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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부부가 예술가에게 보내는 편지 (12)

낡은 세계에 너무 일찍 도착한 선각자 나혜석! 上

시대와 불화한다는 것

당신 이름 뒤엔 적어도 세 개쯤의 느낌표를 붙이고 싶어요.
당신은 서양화가이자 작가를 넘어…
‘현모양처라는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며
여성 주체로 꿋꿋이 섰으나 사회적 따돌림으로
이 땅의 여성 중 가장 슬픈 운명으로 전락한 사람이었지요.
아, 당신은 이 낡은 세계에 너무 일찍 도착한 선각자였습니다.
우리 생은 얼마만큼의 불운과 절망을 품고 있는 것일까요? 그걸 투명하게 수량화할 수는 없겠지요. 다만 우리가 작은 불운은 큰 불운에게, 작은 절망은 큰 절망에게 삼켜진다는 사실을 알 뿐. 당신이 시대와의 불화 속에서 얼마나 큰 절망을 견뎌냈는지를 나는 짐작조차 못 합니다. 좋은 집안에서 명민한 머리를 타고난 당신이 나락으로 떨어진 것은 믿을 수 없는 사태지요. 근대의 들머리에 일본 유학을 다녀온 서양화가, 당대의 빼어난 패션 아이콘, 날 선 필봉을 휘두른 자유주의 사상가요 문필가로 알려진 당신은 이혼과 더불어 바닥이 없는 나락으로 추락합니다. 낡은 도덕에 고착된 사회는 물론이거니와 가족에게서 따돌림을 당한 채 당신은 행려병자로 떠돌다가 거리에서 생을 마친 비운의 주인공이 되고 말지요.

당신 이름 나혜석(羅蕙錫, 1896~1948) 뒤엔 적어도 세 개쯤의 느낌표를 붙이고 싶어요. 당신은 서양화가이자 작가를 넘어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가사 노동의 가치를 설파하며 여권 운동에 나선 사람, “여자도 사람이다. 그다음에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라는 여성 인권에 대한 또렷한 인식을 보여준 사람, 1927년 외교관 남편과 함께 시베리아를 거쳐 프랑스·영국·스페인·미국 등지를 여행하며 여성 선각자로서 깨어 있던 사람, 신문·잡지에 자유연애, 생활 개선에 관한 글들을 쓰며 최소한 100년은 앞선 페미니스트로 산 사람. ‘현모양처라는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며 여성 주체로 꿋꿋이 섰으나 사회적 따돌림으로 이 땅의 여성 중 가장 슬픈 운명으로 전락한 사람이었지요. 아, 당신은 이 낡은 세계에 너무 일찍 도착한 선각자였습니다.

1941년 어느 날, 화가 이승만의 집 문 앞에 걸인 여인이 나타났어요.
“저, 나혜석이에요.”
여인은 제 이름을 밝혔지만 화가는 믿을 수가 없었지요.
“그럴 리가 있나요. 정말 나혜석 맞아요?”

그토록 저명한 명사로 화사한 아름다움을 뽐내던 여인은 간데없고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얼굴에 누더기를 걸친 걸인 몰골이라니!

여인은 10여 년 전에 맡긴 외국 판화 여섯 점을 찾아 치마폭에 싸 들고 사라졌습니다. 친구 김일엽이 거처하던 예산의 수덕사에 얹혀 지내다가 노자 한 푼 없이 뛰쳐나와 거리를 떠도는데, 이때부터 정신착란 증세와 신체 마비 현상을 겪지요.

당신은 모성애에 이끌려 충남도청 산업국장인 전남편과 아이들이 사는 대전에 모습을 나타내지만, 경찰에 의해 내쳐졌지요. 반신불수로 이곳저곳 양로원을 떠돌던 당신은 1946년 12월 눈보라 치는 어느 날 거리에 쓰러져 시립 자제원(市立 慈濟院, 현재의 서울시립남부병원)에 옮겨집니다. 당시의 관보에 따르면 사망 연월일이 1948년 12월 10일이나 확인할 길은 없지요. 당신은 자식들에게 “네 애미의 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다오”라고 부탁했지만 꽃 한 송이 꽂을 무덤은 이 지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당신은 1896년 4월 28일,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에서 태어났어요. 증조부는 호조참판을 지내고, 아버지 나기정(羅基貞)은 시흥군수를 거쳐 용인군수를 지냈지요. 딸로는 첫째였던 당신은 성격이 활달하고 두뇌는 명석했습니다. 1910년 바로 아래 여동생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니는 동안 기숙사 생활을 했고요. 당신은 여학교 시절에 이미 문학과 미술에 재능을 보이고, 졸업할 때 성적은 평균 99점으로 수석이었어요. 일본 도쿄공대에 유학 중인 오빠의 권유로 도쿄여자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한 당신은 유학생 동인지인 《학지광》에 근대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글을 내놓고, 유학생들로 조선여자친목회를 조직해 《여자계》라는 잡지 발간에 앞장섰습니다. 
 
21세 때 첫사랑 남자를 폐결핵으로 잃은 당신은 와세다대학 학생이던 춘원 이광수와 급속히 가까워지지만 춘원이 기혼인 데다 도쿄 의학전문학교 학생이던 허영숙과 열애 중이라 다들 당신을 뜯어말렸지요. 첫 부인과 사별한 변호사이자 당대 명사인 김우영(金雨英)과 결혼한 것은 1920년, 당신 나이 24세 때였어요.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주시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해주시오”라는 당신이 내세운 결혼 조건을 김우영이 군말 없이 받아들이고, 그 전해에 김활란·신마실·황에스터·박인덕·김마리아 등과 이화학당 지하실에서 비밀집회를 갖다가 붙잡혀 옥살이를 할 때 김우영의 도움으로 면소처분을 받고 석방된 인연 때문이었지요.
 
이듬해 당신의 첫 개인전이 《경성일보》사의 후원으로 《경성일보》 전시장인 내청각(來靑閣)에서 열렸는데, “조선 유일무이한 여성화가”의 ‘양화전람회’는 크게 주목을 받았습니다. 《매일신보》는 기사에서 전람회가 “인산인해를 이루도록 대성황”이었고, 이튿날엔 관람자가 4000~5000명에 달했다고 전했지요. 가부장제 유교 이념이 조선 여성에게 강요한 ‘정신의 코르셋’을 벗어던진 당신은 베를린에 가 있는 남편과 떨어져 혼자 파리에 머무는 동안 당시 천도교 교령으로 널리 알려진 사회 명사인 최린(崔麟)이 파리에 왔을 때 안내를 맡았어요. 통역을 동반하고 식당과 극장을 가고, 유람선을 타고, 카페를 드나들다가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겠지요.

“나는 공(公)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 남편과 이혼은 아니 하렵니다” “과연 당신이 할 말이오. 나는 그 말에 만족하오”. 여성의 권리와 주체적 삶을 주장하는 당신은 “사람이 배고프면

밥 먹고 색이 일면 색을 쓰는 게 뭐가 이상한가”라며 가부장제가 강요하는 통념에 맞서지만, 당신은 주류 사회의 관습과 통념을 거스르고 너무 앞질러 간 데 따른 면죄부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당신의 염문이 돌고 돌아 김우영 일가의 귀에도 들어가고, 결국 1931년에 강제 이혼을 당하지요.

1934년 당신은 이혼 전말기 ‘이혼고백서’를 월간지 《삼천리》에 2회에 걸쳐 전문을 연재하고, 최린에게 이혼보상비 청구 소송을 제기하면서 장안은 온통 당신 얘기로 시끄러웠습니다. 당신은 선망받는 신여성에서 하루아침에 비난과 멸시를 받는 ‘화냥년’으로 전락하는데, 그 전락은 여성 정조에 대한 가부장제 사회의 낡은 이데올로기가 정치적 올바름과 예술적 재능을 두루 갖춘 한 여성을 어떻게 파멸시키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지요. 여성으로 태어난 불행을 내재화할 때조차 꿋꿋함을 잃지 않고, “아이들아, 애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애미는 과도기의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이었더니라”는 당신의 말은 그대로 유언이 되었습니다.

아아, 인생무상!
금생에서 겪은 영욕은 다 잊으시고 그 피안에서
늘 평안하시길 빕니다.
  • 202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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