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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섹스에서 탈(脫)에이지 시대로

‘꽃중년 트렌드’ 이끄는 권정현 헬로젠틀 대표

글·사진 : 서경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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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을 꽃중년 패셔니스타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대뜸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 20대 청년이 말했다. 예순의 카페 사장은 갑자기 나타난 이 청년이 황당했지만 한편 흥미로웠다. 20대 청년의 구애는 주저함이 없었다. 청년은 당찼고 예순의 이 남성은 호기로웠다. “재밌겠네, 좋아.” 무엇을 어떻게 할 계획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2013년, 중년 패션 아이콘 에이전시 헬로젠틀의 권정현(28) 대표와 그의 뮤즈 전만수(61)씨의 만남은 이렇게 이뤄졌다.
권정현(오른쪽) 헬로젠틀 대표와 그의 뮤즈 전만수씨.
“미국 패션디렉터 닉 우스터의 사진을 SNS로 우연히 봤어요. 50대 중반의 남성인데 워낙 맵시 있게 옷을 입고 다녀서 유명해진 사람이죠. 그가 지나가면 젊은 사람들이 와서 멋있다고 말을 걸고 같이 사진도 찍어요.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그림이죠. 그래서 한국판 닉 우스터를 만들자 생각했어요.”

헬로젠틀 쇼룸에서 만난 권정현 대표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였다. 초록색 체크무늬 재킷에 하늘색 셔츠, 타이를 맨 차림은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 옆에서 백발의 ‘꽃중년’ 전만수씨가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이야기를 가만가만 듣고 있었다.


‘꽃할배 패셔니스타 만들기 프로젝트’

헬로젠틀은 권정현 대표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서울시 아이디어 공모전에 제출한 ‘꽃할배 패셔니스타 만들기 프로젝트’가 당선되며 지원금 100만원으로 시작한 사업이다. 중년 남성을 위한 패션 코디를 제안하고 중년 패션 리더를 키우는 것이 주 아이템이다. 헬로젠틀은 프로젝트 이름이다. ‘젠틀’은 중년의 묵직함을 상징하고 ‘헬로’는 이를 중화시켜 준다. 세대 간 소통을 꿈꾼다는 의미를 담았다. 권 대표는 한양대 컴퓨터공학과 재학 시절의 에피소드로 이야기를 옮겼다.

“학생 때 과외로 수학을 가르친 적이 있어요.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었는데, 제가 들고 간 명품 가방을 보고 위화감을 느꼈나 봐요. 수업은 잘하지만 이기적일 것 같고 자기네를 돈벌이 상대로 생각할 것 같다는 거였죠. 옷차림이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옷으로 가치 있는 무언가를 창출하고 싶었죠.”

권 대표는 대학 시절부터 항상 눈에 띄는 ‘공대생’이었다. 운동화에 청바지를 입어도 재킷으로 포인트를 주는 등 패션 감각이 남달랐다. 누나만 넷이었던 그는 자연스럽게 패션에 관심을 두게 됐다고 한다. 패션 관련 사업으로 창업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뜻밖에 대기업에서 인턴 근무를 할 때 찾아왔다.

“기업 신사업 담당 부서에서 인턴으로 일했어요. 기회를 얻어 미국에 갔는데 한 달 동안 페이스북과 구글 등을 견학하며 충격을 받았어요. 아이디어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환경과 사장과 직원의 수평적인 관계를 목격했죠. 페이스북 대표 마크 저커버그는 직원들과 대화하며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녀요. 한국의 대기업과는 분명 달랐습니다.”

채용을 전제로 한 인턴이었다. 탄탄대로를 눈앞에 두고 그의 인생 방향이 바뀌었다.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내 기업을 만들어보리라’ 다짐하며 창업의 꿈에 다가갔다.

권정현 대표는 사업 시작을 위한 첫 단계로 모델을 찾아 나섰다. 지하철과 노인복지관 등을 돌아다니며 적합한 인물을 물색하던 중 응암동의 한 카페에서 전만수씨를 만났다.

“첫 시도는 스타일링이었어요. 전 사장님이 동년배 어르신보다는 옷을 잘 입었지만 닉 우스터가 되기엔 부족했죠. 과외해서 번 돈으로 옷을 사서 입혀드렸어요.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죠. 그러다 우연히 언론 취재 요청이 와서 가로수길을 갔는데, 여러 사람의 관심을 끌었어요. 창업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

전만수씨는 껄껄 웃으며 당시를 회상했다.

“어찌 보면 저도 길거리 캐스팅 된 겁니다. 워낙 주저함이 없었고, 젊은 친구가 뭘 해보겠다는데 기꺼이 나서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죠. 호기심은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가로수길을 나가니 사람들이 나를 유명인인 줄 알고 사진 찍고 사인 받고… 하하.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호응은 즉각적이었다. 페이스북으로 피드백이 왔다. 전만수씨가 사진을 올리면 ‘좋아요’가 3000~4000개씩 달렸다. 친구 신청이 하루 1000명씩 들어왔다. ‘한국판 꽃중년’의 시작이었다.

사업이 구체화된 것은 2014년이다. ‘꽃중년 패션의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자’는 뜻을 품었지만, 사업화했을 때 수익구조가 문제였다. 방황의 시작이었다.

첫 시도는 시니어 패션 잡지였다. 편집과 콘텐츠 제작, 영업까지 모든 부분을 혼자 하다 보니 현실적인 어려움에 봉착했다. 수익화가 쉽지 않겠다는 판단에 스타일리스트 앱도 만들어봤다. 시도는 좋았지만 패착이었다. 개발자도 뽑아야 했고, 그가 감당하기에는 큰 비즈니스였다. 그다음으로 시작한 것이 쇼핑몰이다.

“네이버 쇼핑몰 스토어팜으로 테스트를 해봤어요. ‘나의 스타일링을 누가 살까?’ 궁금했어요. ‘아저씨들은 절대 사지 않을 거야. 딸이나 부인이 사겠지. 젊은 남자들도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고 기대했어요. 결과는 예상대로였죠. 남성패션 시장에서는 나이 중심의 ‘에이지드 마켓’은 무의미해요. 촉이 적중했습니다.”


패션을 세대 간 소통의 도구로


데이터를 바탕으로 자체 쇼핑몰을 연 것은 지난해 하반기다. 이를 위해 정부와 기업의 투자도 받았다. 지금은 기존에 SNS로 축적한 팬층을 구매자로 연결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지난 2월에는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 쇼룸을 겸한 사무실을 마련하고 6명의 직원도 뽑았다.

“직원 모두가 학생이라 열정은 넘치지만, 전문가 집단보다 속도가 느려요. 다만 우리는 지금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남성 복식을 백과사전처럼 정리하고 있어요. 그 안에 들어간 모든 종류를 만들어볼 계획입니다. 아주 특이한 옷을 만드는 것은 아니에요. 기본적인 옷만 잘 섞어 입어도 10벌을 가지고 100벌의 효과를 낼 수 있죠. 그래야 사람들이 적은 돈으로 옷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꿈은 ‘중년 패션계의 YG’(엔터테인먼트 회사)입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글로벌한 브랜드를 키우고자 합니다.”

전만수씨는 권 대표의 말에 단 한 번도 충고나 지적을 해본 적이 없다. 묵묵히 듣고 따라가며 그들의 생각에 귀 기울일 뿐이다. 권 대표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그가 묵직한 말을 던졌다.

“우리 세대에 대한 분석이랄까요. 젊은 사람들에게 나이 든 사람들을 이해하라고 하는데 거꾸로 되어야 해요. 젊은 시절을 이미 경험한 나이 든 사람들이 젊은이들을 이해해야죠. 젊은 사람의 사고방식을 인식하면 소통이 해결됩니다. 패션은 노소 구분이 없으니까.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중간재 역할을 합니다. 지나가다가도 젊은이들이 저에게 멋있다고 말을 걸어요. 패션이 소통의 도구가 된 것이죠. 나이 든 사람이 먼저 바뀌어야 해요. 이제는 ‘유니섹스’가 아닌 ‘탈에이지(脫 age)’의 시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전씨의 말에 권 대표는 박수를 쳤다.

“제가 지금까지 돈을 못 벌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웃고 싶어서’예요. 이 사회에 임팩트를 주자. 그것 하나로 버텼습니다. 전만수 사장님이 가로수길에 갔을 때 한 말이 있어요. ‘동화 나라에 온 것 같다’고. 바뀐 것은 옷뿐이었지만 젊은 친구들과의 소통에서 자신감과 자존감이 회복된 것이죠. 세대 간 소통이 이렇게 이루어지는 겁니다. 작은 변화가 삶과 인생에 큰 변화를 몰고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옷을 파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바꾸고 삶을 바꿀 수 있는 패션 회사를 만들고 싶습니다.”

20대의 포부는 당찼다. 올봄 한국 패션계에 ‘꽃중년’의 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 2017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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