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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전야〉 홍지영 감독

외로워도 슬퍼도 행복하면 안 되나요?

글 : 유슬기 기자  / 사진제공 :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생일보다는 생일 전날이, 크리스마스보다는 이브가 더 사람 마음을 간지럽게 하는 게 있다. 폭죽이 터지는 순간보다 터지기 직전의 예감이 주는 기분 좋은 설렘, 좋은 날이 올 것은 확실한데 아직 도착하지 않은 주머니 속의 두근거림. ‘전야’란 그런 행복의 총체를 담고 있다.

홍지영 감독은 2013년 〈결혼전야〉로 결혼을 앞둔 네 커플에 한 사람을 더해 총 아홉 명의 이야기를 그린 바 있다. 네 커플 아홉 명의 이야기는 2021년 〈새해전야〉에도 이어진다. 애당초 보신각 종소리와 함께 새해 전에 개봉하려 했던 이 이야기는 코로나 거리두기 단계 격상으로 2월까지 미뤄졌다. 감독으로서는 아쉽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그는 “우리에게 설이 있어, 새해를 두 번 맞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며 오히려 웃었다.


‘첫날밤’보다 더 설레는 게 어쩌면 ‘전날 밤’인 것 같아요. 〈결혼전야〉에 이어 〈새해전야〉를 담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전야처럼 약간 낯설고 약간 설레는 느낌을 가진 시간이 많지 않잖아요. 관객에게 ‘전야’의 마음이 잘 전달될지 고민이 됐어요. 〈결혼전야〉를 했다고 〈새해전야〉가 더 수월한 것도 아니었고요(웃음). 다만 전야 시리즈는 계속할 거 같아요. 다음 작품은 〈졸업전야〉를 생각하고 있어요. 여행도 그렇잖아요. 여행을 다녀왔을 때의 추억보다 가기 전의 설렘이 더 크죠. 중요한 이벤트를 앞둔 그 마음을 잘 담아보고 싶어요. ‘전야’에 대한 정의는 세 번째 작품까지 만들고 나면 ‘이런 거다’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직은 여전히 어려운 화두입니다.”


〈결혼전야〉부터 함께한 김강우, 이연희 배우는 대본을 보기도 전에 감독님에 대한 신뢰로 작품에 참여했습니다. 데뷔작인 〈키친〉을 함께한 주지훈 배우는 감독님과 여전히 막역한 사이를 이어오고 있고요.

“만약 제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결국은 사람인 거 같아요. 함께하는 배우들과 현장 안과 밖에서 삶을 나누는 편이에요. 처음 본 사이라 하더라도 캐릭터 이야기를 한 다음에는 일상에 대한 질문을 해요. ‘그래서 요즘은 무슨 고민을 해요?’라고요. 내가 배우를 이해하는 게 먼저거든요. 텍스트를 공통분모로 서로의 호감을 나누는 과정이 중요해요. 영화는 감독과 배우가 서로의 빈곳을 엄청나게 채워가야 하는 작업이니까요. 이번에 저에게는 유태오, 최수영 커플이 모험이었어요. 각각의 이미지를 가진 두 사람이 커플이 된다면 어떤 모습일지 보고 싶었거든요. ‘저 사람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증을 주는 인물에 함께하자고 프러포즈를 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아홉 명이 주연인 영화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한 명 한 명과 진실한 교감을 나누며 촬영해야 하니까요.

“밸런스를 잡는 게 쉽지 않았어요. 모두에게 공평하게 분배를 하면서 밀도도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요. 네 커플 아홉 명은 정~말 쉽지 않아요. 편집을 하면서도 마지막까지 고민이 돼요. 인원을 좀 줄여볼까 싶은데, 그럼 또 부족해 보여요(웃음). 아마 다음 작품까지는 이런 구조로 갈 것 같아요.”


영화에는 사랑과 이별을 겪는 20대 커플부터 국제결혼을 준비하는 커플, 이혼 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커플 등 다양한 세대가 나옵니다. 요즘 연애의 감성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는지요.

“저… 아직 젊어요(웃음). 아이를 낳고 잠깐 산후우울증이 있었는데 출산 후 조리원에서 저를 보니 거울 속의 내가 내가 아니더라고요. ‘너 다시 연애할 수 있겠니?’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답할 수가 없었어요. 다른 사랑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 삶에 새로운 연애의 가능성이 닫혔다는 게 실감이 나더라고요.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사랑 이야기는 여전히 창작자에게 숙제이자 즐거움이에요. 어린 스태프들을 만나 요즘 연애 이야기를 듣고 참조하긴 했지만 그 감정에 다가가는 게 크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그중 가장 감정이입이 된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아르헨티나로 떠난 스키장 비정규직 ‘진아(이연희)’의 이야기요. 영화에서 이국의 풍경을 담는다면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멀리 떨어진 아르헨티나여야 했어요.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지만 제안이기도 해요. 사람들이 꿈꾸는 지점을 영화 속에서 먼저 이뤄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요. 진아는 남자 친구에게 일방적인 이별통보를 받고 우발적으로 떠나잖아요. 인생에서 ‘꽤 진실하다고, 건강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무너졌을 때’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죠. 아르헨티나 에피소드에는 그런 로망이 담겨 있어요.”

영화 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해피엔딩에 이르는 다른 세 커플들과 다르게 이연희, 유연석이 맡은 아르헨티나 커플은 오픈 엔딩으로 끝난다. 아르헨티나에 가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판타지지만, 이국의 낯선 풍경이라고 무조건 퐁당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게 또 우리가 밟고 선 현실이다. 홍지영 감독은 서른 시간을 걸려서 아르헨티나에 가고, 이구아수 폭포에 간 것도 기다란 여정인데 관계의 완성까지 가는 데는 무리가 있다고 봤다고 했다.

헐벗은 옥상에서 서툴게 추는 탱고가 두 사람의 엔딩. 엔딩이 될 만한 멋진 장소를 섭외하고 섭외하다 여의치 않아 닿게 된 허름한 옥상이지만 두 사람의 싱그러운 에너지 덕분인지, 마침 뜨겁게 타오른 석양 덕분인지 이 장면은 그 자체로 꽉 찬 한 컷이 됐다. 이 한 장면을 위해 두 배우는 몇 달에 걸쳐 탱고를 연습했지만, 막상 현장에서는 처음 추는 사람들처럼 조심스레 다가갔다. 장소도, 장면도 달라졌지만 감독이 처음 그렸던 장면과는 같았다. 이들의 청춘도, 여정도, 사랑도 가능성으로 열려 있다. 해피엔딩과 견주어 모자람 없는 엔딩이다.


아르헨티나의 허름한 옥상에서 눈부신 탱고를 추는 재헌(유연석)과 진아(이연희), 영화 <새해전야> 스틸.
전작을 포함해 감독님 영화를 관람한 이들의 후기 중 하나는 ‘미술에 대한 찬사’입니다. 아르헨티나는 물론이고, 오월(최수영)의 정원, 용찬(이동휘)의 여행사, 용미(염혜란)의 카페 등 공간 자체와 소품이 주는 정서가 있고, 인물들이 그 안에 녹아들어 더 자연스럽게 다가오죠.

“저는 영화 속 소품 하나하나에도 어떤 의미가 있기를 바라요. 예를 들어 최수영, 유태오 커플의 커플링은 실제로 두 사람을 보여줍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깎이고, 닦이는 사랑이죠. 영화를 처음 만들 때부터 미술이 중요했어요. 인물이 가는 곳, 인물이 하는 일, 인물이 가진 소품 각각이 중요했죠. 유태오 배우가 연기하는 래환이 스노보드 선수라는 순백의 인물이기 때문에 최수영 배우의 오월은 초록이기를 바랐어요. 오월은 꽃보다는 식물이 어울리는 인물이죠. 그가 가진 건강함을 정원으로 보여주고 싶었고요.”


두 사람의 이야기는 “흙 속에 있으니 반짝이더라”라는 대사로 완성이 되는 것 같습니다. 감독님에게도 이 영화가 남긴 한 문장, 혹은 한 장면이 있을까요.

“저에게는 영화 속 모든 상황이 소중했지만, 개인적으로 제 마음을 움직인 장면은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우리 영화가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외로움이 영화의 시작이었거든요. 용찬(이동휘)의 누나인 용미(염혜란)가 자신의 카페에서 외국인 동서(천두링)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서로 말이 안 통하잖아요. 말은 안 통하지만 동생 커플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누나는 아는 거죠. 그 마음을 도닥이는 데 언어는 사실 중요하지 않은 거예요. 통역 앱을 앞에 두고 두 사람이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하거든요. ‘사실은 그게 잘하고 있는 거야. 너만 그런 거 아니야’라는 말이 제 마음에도 와 닿았어요.”


감독님께도 그렇게 도닥여주는 사람이 있나요?
배우자인 민규동 감독님과는 영화를 함께한 오랜 동반자이기도 한데요.


“민규동 감독은 모든 과정을 검토하고 함께하는 사이예요. 서로의 영화에 대해서도 ‘이 이야기가 세상에 없었다가 있어야 하는 이유’를 신뢰하고 동의하는 사이죠. 하지만 도닥여주진 않아요(웃음). 가장 철저하고 걸러지지 않은 언어로 말해서 서로 예의를 지키자며 호소하는 인물이기도 해요. 그럼 민규동 감독이 물어봐요. ‘나중에 이 영화를 완성한 다음에 손댈 수 없을 때 해주는 게 좋아? 여지가 있을 때 말해주는 게 좋아?’라고요. 입에 쓴 약과 몸에 좋은 주사는 어른이어도 어려워요. 하지만 그는 가장 좋은 모니터 요원이고, 같은 고민을 함께하는 사이임은 확실해요.”


서로 말은 통하지 않지만 마음이 통한 시누이 용미(염혜란)와 야오린(천우링), 영화 <새해전야> 스틸.
“이 이야기가 세상에 없었다가 있어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게 영화의 시작이군요.

“제 영화는 화두, 그러니까 질문에서 시작해요. 〈키친〉은 삼각관계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했어요. 삼각관계에 도덕적인 잣대를 대야 하는가가 궁금했고 그 정수를 들여다보고 싶었죠. 〈결혼전야〉는 결혼에 실려 있는 많은 무게에 대해 들여다보고 싶었어요. 저 역시 결혼을 경험한 사람이지만 그게 그렇게 무거울 일인가, 무게감을 털고 싶었어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는 기욤 뮈소의 소설 중 한 편을 영화로 한다면 이 작품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죠. 타임슬립이라는 장치도, 첫사랑이라는 소재도 저에게는 흥미로웠고요. 〈새해전야〉에서는 뭔가를 엄두 내거나 결심하거나 후회하는 순간들을 밀도 있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번 영화의 창작 과정에서 엄두 내고 결심하고 후회하는 순간이 있었다면요.

“제가 그렇게 겁먹고 주눅 들고 비교하고 후회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웃음). 다만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뭔가 뻔해 보이잖아요. 그런데 한 번은 묻고 싶었어요. 모두 행복해지면 안 되나요? 행복은 모두 바라는 건데 왜 뻔한 이야기가 되나요? 그 질문을 용기 있게 던지고, 영화를 완성했다는 자체가 저에게 주는 힐링은 있어요.”


그런 질문을 코로나로 많은 관객과 나누지 못하는 현실이 아쉽기도 하겠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려고 극장에 자주 가는 편이에요. 어떤 포인트에서 관객이 웃고 반응하는지를 보려고요. 그런데 요즘 극장에 정말 사람이 없더라고요. 극장이 일상에서 너무 후순위가 된 거죠. 굉장한 용기를 내야 갈 수 있는 곳이 되었으니까요. 저는 이 영화가 코로나를 관통하는 시기에 개봉했지만,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 시대에 완성작을 내보낸다는 것 자체로도요. 살면서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요.”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날짜 하나가 달라지는 것뿐인데 ‘새해’가 되면 뭔가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 분기점 하나가 생기는 것만으로도 새해는 복되다. 우리가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아라”고 외치는 건, 새로 시작할 용기, 다시 행복해질 다짐을 한번 해보자는 덕담일지 모른다. 설에 찾아온 〈새해전야〉지만, 홍지영 감독의 말대로 새해를 두 번 맞을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행운인가. 인생의 비수기를 보내는 당신이라도, 외로움이 사무치는 오늘이라도 해피엔딩을 꿈꾸는 마음만큼은 버리지 말자. 깨진 도자기를 다시 붙이면 더 튼튼한 그릇이 된다는 영화 속 대사를 기억한다.
  • 2021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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