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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어보〉 이준익 감독

세상에서 가장 선명한 흑백의 시선

글 : 선수현 기자  / 사진제공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이준익 감독의 렌즈는 망원경보다 현미경에 가깝다. 개인의 삶에 가까이 들이댄 렌즈는 시대를 대표하는 영웅이나 사건에서보다 오히려 큰 웅장함을 읽어낸다. 섬세한 연출에 약간의 장치만 더했을 뿐인데 그가 전하는 서사는 관객의 마음 깊숙이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소박한 삶을 채우는 인간의 감정이 깊은 울림을 전해서다. 인물을 꿰뚫는 감독 특유의 통찰력이 진하게 묻어난다.

조선시대 광대 장생과 공길의 이야기 〈왕의 남자〉는 사극 최초로 천만 영화의 길을 열었다. 이어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가족사를 다룬 〈사도〉, 평생을 함께한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시인 윤동주와 송몽규 열사의 청년 시절을 담아낸 〈동주〉, 일제강점기에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신념을 고집했던 독립투사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강렬한 삶을 그린 〈박열〉 등도 인물의 내면을 탐구하는 데 집중했다.

최근 개봉한 〈자산어보〉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1800년대 조선 후기 신유박해로 귀양길에 오른 ‘정약전’과 신분도 가치관도 다른 ‘창대’가 벗이 되어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가고 의탁하는 과정은 색채를 싹 걷어낸 흑백 영상을 통해 깊이가 배가된다. 인물의 관계 속에 오가는 감정이 수묵처럼 배어 나온다. 이준익 감독이 개개인의 삶에서 포착한 기운이 세상 어떠한 색보다 선명하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실학자 정약용은 《목민심서》 《경세유표》로 익숙한 데 비해 물고기 도감 《자산어보》를 집필한 정약전은 다소 생소한 관객도 있습니다. 영화의 주요 인물로 정약전을 선택한 이유는 뭔가요.

“정약용은 장 자크 루소, 헤르만 헤세, 클로드 드뷔시와 함께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된 바 있어요. 정약전도 그에 비견되는 인물인데 그가 정약용의 형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아요. 엄청난 세계관을 갖고 있는 선조에 대해 잘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약용이 실사구시에 입각해 성리학을 실학으로 풀어냈다면, 정약전은 그보다 더 실용적인 학문에 관심이 많았어요. 이러한 면들을 영화를 통해 알리고 싶었습니다. 〈왕의 남자〉의 공길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이름 하나로 창조됐듯, 약전과 함께 실존했던 인물인 창대를 대중에게 전하고 싶었고요.”


영화 〈자산어보〉는 고증을 통해 발전한 이야기입니다.
역사적 인물을 다룬 작품에서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인지 헷갈리는 지점이 있습니다.


“보통 영화는 재미와 의미를 추구하잖아요. 〈자산어보〉는 후자입니다. 근거 없는 이야기를 만들면 재미를 위한 영화가 되지만 〈자산어보〉는 의미를 추구하되 재미를 수단으로 활용한 영화예요. 우리 같은 창작자는 기록을 근거로 가공해 진실에 도달해요. 신유박해로 정약전은 흑산에, 정약용은 강진에 갔다는 기록이 있어요. 영화에서 정약전과 정약용을 오가며 소식을 전하는 이강회도 실존 인물이고요. 정약전을 물심양면 도와주는 가거댁 역시 정약전이 흑산에서 한 여인과의 사이에서 아이 둘을 낳고 살았다는 실제 기록을 보고 만든 인물입니다. 제가 이름만 붙였죠. 창작이 가미된 부분은 창대의 가족사 정도예요. 창대의 아버지, 어머니를 제외하면 영화에서 완전한 허구는 별로 없습니다.”


영화의 발단은 정약전이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관객은 창대에 집중하게 되더군요.

“어느 시대나 훌륭한 인물이 존재합니다만 과연 그가 혼자 성과를 이뤘을까요? 그렇지 않죠. 훌륭한 인물에 못지않은 이가 곁에 있어 가능했던 일입니다. 때로는 부모, 친구, 제자일 텐데, 그들이 의미 있는 삶을 가치 있게 발현했기 때문에 그를 통해 배운 거예요. 관객은 윤동주를 보기 위해 영화 〈동주〉를 찾았어요. 그런데 영화가 끝날 즈음 송몽규가 크게 자리합니다. 〈박열〉도 주인공 박열에 집중하고 있는데 말미에는 후미코가 강하게 남죠. 〈자산어보〉도 마찬가지예요. 어느새 관객은 정약전보다 창대를 보고 있을 거예요. 〈동주〉의 송몽규, 〈자산어보〉의 창대처럼 대중이 잘 모르던 인물을 관객의 마음속에 쑥 집어넣고 좋은 영향을 끼치는 일, 영화를 만드는 데 그보다 더 큰 성취가 어디 있겠어요. 우리는 절대 혼자 해낼 수 없다는 걸 알았으면 했어요. 내가 빛나기 위해 나를 빛내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정약전과 창대를 연기한 설경구, 변요한이 배역에 참 잘 어울립니다.
두 배우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집필한 건가요?


“저는 배우를 상상하며 시나리오를 쓰진 않아요.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사극 하면 장군이나 왕을 먼저 떠올리는데 그동안 선비 이미지를 구체화한 영화는 없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설경구란 배우가 이번 영화에서 선비 모습을 제대로 구현해줬네요. 사극이 처음인데도 기가 막힐 정도죠. 먼저 설경구 씨를 캐스팅하고 창대 배역을 함께 논의했어요. 그가 변요한을 추천했죠. 사실 머릿속에 없었는데, 창대 이미지에 붙여보니 괜찮더라고요. 촬영에 들어가고 이렇게까지 연기를 잘할 줄 몰랐어요. 너무 잘해서 사랑스럽더라고요.”


영화에는 정약용의 한시가 극중 상황과 어우러지도록 연출한 장면이 곳곳에 등장한다. 정약전과 정약용이 귀양 가는 갈림길에서 헤어질 때는 ‘율정별(栗亭別)’이, 정약전이 술에 취해 밤바다를 거닐 때는 ‘봉간손암(奉簡巽菴)’이 읊어진다. 이 밖에도 《송정사의》, ‘독소’ ‘애절양’ 등이 당시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대변하며 시대를 뛰어넘는 일침을 가한다.




영화 〈동주〉에서는 윤동주의 시가 영화를 받쳐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자산어보〉에도 다산초당에서 창대와 이강회가 주고받는 한시로 ‘독소’가 등장하는데요, 어떤 의도로 시를 삽입하는지요.

“역사에 등장하는 일화를 〈자산어보〉 전반에 배치하려고 했습니다. 특히 창대와 이강회가 시를 주고받는 장면에서 정약용의 명시 ‘독소(獨笑)’를 활용했어요. 강진 유배 시절 인생의 모순을 헤아리며 씁쓸한 심경을 노래한 시예요. 실제로는 정약용 혼자 썼지만 영화에서는 창대와 이강회가 팽팽하게 주고받습니다. 시를 짓는다는 건 선비의 인생 전체를 걸고 싸우는 세계관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어요. 같은 시기 지구 반대편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총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조선 땅에서는 그보다 훨씬 수준 높은 대결이 펼쳐지고 있었던 거죠. 자긍심을 가져야 할 문화예요. 영화를 입구로 해서 배경에 깔려 있는 사연을 조금만 탐험하면 놀라운 발견들이 많아요.”


소나무 벌채 금지 정책에 대해 저술한 《송정사의》, 어물장수 문순득의 표류 경험을 기록한 《표해시말》처럼 극중 상황이 옛 문헌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한 남성이 군정의 횡포에 고통을 호소하며 스스로 성기를 절단하는 장면도 나오죠. 정약용의 시 ‘애절양(哀切陽)’에 나오는 대목을 옮긴 거예요. 또 가거댁이 마루에 앉아 ‘씨만 중허고 밭 귀한 줄은 모르는 거 말이어라’라는 대사를 합니다. 이 역시 허구가 아니라 실제 정약용이 유배지로 향하며 주막에서 들은 내용을 각색한 거죠. 정약용이 말했습니다. ‘시대를 아파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라고. 이러한 장면들은 외면할 수 없는 그 시대의 진실이기에 담아야 했어요.”



영화는 126분의 러닝타임 동안 흑백으로 진행됩니다.
〈자산어보〉를 흑백으로 촬영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영화 배경이 1800년대잖아요. 특별한 시선이 필요했습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 정약전의 《자산어보》 등 역사의 소중한 순간을 담아내는 데 흑백이면 좋겠더라고요. 요즘같이 흑백 영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에게 흑백 영화는 오래된 것의 재현이 아니고 특별함으로 강조되어 다가갈 거라 생각했어요.”


흑백으로 촬영해서 컬러보다 더 풍부해진 지점이 있다면요.

“영화에서 인간의 본질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인간은 내면과 외면이 다르잖아요. 모든 생명체 중 겉과 속이 다른 건 인간뿐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면 내면이 궁금해지기 마련인데, 색을 걷어내면 인간의 내면을 선명하게 들춰내는 데 유리합니다. 최대한 눈에 밟히는 걸 덜어내고 배경과 인물만 남겼어요. 관객이 인물의 관계와 심리에만 집중하길 바랐거든요. 워낙 검증된 배우들이 연기까지 잘해줘서 흑백 영상의 장점이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현란한 볼거리가 없어도 인물의 감정이 변화무쌍하게 다가올 거예요.”


그럼에도 컬러로 드러낸 장면이 있는데요.

“창대는 서자 신분으로 족보에 오르지 못한 인물이에요. 신분 상승을 원하는 입장에서 처음에는 대역죄인 정약전과 가까워지면 신분 상승에서 멀어진다고 생각해 약전을 배척합니다. 약전이 얼마나 진실한 인간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의 앞길에 불리할 것이라고, 보고 싶은 대로 봤던 거예요. 마지막 부분에서 흑산도가 흑백에서 컬러로 바뀝니다. 비로소 창대가 보이는 대로 볼 수 있게 된 거예요.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진 거죠. 영화를 보는 관객도 그 지점을 느낄 겁니다.”


극중 창대는 “홍어는 홍어 댕기는 길을 알고, 가오리는 가오리 댕기는 길을 안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사람 가는 길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대사죠.
사람은 자신의 길에서 무엇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자신을 아는 일이요. 사실 제일 힘들죠. 창대의 대사 중에 ‘배운 대로 살지 못하면 생긴 대로 살아야지’란 게 있어요. 세상을 살다 보면 배운 게 현실과 맞지 않는 게 많아요. 창대는 《자산어보》의 길을 가지 않고 《목민심서》의 길을 가겠다고 하지만 막상 벼슬을 하니 세상은 너무 다르죠. 그러면 현실이 잘못된 걸까요, 배운 게 잘못된 걸까요? 책 속의 배움과 현실이 부딪쳤을 때 과연 내가 배운 건 무엇이었는지 의심해봐야 돼요. 그건 창대만의 숙제가 아니라 저나 우리 모두가 갖고 사는 숙제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창대가 섬으로 돌아가며 마무리된다. 세상에 나아가 뜻을 펼치고자 했지만 현실과 학문의 부조화를 느낀 창대. 그럼에도 흑산을 향하는 창대의 눈빛이 밝다. 가장 자기다울 수 있는 길을 깨달으면서다. 정약전이 《자산어보》 서문에 창대의 이름을 거론했듯, 진정으로 창대의 내면을 알아보고 인정해줬던 누군가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점차 가까워지는 섬을 두고 창대는 말한다. “흑산(黑山)이 아니오, 자산(玆山)이요”라고.

검정이라고 다 같진 않다. 흑(黑)색이 어둡고 캄캄해 두려운 검정이라면, 자(玆)색은 세상 모든 색이 더해져 그윽한 빛을 띠는 검정이다. 창대가 돌아가는 곳은 어둡고 두려운 흑산이 아니다. 어부로 나고 자란 창대의 삶, 하루하루 묵묵히 살아가는 섬사람들의 일상이 어우러진 그윽한 검정빛의 자산이다. 이준익 감독은 창대를 통해 자산의 가치를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세상의 빛깔을 흑산에서 자산으로 바꿔보자는 작은 몸부림을 담아.
  • 2021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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