 이 문장을 읽으면 도움이 됩니다.

“설령 작품구성이 무너지고 엉망진창이라는 비평가들의 욕을 들어도, 작자의 의도는 목이 쉬거나 힘이 빠져도 계속해서 주장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
다자이 오사무, 《다자이 오사무 서한집》, ITTA, 44쪽.


목이 쉬거나 힘이 빠져도 쓰고자 한 것을 쓸 것, 외부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말 것, 다짐합니다. 문학에 대한 당신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아요. 한 소설을 쉰 번 이상 고쳐 썼다고 고백하기도 하셨지요. 엄살쟁이라고 문학에까지 엄살을 부린 건 아니었지요. 선생님의 마지막 소설이 된 《사양》을 역작으로 만들고 싶다는 포부, 그 포부는 이루어졌습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소설을 사랑한답니다.

벌써 입춘도 지났습니다. 1월 중 며칠 기온이 영상 10도까지 오른 적 있었는데, 성미 급한 개구리들이 철을 모르고 그만 겨울잠에서 깨어났다고 하더군요. 그 후 불어 닥칠 혹한은 까맣게 모르고요. 그때 깨어난 개구리들이 걱정되네요. 죽었을까요? 죽었다 해도 운명이겠지만, 모든 개구리들이 꼭 경칩에 맞춰 착착착 깨어나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 모르고 깨어나 죽었을 개구리, 모르고 태어나 고단한 우리들. 마음이 갑니다. 철모르는, 엄살쟁이들에게.

생이 오롯이 한 사람의 것이 아니고 죽음이 오직 죽은 자의 것이 아니라면, 당신을 죽게 한 게 세상 탓이 아니라고 어찌 말할 수 있을까요. 눈이 내리네요. 봄을 마중하는 것으로 눈만 한 게 없지요. 쌓이는 눈을 보며 당신의 분투를 생각하겠습니다.

박연준
파주에 살며, 일주일에 세 번 발레를 배운다. 창문, 숲, 기러기를 좋아한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베누스 푸디카》 《밤, 비, 뱀》이 있고, 산문집 《소란》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등을 썼다.
  • 2021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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