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s pick

magazine 인기기사

topp 인기기사

daily 인기기사

강이슬의 커피코피해피#15

할아버지와 라면 공장

글 : 강이슬 

대학교 4년 내내 학교 앞 고시원에서 살았다. 내가 살던 고시원 공동 주방에는 김치라면, 삼양라면, 진라면이 상시 구비되어 있었다. 덕분에 대학생 때 하루 한 끼는 꼭 라면을 먹었다. 세 끼를 모두 라면으로 해결하는 날도 적지 않았다. 내가 매일 라면을 먹는다는 사실을 안 친한 선배는 안쓰러워하는 얼굴로 용돈이라도 줄 테니 라면 말고 밥 좀 먹으라고 걱정해주기도 했다.

물론 당시 내 주머니 사정이 어렵기도 했지만 사실은 라면을 몹시 좋아해서 끼니마다 라면을 찾았다. 출출하거나 밤늦도록 잠이 오지 않거나 술이 당기는 날엔 공동 주방에서 라면을 하나 끓여 한 평짜리 내 방으로 들고 와 후루룩 후루룩 소리를 내며 먹었다. 탱글탱글하고 짭조름한 면발을 입안 가득 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어째서 라면은 매일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걸까 궁금해하다가, ‘아! 나는 아빠 딸이라서 그렇구나’라는 결론을 내리곤 했다.


열한 식구의 귀중한 영양 공급원

아빠의 어릴 적 식탁엔 하루가 멀다 하고 라면이 올라왔다고 한다. 9남매와 부모님까지 총 열한 명이 둘러앉은 밥상 위에 곰탕솥에서 끓인 푸짐한 라면이 올라오는 날이면 골목까지 황홀한 라면 냄새가 꽉 들어차곤 했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에 부족함 없이 라면을 먹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던 건 할아버지가 라면 공장에서 일한 덕이었다. 제조과정에서 하자가 생긴 라면들, 이를테면 귀퉁이가 부서졌거나 조금 덜 튀겨졌거나 혹은 너무 오래 튀겨진 라면들은 사람이 들어갈 만큼 커다란 포대자루에 담겨 폐기물로 분류됐다. 물론 진짜로 폐기된 라면은 단 한 조각도 없었다. 공장 직원들이 퇴근길에 알뜰하게 챙겨 갔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자전거 뒤에 싣고 온 커다란 라면 자루와 묵직한 수프 봉다리는 열한 식구의 귀중한 영양 공급원이었다. 뜨거운 라면을 욕심껏 입에 밀어 넣을 때마다 아빠는 생각했다. ‘라면 공장에서 일하는 울 아부지 진짜 멋져’, 그러나 그 말은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면발과 함께 꿀떡꿀떡 삼켜졌다. 할아버지가 가져온 라면에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건 아빠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동생들뿐이었다. 할머니와 형, 누나들의 낯은 어두웠고 할아버지는 바쁘게 오가는 아홉 남매의 젓가락을 보며 씁쓸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라면 공장에서 일했던 이유는 빚보증을 잘못 선 탓이었다. 그 바람에 땅과 집은 물론이고 할아버지가 청춘을 다 바쳐 장만한 관광버스 여러 대를 날렸다. 그러고도 갚아야 할 빚이 산더미였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재산과 함께 토끼 같은 자식 아홉 명의 보장된 미래도 증발했다. 할아버지는 압도적인 상실감에 몸져누울 새도 없이 곧바로 라면공장에 취직했다.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야 할 아이들이 자그마치 아홉이나 있었던 할아버지에겐 후회도 사치일 뿐이었다. 매일 저녁, 곰탕 냄비에 가득 찬 뜨거운 라면 앞에서 할아버지는 자꾸만 차오르는 한숨을 숨기느라 애꿎은 면발만 ‘후~후~’ 불었다.


“라면은 추억이야”

언젠가 아빠랑 분식점에서 라면과 김밥을 먹으며 나눴던 대화를 기억한다. 김밥에서 노란 단무지를 꼼꼼히 골라내던 아빠에게 편식하지 말라고 장난스럽게 잔소리했더니 아빠는 말했다.

“아빠 학창 시절에 집이 가난해서 도시락에 꽁보리밥이랑 단무지만 싸가지고 다녔거든. 그래서 지금도 보리밥이랑 단무지가 너무 싫어.”

“그러면 라면도 싫어해야지. 아빠는 맨날 라면만 먹었다면서, 라면은 안 싫어?”

“라면은 가난해서 먹은 게 아니지.”

“그럼 뭐야?”

“할아버지가 성실하셨던 덕분에 먹을 수 있었던 거지. 라면은 추억이야.”

아빠가 젓가락 가득 추억을 건져 올리며 웃었다. 나는 안 그래도 좋아하던 라면을 그날 이후로 더 좋아하게 되었다. 라면을 끓일 때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빠의 어릴 적 모습이 선했기 때문이다. 그 장면을 상상하며 라면을 먹으면 아빠의 추억을 삼키는 기분이 들어서 뱃속이 더 따뜻하다.

글쓴이 강이슬은 〈SNL 코리아〉 〈인생술집〉 〈놀라운 토요일〉 등 TV 프로그램에서 근면하게 일하며 소소하게 버는 방송작가다.
제6회 카카오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안 느끼한 산문집》으로 대상을 받고 출판 계약을 하며 난생처음 갑이 된 데 이어 《새드엔딩은 없다》까지 출간했다.
술과 개와 밤을 좋아하고 욕을 잘하지만 착하다. 어제도 오늘도 가난했고 내일도 가난하겠지만 가난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가지고 있다.
  • 2021년 03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
이름      비밀번호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75(독자팀)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위원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