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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의 세계 / 무대디자이너

공연하는 작품의 흐름, 주인공의 심리까지 보여주는 무대를 디자인한다

글 : 박소영 TOPCLASS 기자  / 사진 : 김선아 

국어사전에서 ‘무대’를 검색하면 ‘노래, 춤, 연극 따위를 하기 위해 객석 정면에 만들어놓은 단’이라는 사전적 정의가 나온다. 하지만 오늘날 무대는 이 정의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배우의 심리를 나타내는 것은 물론, 때로는 작품 전체를 대변하는 상징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잘 만든 무대는 배우의 연기를 돋보이게 하고, 관객의 몰입을 돕는다. 무대디자이너는 이런 무대를 제작하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공연 연출에 있어 시각적인 부분을 총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무대디자이너가 한 작품의 무대디자인을 완성하기까지는 꽤 오랜 기간이 걸린다. 대개는 6개월, 짧아도 3개월 내외다. 이 과정은 공연 프로듀서가 디자이너에게 작품을 의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디자이너가 자신의 작품 성향과 스케줄 등을 고려해 작품에 합류하기로 결정하면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된다. 무대디자이너는 작품의 대본을 철저하게 분석한다. 대본에는 다양한 ‘리서치 요소들’이 있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의복, 건축 양식 등이 모두 리서치 대상이다. 중요한 것은 ‘작품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느냐’다. 작품의 메시지를 고려해 무대디자인이 나아가야 할 궁극적인 방향을 정하고나면, 사전조사 역시 그에 맞춰 진행된다. 이후 도면을 만들고 모형을 제작하는 등 시각화 작업이 시작된다. 중간중간 프로듀서를 만나 협의를 거치는 것도 필수다. 무대는 디자이너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드는 것이기 때문. 프로듀서와 디자이너의 궁합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둘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작업은 종종 난항을 겪기도 한다. 무대 제작이 완료된 이후에도 대화와 협의는 계속된다. 공연을 올리기 전까지 각종 디테일을 수정·변경하는 과정을 거친다.


작업 규모가 워낙 방대하다보니 무대디자이너가 혼자 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디자이너가 1명 이상의 어시스트를 두고 있다. 데드라인이 얼마 남지 않았거나 작업량이 많을 경우 3명 내외의 어시스트를 두기도 한다. 프로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어시스트 과정을 거친다. 현재 국내 연극·뮤지컬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대디자이너는 대부분 무대미술을 전공했거나 연극을 공부한 사람들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예술대학교·동아방송예술대학교 등에 관련 학과가 있다. 그러나 정원은 많지 않다. 서울예대의 경우 1년에 12명 정도 선발한다. 시장이 그만큼 좁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 연극·뮤지컬계에서 이름난 전업 무대디자이너는 모두 합쳐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전업 디자이너가 많지 않다는 것은 이 일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학로 등지에서 소규모 무대를 제작하는 사람들은 대개 수입에 상관없이 일을 즐기거나 다른 일을 병행하는 경우라고 보면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소규모 연극의 무대디자인 수입은 한 편당 100만원을 간신히 넘는 수준이다. 1년에 10편을 한다고 해도 연봉이 1000만원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자료 조사에 들어가는 비용, 모형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비용 등 각종 비용을 제외하면 실제 수입은 그보다도 적다. 뮤지컬계의 경우 연극 쪽보다는 사정이 좀 낫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다. 대형 뮤지컬 무대를 전담하는 디자이너들이 수억대 연봉을 받을 거라는 일반의 추측과는 달리, 연봉 1억이 넘는 디자이너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무대디자이너들은 우리나라 작품이 세계화되면 이런 현실이 조금이나마 개선될 거라고 이야기한다. 창작 연극·창작 뮤지컬이 해외로 진출하면 국내 디자이너들이 로열티를 받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세계시장에서 활약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진다. 더 많은 창작극이 생겨나고, 또 사랑받아야 하는 이유다.



무대디자이너 정승호


이번 달 〈topclass〉는 최근 뮤지컬계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정승호 무대디자이너를 만났다. 정씨는 한양대에서 연극영화학을 전공하고, 미국 뉴저지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무대미술 석사 과정을 이수했다. 현재는 서울예술대학 연극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08년, 2011년, 2013년 세 차례 더 뮤지컬 어워즈에서 무대상을 수상했으며, 2008년에는 한국뮤지컬대상에서 무대미술상을 받았다. 작품으로는 뮤지컬 <스위니 토드> <내 마음의 풍금> <남한산성> <황태자 루돌프> <레베카> <베르테르>, 연극 <햄릿> <됴화만발> 등이 있다.

꿈.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미술대회에 나가서 상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집안 사정 때문에 미술학원을 다닐 형편은 못 되었다. 미대 진학이라는 꿈도 자연히 접었던 것 같다. 스무 살, CF 감독이 되기 위해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전역 후 연극하는 동기들을 도와 몇 차례 무대에 서면서 자연스레 연기에도 관심이 생겼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연기에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관심을 끈 건 무대제작소 아르바이트였다. 함께 일하는 분들로부터 잘한다는 칭찬을 많이 받았다. 무엇보다 일이 즐거웠다. ‘무대디자인을 하면 연극판 가까이에 있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도 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로 의상디자인을 전공한 아내와 함께 유학길에 올랐다.

본.질.
배우가 단 한 줄의 대사를 읊더라도 그 인물이 되어야 하듯, 무대디자인도 그렇다. 인물이 느끼는 감정의 깊이, 꼭 그만큼을 무대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모차르트>를 예로 들어보자. 모차르트가 성당에서 레퀴엠 작곡을 의뢰받는 장면이다. 여기서 대부분의 디자이너는 성당을 어떤 양식으로 제작할지를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내 접근법은 조금 다르다. 장소 자체가 아닌, 그 장면이 지닌 의미를 중시하는 것이다. 누군가 레퀴엠을 의뢰한다는 것은 죽음에 대한 선언이다. 다시 말해 가장 힘들고 처절한, 옴짝달싹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장면의 의미를 곱씹고나면 배경이 성당이라는 사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중요한 것은 본질이다.

박.스.디.자.인.
대학원 시절 ‘코넬 박스 프로젝트’라는 수업 과제가 있었다. 현대미술가 조셉 코넬이 박스 안에 여러 가지 오브제들을 넣어 이미지화한 것에 대해 배웠는데 상당히 흥미로웠다. 나는 조셉 코넬과 조각가 루이스 네벨슨의 디자인 두 가지를 섞어 무대에 활용한다. 크고 작은 박스를 배치해 무대를 디자인하는 것이다. 박스 디자인의 가장 큰 장점은 그것이 ‘프레임’을 제공한다는 데 있다. 사람의 인생도 프레임 안에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커다란 틀 안에 작은 요소들이 쌓여 삶이 완성되는 것이다. 누군가 내 인생을 정리한다면 그 역시 박스 안에 들어갈 것이다. 따지고보면 극장 역시 하나의 거대한 박스가 아닌가.

협.업.
무대미술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가지고 있는 재능보다 더 많은 것이 발휘된다. 훌륭한 디렉터를 만나는 것은 특히 중요하다. 무대미술은 디렉터의 상상력이 더해진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오랜 시간 함께해온 짝꿍이 있다. 조광화 연출가다. 2008년 한국뮤지컬대상 6개 부문에서 수상한 <내 마음의 풍금>, 2009년 더 뮤지컬 어워즈 무대상을 수상한 <남한산성>, 참신한 무대로 주목을 받은 <베르테르> 등은 모두 조광화 연출가와 함께한 것들이다. 그는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벗이자, 내 작업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연출가다. 현재도 그와 함께 연극 <프랑켄슈타인>을 작업 중이다.


인.간.에.대.한.이.해.
무대미술을 하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사람을 알아간다고나 할까. 예전엔 이런 고민 없이 ‘무대만 잘 만들면 되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작품을 보다보면 그 캐릭터에 빠져들고, 캐릭터를 분석하면서 당대의 역사를 함께 공부하게 된다. 시대를 알고 모차르트를 보면 모차르트의 고달픈 인생이 보이는 것과 같은 원리다. 예술은 결국 인간에 대한 표현이다. 내가 진짜 예술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는 것일까.

꿈.너.머.꿈.
요즘 틈날 때마다 그림을 그리고 있다. 작업실 여기저기에는 완성되지 않은 그림들이 걸려 있다. 얼마 전 제자에게 대형 이젤을 선물받기도 했다. 가끔은 ‘무대디자이너 정승호’보다 ‘페인터 정승호’로 기억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과 팀을 이뤄 작업하는 것도 즐겁지만, 때로는 나만의 것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그림은 오롯이 내 작업물이고, 내가 원하는 대로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작업 영역을 무대에만 한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양한 도구를 발판 삼아 영역을 확장하고 싶다.

창.작.뮤.지.컬.
나는 라이선스 뮤지컬도 ‘창작’이라고 생각하고 작업에 임한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디자인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면 애초에 맡지 않는다. 최대한 오리지널 프로덕션의 영향에서 벗어나 내 방식대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창작 뮤지컬이 더 많이 제작되고, 더 많이 사랑받아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무대디자이너들이 이 일만으로 먹고살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되었으면 한다. 후배들을 위해 그 역할을 해내고 싶다. 우리 뮤지컬이 수출되어 무대가 만들어지는 현장을 누비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 2014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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