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미술가| 그림 속의 ‘나’는 누구인가? 미술가 권여현

글 이진숙 미술평론가 | 사진 이창주

글의 주인공 권여현님은 1961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서울대 회화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8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22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으며, 1990년 제13회 중앙미술대전 우수상, 1991년 제10회 석남미술상, 1995년 제1회 한국일보 청년작가전 우수상을 수상했다. 현재 국민대 예술대학 미술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미술가 권여현이 1988년의 첫 개인전부터 지금까지 집요하게 물어 온 질문이다. 20여 년이 넘는 창작 기간 동안 그는 어떤 답을 찾았을까?

경기도 김포 그의 작업실을 찾으니 하얀 진돗개가 반가이 손님맞이를 한다. 혹시 2002년 그가 한 퍼포먼스 ‘부유자아’(浮遊自我)에 함께 나왔던 그 진돗개 각(覺)이냐고 물었더니 각은 몇 년 전 집을 나갔고, 그 개는 암컷인 부유(浮遊)라고 한다. 이름대로 깨달음을 얻었는지 각은 집을 나가고, 부유만 주인 주위를 떠다니니 아이로니컬하다.

벽의 두 면에 창을 내어 김포의 넓은 평원을 한껏 끌어들인 그의 작업실. 국민대 미술학부 교수인 그는 학기 중에는 이곳에 자주 오지 못한다고 했다. 4년 동안 공들여 가꾸어 온 작업실 이야기를 하는 표정과 말은 조곤조곤하면서도 풍부했다.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무표정은 어쩌면 철저히 의도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거대한 일기장 같은 그의 작품에는 늘 그의 얼굴이 등장한다. 그의 얼굴은 어쩌면 이제는 인식 가능한 하나의 아이콘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청년 시절 그는 ‘얌전하고 폐쇄적인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서울대 미대에 다니던 1980년대 초반, 화단은 삶과 예술의 분리를 주장했던 기존의 모더니즘 계열의 미술에 반발해서 정치적, 사회적 내용을 미술 속에 담으려는 ‘민중미술’이 본격 논의되던 시절이었다. 그는 그러나 둘 중 어느 쪽으로도 가지 않고 ‘나’를 찾는 혼자만의 긴 여정을 떠난다. 지칠 줄 모르는 창작으로 마흔도 되기 전 20여 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수차례 주요 미술상을 수상했다.

그가 주목받는 작가가 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의 일관된 문제의식인 ‘나’에 대한 탐구는 매 전시마다 주제 해석의 깊이가 더해지고 유화 작품에서 사진, 퍼포먼스, 설치 작업에 이르기까지 그 표현 양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일견 혼란스러운 긴 작업 과정을 작가는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작가 권여현은 모더니즘, 민중미술의 길 대신 ‘나를 찾아 떠나는’ 긴 여정을 선택했다.
“초창기의 작업은 프로이트적인 단계라고 말할 수 있지요. ‘나’에 집중했던 때니까요. 나의 무의식에 각인된 무작위적인 지식을 걸러내서 나를 찾아 나가는 과정이었으니까요. 그 다음은 라캉적 단계라고 할 수 있어요. 나를 둘러싼 가족, 사회적 환경이라는 거울 속에 ‘나’를 투영해 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데카르트적인 단계라고 할 수 있죠. 내가 생각하는 내가 아니라 타인의 의식 속에 비추어진 나를 인지하고 용인하니까요.”

작업장 벽면에 빼곡히 걸려 있는 오래된 흑백사진들은 그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자신의 모습을 관찰했음을 보여 준다. 그가 거쳐 온 길은 자아의 밀실에서 대화의 광장으로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고 ‘나’를 넘어서 타인인 ‘너’를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의 모습도 변했다. 초창기의 작품에서 내성적이면서도 마음속에 격정이 넘치는 미소년 같은 얼굴의 작가는 꾸준한 변신을 시도했다.

라캉적 단계의 작품에서 그는 거지, 군인, 사춘기 소년, 시위 대학생으로 때로는 붉은 립스틱을 바른 여인 등으로 분장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에게 분장이란 다른 사람의 거울로 나를 비추어 보는 행위였다. 그의 얼굴에는 무한한 변신의 가능성들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의 그 무표정은 그의 내면 속에 담겨진 여러 모습 중 어느 것에도 손들어 주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권여현의 작품 〈최후의 만찬〉. 동서양의 잘 알려진 명작 회화를 본떠서 자신과 제자들의 사진을 찍고, 그 위에 다시 그림을 그려서 완성하는 방식이다.
데카르트적 단계의 대표적인 작품들은 동서양의 잘 알려진 명작 회화를 본떠서 자신과 제자들의 사진을 찍고 그 위에 다시 그림을 그려서 완성하는 최근의 작품들이다. 그는 김홍도 그림 속 씨름꾼으로,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속 예수로 등장한다. 국민대 제자들과 함께 한 ‘사제(師弟) 동행 세미나’ 과정에서 탄생한 작품들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들을 놓고 토론하며 그림 속 인물의 역할을 나누어 맡는다. 이 과정에서 자기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생각하는 나 사이의 간극이 드러나고, 타인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을 자기의 일부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체험을 하게 된다. 맡은 역할을 연기하는 사진을 찍은 후에 그 위에 각자 옷을 입히고 동작을 그린다. 각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역할을 화면 속에서 완성하는 것이다.

작품 활동 외에 그가 즐기는 일은 수업이다. 그의 교수법은 매우 독특하다. 학생들이 그리는 형식만 배워 대학에 들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색무취의 학생들에게 고유한 자기만의 색을 찾아 주는 것이 그의 과제다.

그는 학생들에게 최근의 미술 담론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는 주제들을 던져 주고 자신들에게 가장 부합하는 것을 택하게 한다. 학생들은 각자 자신들의 주제를 표현하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면서 개성 있는 한 명의 작가로 성장하게 된다.

그의 독특한 교수법은 가르치는 사람의 열정과 섬세함을 필요로 한다. 그는 학생 하나하나의 그림을 연도별로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인터뷰가 있던 날 그는 점퍼에 모자를 쓴 모습이었다. 전날 학생들과 MT를 다녀와서 집에 들르지 못해 차림새가 불량하다고 거듭 사과한다. 그 모습 그대로도 좋은데 말이다. MT 철도 아닌데 하고 의아해하자 새벽 여섯 시까지 학생들이 돌아가며 자신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고백’ MT였단다.

작품〈부유자아〉.
어쩌면 교수생활을 하는 동안 수십 번도 넘게 들었을지도 모를 어린 학생들의 고민을 그는 매번 신실한 마음으로 경청한다. 학생들의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를 들여다봐야 그 학생이 작가로서 커 갈 수 있는 최초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이런 개개인의 특성 파악에 기초한 교수법 때문에 그의 별명은 ‘사이코 어낼러시스 닥터’다. 이 독특한 교수법을 통해 신영미, 변시재, 이지혜 등 신예작가들을 키워 냈다. 제자들은 그의 또 다른 ‘나’이며 그가 공을 들인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작업실 한구석에 알록달록한 장난감 자동차가 보인다. 23개월 된 큰아들 단(丹)의 것이다. 마흔한 살 늦은 결혼을 통해서 아들 둘을 얻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듯한 밑도 끝도 없는 허무함으로부터 자신을 구제해준 것은 사랑스러운 아내와 두 아들이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들은 이제 세상에 갓 던져진 또 다른 ‘나’일지도 모른다. MT를 가느라 처가에 맡겨 놓은 아들 단을 데리러 그는 부지런히 작업장을 떠났다. ■
글쓴이 이진숙님은 서울대 독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인문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박여숙 화랑 큐레이터로, 미술평론가로 일했으며 현재는 웹진 에세이 편집장 겸 이사, 아르떼 TV에서 <큐레이터 이진숙의 서양미술 산책> 진행을 맡는 등 미술 관련 집필과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 《아름다움에 기대다》를 썼다.
  • 2005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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