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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슬의 커피코피해피#12

나를 키운 말들

글 : 강이슬 

오랫동안 쓰지 않아 휴면계정으로 전환되었던 이메일에 오랜만에 접속해보았다. 패스워드가 기억나지 않아 손 가는 대로 아무렇게나 키보드를 두드렸는데 한 방에 접속이 되었다. 머릿속에서 삭제된 기억이 손끝에는 생생한 감각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초등학생 때 만든 이메일의 패스워드는 당시 내가 좋아하던 만화영화 주인공의 이름과 내 생일을 조합한 것이었다. ‘아 그랬었지’ 하는 생각과 함께 어릴 적 고심해서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만들던 기억이 떠올랐다.


스팸 무덤 속에서 발견한 유적

몇 년 만에 접속한 이메일의 ‘받은메일함’을 뒤적거리고 있자니 왠지 삭은 먼지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읽지 않은 편지가 1만 5000여 개나 쌓여 있었다. 죄다 스팸메일일 것이 뻔해서 한 번에 삭제를 했다. 엄청난 양의 스팸메일을 삭제했더니 아주 오래전에 받았음에도 낡지도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는 메일들이 드러났다. 마치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귀한 유적을 발견한 것처럼 가슴이 콩닥거렸다. 복잡한 특수문자로 이루어져 있어 보낸 이를 가늠할 수 없는 여럿의 아이디 속에서 한글로 이루어진 정직한 아이디가 눈에 띄었다. 아빠 이름이었다.

내가 어렸을 적 아빠는 길면 1년, 짧게는 반년씩 리비아라는 나라에서 일했다. 우리는 만날 수 없는 그리움을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달랬다. 아빠가 있던 곳은 인터넷이 잘 터지지 않는 지역이었다. 로그인하는 데만 한참이 걸렸기 때문에 내가 보낸 메일을 읽고, 답장하는 모든 과정에 하루가 꼬박 걸렸다. 그래서 아빠는 아침 일찍 일어나 로그인을 한 뒤, 로딩 시간 동안 출근 준비 및 아침식사를 마쳤다. 오전 작업을 끝내고 쉬는 시간이 되어서야 내가 보낸 메일을 읽을 수 있었고, 퇴근하고 답장을 보낸 뒤 ‘전송완료’ 메시지를 기다리다 잠이 들었다. 아빠가 보낸 메일은 죄다 “딸 답장이 늦어서 미안해. 여기는 인터넷이 너무 느려”로 시작했다. 혹여 애써 접속한 인터넷이 허무하게 끊길까 애면글면하며 한 자 한 자 공들여 적었을 아빠를 떠올리니 별것도 아닌 내용에도 자주 코끝이 시큰했다.


“딸, 엄마 말 잘 듣고 있지? 우리 딸은 착하니까 엄마 속 썩이지 않을 거라고 아빠는 믿는다. 오늘은 야생 고슴도치가 아빠 방에 들어왔어. 딸이 봤으면 아마 엄청 좋아했을 거야. 이슬이는 동물을 좋아하잖아. 요즘은 무엇을 보아도 딸들이 생각난다. 맑은 하늘을 보면 딸들의 웃음소리가, 고운 사막의 모래를 보면 딸들이랑 그네 타던 놀이터가, 영어로 말을 거는 외국인을 만나면 한창 영어를 배우고 있을 딸들이 떠올라. 이슬이는 다른 건 몰라도 영어 공부는 꼭 열심히 하도록 해. 아빠는 영어를 못해서 이곳이 힘들구나. 그래도 리비아 사람들이 하는 말은 몇 개 배웠어. 사실 ‘얄라얄라’ 하나만 알아도 돼. ‘빨리빨리’라는 뜻이거든. 그리고 다음번에 메일을 보낼 땐 반찬 투정은 하지 말아주렴. 딸이 김치랑 콩나물국이 지겹다고 적은 메일을 보고 아빠는 김치랑 콩나물국을 먹는 꿈을 꿨어. 아주 먹고 싶단다. 딸, 인터넷이 오락가락하는구나. 길게 못 써서 미안하다.”


애틋한 마음 담긴 긴 편지의 힘

메일의 말미에 아빠는 당신이 없는 사이에 훌쩍 자랄 내 모습이 너무 아깝다고 적었다. 자라는 모습을 지켜봐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내가 부디 이해해주길 바란다고 다정하게 당부했다.

어린 시절, 오랫동안 아빠와 떨어져 지냈음에도 우리가 일말의 어색함 없이 친구처럼 살가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눈으로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그 대신 소소한 일상과 애틋한 마음을 긴 편지에 담아 공유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빠가 보낸 엔터 한 줄 없이 빼곡하게 긴 메일은 족히 수십 개가 넘었다. 나를 키운 아빠의 말과 시간들이었다.

글쓴이 강이슬은 〈SNL 코리아〉 〈인생술집〉 〈놀라운 토요일〉 등 TV 프로그램에서 근면하게 일하며 소소하게 버는 방송작가다.
제6회 카카오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안 느끼한 산문집》으로 대상을 받고 출판 계약을 하며 난생처음 갑이 됐다. 술과 개와 밤을 좋아하고 욕을 잘하지만 착하다.
어제도 오늘도 가난했고 내일도 가난하겠지만 가난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가지고 있다.
  • 202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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