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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관객 700만 시대]
사람들이 야구장에 가는 진짜 이유

진짜 야구는 야구가 벌어지는 그라운드 바깥을 감싸고 있는 야구 팬들에게서 비롯된다. 가을이다. 야구가 완성되고 동시에 마무리되는 계절, 야구장이 우리를 부른다. 시인 겸 야구칼럼니스트인 서효인씨가 야구를 ‘삶의 에너지’로 삼고 있는 소시민들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야구장에서 야구를 본다는 것은 야구의 많은 부분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이빙 캐치나 결정적인 홈런을 한눈팔다 놓칠 수도 있다. 선수는 물론 감독까지 뛰쳐나와 항의하지만 그것이 무엇에 대한 항의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다. 느리게 다시 보고 싶은 플레이가 있어도 꾹 참아야 한다. 스트라이크인지 볼인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기에 심판의 귄위에 전적으로 기대어 경기를 봐야 한다. 3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시야를 가리는 여러 인파와 요소들 사이에서 집중력을 유지해야 하며, 경기가 뜻대로 풀려가지 않더라도 채널을 돌려버릴 수도 없다. 하지만 진짜 야구 팬이라면 보통은 이렇게 말한다. 야구장에서 보는 야구가 진짜 야구지. 그렇다면 진짜 야구란 무엇인가.



영원히 고통받는 LG팬 김 과장님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하위권을 전전하면서도 우리는 잠실을 등지지 않았네. 나는 잠실을 찾지 않을 이유가 충분했어. 대학생이던 나는 겨우 직장을 잡았지만 재작년까지 8년째 만년 대리였고, 아내는 아이 둘을 낳고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지 못했어. 전세금은 올랐고, 아이 학원비는 감당이 안 되었지. 전세를 찾아 잠실에서 먼 곳으로 이사를 가야 했어. 송파에서 상계동으로, 상계동에서 구리로, 구리에서 남양주로. 출근길에는 녹초가 되었고, 퇴근길에는 파김치가 되었지. 그래도 난 잠실에 갔네. 가서 노래를 불렀지. 엘지 없이는 못살아. 엘지 없이는 못살아. 김추자의 노래였던가. 작년에 엘지는 11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나는 비로소 과장이 되었네. 1루를 가득 채운 유광 점퍼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나? 그게 진짜 야구지.”



기분파라고는 하지만 늘 기분이 언짢은 롯데팬 김군

“내가 부산 사나이라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 거 알지? (맞나?) 내가 사귄 딸내미들 모두 내가 롯데팬으로 만들었다는 거 아냐. (맞나?) 사직야구장 한 번 데리고 가면 고마 끝나는 거 아니가? 경기 초반에는 마 자갈치 시장에서 공수해간 회를 딱 펼쳐놓고 시원소주를 딱 까서 한잔 두잔 나눠 먹음서 야구 규칙도 설명해주고, 선수 이름이랑 뒷이야기로 ‘썰’을 마구 푸는 기라. 경기가 무르익으면 해도 마 저물고 분위기가 까리해지거든. 안타 나오면 좋고, 홈런이 나오면 더 좋고. 둘이 손잡고 소리 지르고 방방 뛰다 보면 이게 정이 들 수밖에 없거든. 롯데 야구는 원래 이렇다! 뭐, 내 여자 친구? 뭐라 하노. 야구장 못 가고 방바닥 긁은 지 오래됐구만. 됐다. 치아라, 마. 어디 강민호 번트 대는 소리하고 앉았노?”



사계절 가을 타는 여자, 넥센팬 박 선배

“사람들이 우리 팀을 두고 거지네, 타이어네, 선수팔이네 하고 놀려댈 때에도 나는 목동구장 3루 상단 스탠드에 앉아 있었지. 거기엔 사람이 거의 없었어. 나는 조용히 오래 녀석들을 따라다녔어. 아버지를 따라 도원야구장에 갔을 때 우리 팀은 거의 매일 졌어. 어느 날 부자가 되더니 수원으로 떠나버리더군. 나는 그들을 따라 빛바랜 파란색 1호선을 두 시간 동안 타고 야구장에 도착했지. 그곳의 쓸쓸함이 좋았거든. 수원에서 목동으로 오는 길은 우여곡절이 많았어. 부자가 망하고, 가난뱅이가 다시 성공하는 데에는 여러 스토리가 필요하지. 그 길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글쎄 나는 그게 궁금해서 야구장에 가는 걸지도.”



썸 타는 남자만 벌써 5선발이라고 알려진 두산팬 최씨

“처음에는 잘생긴 선수들이 많다고 해서 잠실에 찾아갔어요. 진짜 그렇긴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제는 조금은 험악하고 투박한 선수가 눈에 들어와요. 특히 곰처럼 생긴 선수가 좋죠. 그런 선수들이 야구를 열심히 하더라고요. 열심히 하다 보면 얼굴도 어쩐지 잘생겨 보이게 변하기도 하고. 선수를 좋아하다가 선수의 포지션을 좋아하게 되고, 선수의 포지션을 좋아하다가 선수의 팀을 좋아하게 되고, 선수의 팀을 좋아하다가 선수가 하는 운동의 정체가 궁금해지더라고요. 야구장 홈팀 더그아웃 위에 앉아 두산 선수들 유니폼을 내걸고 있으면 나도 야구를 하는 것 같아요. 내 팀과 하나가 되는 그런 느낌이랄까. 우리는 같은 팀이라는 느낌. 그거죠!”



몸속에 파란 피가 흐른다는 뻥쟁이, 삼성팬 만석이

“형님, 대구 가보셨어요? 엄청 덥다니까요. 가만 서 있으면 땀이 삐질삐질 흘러서 사람이 완전히 가버린다니까? 거기 야구장에 5월 낮 경기에 앉아 있다고 해봅시다. 으아, 그거 죽음이지. 내 몸속에 피가 시원하니 파란색이 아니었으면 벌써 열사병으로 여러 번 죽었을 걸? 아이고, 대구라는 데가 그렇다니까. 파란 피가 흐르는 사람들이 꼭 있어요. 양준혁이나 이승엽에서부터 배영수나 박한이까지 모두 마찬가지지. 상상이 가요? 잔디는 모조리 인조 잔디에, 언제 깔려서 언제 교체됐는지는 도대체 아는 사람이 없어. 경기장은 해방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착공된 거고. 내일 갑자기 무너져도 누구도 놀라지 않을 법한 모양새라니까. 그런데 거기에서 야구를 하고, 사람들이 가서 봐. 왜? 파란 피가 흐르기 때문이죠, 형님.”



사내 아이 둘의 아빠이자 탈모가 걱정인 SK팬 이씨

“사내 놈 둘을 키운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지. 마누라는 날마나 푸석푸석해지고, 나는 똥배가 튀어나오고, 무엇보다 머리가 벗겨지는데, 이놈들은 점점 탄탄해져가. 언젠가 가슴팍이 완전히 단단해졌을 때, 나는 완전히 퇴물이 되어 있겠지. 그래서 야구장에 자주 오오. 야구만큼 인생에 대해서 아들들에게 일러주기 좋은 장소가 없거든. 이제 이놈들도 제법 캐치볼을 할 줄 안다오. 처음에는 이상한 곳에 던져서 서로를 힘들게 하더니만, 이제는 되도록 정확하게 던지려고 노력합디다. 야구는 일단 제대로 던지는 데서 출발하는 것 같아. 문학야구장에 모인 선수들을 봅시다. 대단한 기예를 하는 건 아니거든. 반복된 숙련으로 프로선수가 된 거야.”



3학년 9반 9번 NC팬 박 어린이

“제가 어릴 때 있었던 일입니다. 외삼촌이 텔레비전에 나왔습니다. 야구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외삼촌은 롯데 경기를 보고 있었는데, 술에 취해서 정신이 없어 보였습니다. 웃통을 홀라당 벗고 관중석 쓰레기통을 뒤집어쓰고 외야석을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무릎이 조금 튀어나온 파란 추리닝이 우리 막내 외삼촌이 분명했습니다. 쓰레기통을 벗어 던지니까 역시나 외삼촌 얼굴이 보였습니다. 화가 난 폭탄처럼 새빨간색이었습니다. 요즘은 외삼촌 손을 잡고 같이 야구장에 갑니다. 그새 야구장을 쓰는 팀도 달라졌습니다. 야구장에는 뽀로로에 나오는 크롱도 있어요. NC는 우리 외삼촌처럼 막내라고 합니다. 저는 그 팀을 좋아하기로 했어요.”



취업준비생 역할에 충실한 한화팬 김씨

“처음에는 스트레스가 많았어요. 져도 그냥 지지 않더라고요. 다 이긴 경기를 막판에 날려버린다든가, 평범한 타구를 놓쳐서 결정적인 실점을 한다든가, 그냥 초반부터 선발투수가 털린다든가. 그런데 가만 보니까, 지는 경기가 다 그런 거더라고요. 아깝게 지면 아깝게 져서 안타깝고, 어이없게 지면 또 어이없어서 슬프고, 그냥 지면 그냥 짜증 나고… 언젠가부터 그저 야구를 즐기게 되었어요. 그러다 이기면 그건 그거대로 좋은 거죠. 어쨌든 저는 야구를 믿고 있거든요. 상대방과 마찬가지로 우리 팀 선수들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언제고 좋은 결과가 와야 한다는 것도 믿죠. 한화의 최선이 아직 다른 팀의 최선에 못 미치는 게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하긴 하지만, 그 또한 시간이 필요한 일이죠.”



광주의 기아팬인 내가 말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함께 좋아하는 건 야구뿐이었다. 3대가 같이 무등야구장에 갔던 날을 기억한다. 1루 응원석 하단에는 경기 시작 전부터 소주 냄새가 진동했고, 할아버지는 나에게 해태 아이스크림을 사주셨다. 투수는 아마도 선동렬, 김성한은 오리궁둥이를 내밀었고, 한대화는 해결사 노릇을 했다. 이기는 게 자연스러운 팀의 팬들이 모여서 함성을 만들었다. 그들은 경기장 바깥에서는 거의 지는 날이 많았는데, 그래서 이기는 경기장에서조차 약간은 슬픈 표정을 짓거나 슬픈 노래를 불렀는지 모르겠다. 여러모로 ‘목포의 눈물’은 야구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노래라고 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 뒤로 나는 야구장에 가게 되었다. 낡은 야구장에서 이종범을 보았고 이대진을 보았다. 야구는 계속된다. 그건 야구장에 가야만 알 수 있는 일이다.”
  • 201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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