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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파 신현철

우리의 찻그릇을 창조해온 33년 외길 인생

“우리 다구(茶具)가 다양했다면 내가 할 필요가 없었겠죠.”

6척 키에 풍채가 당당한 도예가 연파(蓮波) 신현철(59) 명장은 작업복 차림에 상투를 틀었다. 신 명장은 작업을 하다 나온 듯 희끗희끗한 긴 수염 끝에 흙을 묻힌 채 계단을 내려왔다. 작업장 흙벽을 따라 뻗어 올라온 담쟁이덩굴이 어지러웠다.

4월 26일~5월 6일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에서 <연파 신현철 도자예술 2014>가 열린다. 신 명장이 예술의전당에서 갖는 네 번째 전시회다. 그의 33년 도자기 인생을 돌아보는 자리이자, 미공개작을 선보이는 자리다.

그는 1986년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도예가로서 첫 개인전을 연 이후 수십 차례 개인전 및 초대전을 가졌다. 미국・중국・일본・독일・핀란드 등 해외에서도 전시회를 열며 한국 고유의 미와 한국 다도를 널리 알렸다. 신 명장은 20여 종이 넘는 다구 디자인 연구 개발에 앞장서온 선구자다. 도예와는 무관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유분방한 삶을 살던 그가 다구를 접한 것은 운명과도 같았다.

“대학교 2학년 때 찾은 한 고미술 전시회에서 친구들끼리 ‘조선백자 참 잘 만들었네’라고 하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그게 어디 조선백자야 고려백자지’라며 호통을 쳤어요.”


그전까지만 해도 청자는 고려시대, 백자는 조선시대 도자기로만 알았다. 고려백자라는 말은 그때 처음 들었다.

“그분이 제게 그 백자에 입을 맞춰보라고 하시더군요. 그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마치 어린아이 볼에 뽀뽀하는 느낌이었죠. 그 후 한국 도자에 관심을 갖고 경기도 이천 수광리 도자마을을 찾았어요. 그곳에서 나오는 도자기는 모두 고려나 조선의 도자를 재현하고 있었어요. 그때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는 있는데 왜 한국의 그릇은 없지,라는 의문이 들었죠.”

신 명장은 당신이 이룩한 세계를 “한국식 다구”라고 칭했다. 척박했던 도자 환경을, 고독했을 길을 그는 일관된 장인정신으로 한 걸음씩 밟아왔다.

“우리 차의 역사는 깊지만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아 근거를 찾기 어려웠죠. 한국 다기가 어떤 모양인지 박물관을 다 뒤져도 찾기 어려웠어요.”

그러다가 신 명장은 호림미술관에서 고려 말기 행파형옆손잡이를 발견했다. 우리에게도 이런 조형미가 있었구나 싶었다. 그 후 스님들의 바랑에서 토우 김종희 선생이 만든 백자다관이 나오는 것을 보고 매력을 느꼈다.

“그때 스님들 바랑에서 나오는 다구가 신현철표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왕이면 스님들 바랑에 들어가기 쉽고 휴대하기 좋은 디자인은 뭘까 생각했어요.”


그는 3년간 연구한 끝에 1987년 연잎다기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서울 봉은사의 연못에서 연잎이 피어나는 모습을 보고 착안했다. 일본 다구와 흡사한 모양의 행파형다기에서 벗어난 디자인이었다. 그 해 연잎다기는 월간 <다담>의 표지에 실렸다.

신 명장은 이후 연잎 모양을 본떠 찻상을 고안했다. 연잎 모양 그릇에 구멍을 내어 뚜껑을 얹으니 찻상이 되었다.

“차 마시는 자리는 소통의 자리라고 생각해요. 1980년대에는 사람들이 차를 마시는 것에 대해 무척 어렵게 생각했어요. 가정에서도 누구나 손쉽게 가족들과 차를 마실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생각했어요.”

그는 다구문화를 통해 가족간의 소통, 주변과의 소통, 나아가 전체의 소통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그가 말하는 소통이란 퇴근하면 말이 거의 없던 남편과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는, 한 박자 쉬어가는 여유다.

신 명장은 차를 내기 전 다구를 청수에 씻어 찻상 위로 흘려보냈다. 찻물이 연밥 모양 찻상에 난 구멍으로 흘러 들어갔다. 연잎 찻상은 이렇게 물을 품는다. 수류금(水流琴) 소리가 들리는 찰나, 차를 즐기던 이들은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순간 시간은 멈추고, 찻상에 둘러앉은 이들은 멈춘 시간을 공유하며 자신을 되돌아본다.


신 명장은 연꽃 향을 차에 담은 연지(蓮池)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중국 청나라 건륭제 시절 심복(沈復)이 쓴 《부생육기》에 심복의 아내 진운(陳芸)이 남편을 위해 연차를 달이는 모습이 나온다. 진운은 해가 질 때 움츠러드는 연꽃 안에 찻잎이 든 비단 주머니를 넣어두었다. 연꽃은 주머니를 품었다가 아침에 그 입을 열었다. 밤새 연향이 밴 찻잎주머니를 연꽃에서 꺼내 맑은 샘물에 달였다. 아내의 사랑과 정성이 담긴 연차였다.

신 명장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꽃이 피는 것도 보고 차도 마실 수 있는 연지화개다법(蓮池花開茶法)을 최초로 개발했다. 연꽃이 움츠러들 때 찻잎을 넣고 그대로 꽃을 따서 냉동 보관했다. 손님이 오면 언제든 급랭한 연꽃을 내어 물속에 넣는다. 찻잎을 품은 연꽃이 활짝 피며 꽁꽁 숨겨두었던 향을 발한다. 장충체육관에서 차인연합회 허재남 수석부회장이 불교 의식인 헌다식을 거행하며 연지화개다법을 시연한 이래, 연지다법은 이제 국내외 차 행사, 불교 행사에서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불자인 신 명장은 연꽃에 빠졌다. 그는 연꽃 물결, ‘연파(蓮波)’라는 호를 쓴다. 우리 주변의 자연을 본떠 디자인하는 작업, 우리 고유의 것을 만드는 작업은 연잎, 연꽃 다구, 연지다법에 그치지 않는다. 천목 풍로(風爐)가 대표적이다. 흙으로 빚어 구워낸 천목 도자 솥에 담긴 물이 끓는다. 뚜껑을 열어젖히려는 찰나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이 조화로이 합일하는 순간이다. 차인들은 예부터 이 골바람을 송풍회우(松風檜雨)라고 부른다.

“물질이 물을 담아놓고 끓이면 자연의 소리가 들려요. 물이 있고 흙이 있는 여기 이 중심에 골바람 소리가 납니다. 나가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자연의 소리를 듣는 거죠. 온기를 채우며 말이에요.”

찻주전자 입이 참새 부리와 같고 손잡이가 참새 꼬리처럼 날렵하게 뻗어 있는 참새 다기, 봉황을 형상화해 입이 짧아지고 손잡이가 작아지며 가벼워진 찻주전자, 무궁화꽃 모양에서 착안한 무궁화 다기, 직접 제작한 천연 천목 유약이 불가마 속에서 변형돼 마치 흙으로 보석을 빚어낸 듯한 천목 다기 등을 선보이며 ‘신현철표’ 다기는 하나의 브랜드를 넘어서 이제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내면 철학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누구도 시작하지 않은 디자인을 제가 창조했습니다. 일단 시작하고 보니 더욱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겼습니다.”


신 명장은 한번 연구에 들어가면 잠도 거의 자지 못하고 예민해진다고 했다. 고뇌와 고통을 거쳐 나온 작품은 일단 공개되면 모방 제작되어 널리 퍼지는 일이 많았다. 현재 신 명장은 그의 다구를 눈여겨보던 손님의 제안으로 20여 개 다구 디자인에 특허·의장등록을 냈다.

33년 외길 인생이었다. 그는 이제 초연하다. 다양한 다구들이 나와 많이 활성화된 것만으로도 보람 있다면서도 그는 안타까웠다.

“누구 말도 듣지 않고 오로지 다구 연구에만 매달렸었는데, 나이 드니 마음도 너그러워지고 세상도 달리 보이더군요. 가장 마음 아픈 건 자식 셋 키우면서 한 번도 안아주지 못하고, 품어주지 못했는데, 어느새 다 커버린 거예요. 제각기 자기 길 찾아가는 모습을 보면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 씁쓸합니다.”

신 명장의 외길 인생을 지켜봐온 시인 황정원의 말처럼, 그의 그릇에는 더 이상 그가 보이지 않는다. 그릇에 담으려던 마음까지 놓아버렸으니 어찌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겠는가. 자신이 빚어낸 별을 보고 있노라면, 조화로이 이끌어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그 자체로 우리는 우리 식의 여유로움을 공유할 수 있는데 말이다. 예술의전당 전시에서도 이전 도예전에서 해오던 것처럼 찻자리가 열린다. 찻자리에서 신 명장의 다구, 다도를 즐기며 스스로를 되짚어보는 건 어떨까.

신 명장은 벽에 걸린 연잎 사진을 보며 말했다. “최후에 저런 모습이었으면 좋겠어요. 군더더기 없는.”
  • 2014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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